VMSPACE는 국내 최고의 건축 포털 매거진입니다. 회원가입을 하시면 보다 편리하게 정보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Login 회원가입
Naver 로그인


다채로운 시각과 문화적 경험을 일으키는, 주거와 전시의 결합: 범어 책가도

김동진 + 로디자인

김동진
사진
노경
자료제공
로디자인
진행
김정은 편집장
background

「SPACE(공간)」 2024년 4월호 (통권 677호) 

 

 

‘책가도(冊架圖)’는 지그재그로 긴장감 있게 쌓아놓은 책더미와 서재의 다채로운 일상용품을 적절히 배치해 구성하는 조선 시대 민화 종류 중 하나다. 이 정물화는 조선 선비의 격조를 보여주는 도자기, 문방구류 그리고 책갑으로 묶인 서책 더미들을 격자로 구획된 책장의 기본 질서 안에서 자유롭게 채우면서, 화면 전체를 조화롭게 배치해 그려진다. 책가도는 조선 시대의 선비정신과 일상적인 생활상을 격자 구획 안에 온전히 담아내면서 자기만의 세계관과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부유한 계층이 문화와 예술에 몰두하게 된다. 그들은 문화적으로 기층민과 자신들을 구별 짓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진기한 사물을 전시하는 공간인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y)’을 만든다. 진기한 사물을 전시하면서 내면세계를 공간적으로 드러내는 호기심의 방과 맥을 같이하는 책가도는, 동서양의 문화를 보여주는 그림 양식인 셈이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건축주가 소유한 다양한 미술품을 일상의 문화적 요소와 조화시키고자 했다. 즉 주거와 전시가 공존하며 각각의 생활공간이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방안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Diagram of architectural façades 

 

Diagram 

 

책가도의 선반들은 리듬감 있는 격자 체계로 구획되어 화면에 기본 질서를 부여하고, 크고 작게 구획된 공간마다 각기 다른 소우주가 병치된다. 마치 저마다의 매트릭스 속에 세계가 다층적으로 존재하듯, 각자만의 색깔을 드러내며 다중적인 평행우주를 그린다. 이는 책장의 구획마다 개별적인 시점에 따라 특정한 사물들을 배치해, 그 내부 세계에 사물의 고유한 감성적 특성이 스며들도록 장치한 것이다.

 

책가도의 칸마다 다른 소점을 가지는 이러한 다시점 구도의 표현을, 다양한 행위의 공간이 수직적으로 병렬 적층되는 도시의 주거 건축에 공간적으로 적용해보면 어떨까? 

먼저 작은 면적의 대지라는 조건을 활용해, 도널드 저드의 수직 나열된 상자들처럼, 평행한 위계 원칙을 적용해 다섯 개 층을 적층했다. 볼륨이 일률적으로 분리 적층되는 공간적 건조함을 피하고자, 층마다 재료와 공간적 분위기로 톤을 달리하고 그에 걸맞은 미술 작품을 분류 배치해 저마다 다른 색깔의 생활공간이 자리 잡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층으로 단절될 수 있는 수직적 관계를 허물고 교통하는 계단을 내부 공간에 관통시켰다.

저층부는 전시 전용 공간으로 화이트 큐브의 전시실처럼 중성적 공간에 그림을 나열하는 근대적 미술 전시 형식을 취했다면, 주거부에는 미술품들이 생활공간의 특정한 성격과 흐름에 따라 공간적 내러티브를 구성하도록 배치했다.

하나의 주거 볼륨 안에는 여러 공간으로 분할된 각각의 내부 세계가 평행하게 공존하지만, 예술 작품이 배치된 각 공간은 전체를 관통하는 계단을 통해 사람이 움직이면서 느끼는 시점에 따라, 마치 그림의 입체화면 속을 드나드는 것처럼 다채로운 장소들을 경험하게 한다. 비록 물리적으로 구성된 3차원의 공간이지만 공간마다 느닷없이 나타나는 작품들 속 판타지의 세계가 얽히고 중첩되어, 일상의 움직임 속에서 시시각각 다른 시점의 변화와 공간적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은 세상을 바라볼 때, 계산된 소실점을 부여해 공간을 시각화하도록 코드화되면서 스스로 직각 체계 공간 내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명확한 소점이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에 갇힌 인류를, 어쩌면 저마다의 우주관을 가진 예술 작품들은 마치 세상을 구원이라도 하듯, 닫힌 공간 체계의 관념에서 해방시켜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부를 산책하다 보면 곳곳에 흩뿌려진 미술품들이 각 공간 고유의 특색과 어우러져, 셀마다 차별화된 공간으로 인식되도록 한다. 건물의 창문은 한쪽은 공원을 향하고, 다른 한쪽은 도시의 원경을 향해 열려 있다. 사람들이 건물 내에서 움직이며 서로 다른 풍경을 교차하듯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개구부를 배치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움직임,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 내부 벽에 걸린 그림들이 던져주는 다채로운 작가의 예술적 세계관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일상에서 낯선 체험을 받아들이며 세상과 소통하기를 바랐다. 

 

 

 

하나의 건물이지만, 저층부의 전시 공간이 추후 주거시설과 분리해 운영되는 것도 고려해 볼륨과 입구를 구성했다. 볼륨 자체는 간결하게 표현했지만, 외관 디테일은 내부의 다중 세계를 자연스럽게 암시하듯, 견고하지만 유연한 형태를 표현할 수 있는 재료 유리섬유강화콘크리트(GFRC)를 활용해 입체감 있게 구성했다.

 

조선 시대 책가도는 선비들의 마음과 생활상을 공간감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자신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그림이었다면, 주택이면서 전시 공간으로 계획된 범어 책가도는 예술 문화를 사랑하는 거주자의 정신과 세계관이 공간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다. 수직으로 적층된 셀들 속 공간에 전시된 다양한 예술품이 생활 속 사물과 거주자의 일상에서 여러 의미를 산출하는 ‘관계적 텍스트’로 작동되기를 바란다. ​​ 

 

월간 「SPACE(공간)」 677호(2024년 04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계

김동진(홍익대학교)+ (주)로디자인 도시환경건축연구소

설계담당

천수연, 서원학, 이연진

위치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136-1

용도

단독주택, 전시장

대지면적

230.4m²

건축면적

135.96m²

연면적

477.93m²

규모

지상 4층, 지하 1층

주차

3대

높이

16.84m

건폐율

59.01%

용적률

123.89%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외부마감

GFRC, 알루미늄 압출패널, 박판타일, 로이삼중유리

내부마감

페인트, 원목마루

구조설계

SDM구조기술사사무소

기계,전기설계

(주)수양엔지니어링

시공

(주)일원산업

설계기간

2021. 1. ~ 7.

시공기간

2022. 2. ~ 2023. 8.

건축주

조재용, 김현지

인테리어설계

김동진, 김유정

인테리어 담당

신보람, 김완진, 정명훈, 임연주


김동진
김동진은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건축에서 실무를 익혔으며, 프랑스 파리 벨빌 국립건축대학교에서 수학했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주)로디자인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5년부터 홍익대학교 건축공학부 건축디자인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작으로는 공주 파크애드호크라시, 논현 마트료시카, 청담 마치래빗, 제주 베이힐 풀앤빌라, 청담 바티-리을 등이 있다. 31·38·42회 한국건축가협회상, 25·33회 서울특별시건축상, 1회 젊은건축가상, 미국 더 아키텍처 마스터 프라이즈 2019, 독일 아이코닉 어워드 2015, 2022 등 다수의 건축상을 수상했다. 2016 베니스비엔날레 <용적률 게임>, 2014 독일 베를린 국제전시회 <서울: 메타시티를 향하여> 등의 국내외 건축 전시회에도 초청되어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