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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매산의 사계절을 담아내다: 철쭉과 억새 사이

임영환
사진
윤준환
자료제공
디림건축사사무소
진행
김예람 기자
background

‘철쭉과 억새 사이’는 황매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잠시 머무르는 관광휴게소다. 이곳을 설계한 임영환은 건축물에 틈을 내어, 계절에 따라 역동적으로 모습을 바꾸는 황매산의 풍광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황매평전

소백산맥의 고봉인 황매산은 경상남도 합천에 위치한 해발 1,113m 높이의 산이다. 정확하게는 합천군과 산청군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합천호의 물속에 비친 모습이 호수에 떠 있는 매화와 비슷하다고 해서 ‘수중매’라고도 불린다. 황매산 정상 부근의 700~900m 지대는 평평한 둔덕 위에 뭉툭한 봉우리를 얹어놓은 형상을 하고 있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생긴 모양이 이렇다 보니 한동안 목장으로 사용됐고, 젖소를 풀어 기르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수목마저 거의 사라졌다. 일대가 민둥산이 되어버렸지만 자연의 힘은 역시 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키 큰 나무 하나 없는 산 위의 평야에 작은 관목과 억새가 다시 자라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철쭉과 억새가 산 전체를 뒤덮는 모습을 만들어내었다. 

 

인간의 때가 묻은 자연

루이스 칸은 “자연에는 자연의 기록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기록이 있다”고 말했지만 여기 황매평전에는 자연과 인간의 기록이 섞여있다. 인간의 때가 묻은 자연인 것이다. 목장이 운영되는 동안 황폐해진 산의 식생은 다행히 자연의 섭리에 의해 서서히 재생됐지만, 우리는 이러한 황매평전의 기록에 인간의 때를 한 번 더 묻혀야 했다. 처음 황매산에 올랐을 때는 가을이었다. 억새군락이 산 전체를 덮고 있었는데, 서쪽으로 기울어진 햇빛을 뒤로 받은 억새밭이 작은 바람에도 마치 은빛 비늘처럼 일렁였다. 그 장관을 보니 사람들이 왜 이곳을 은빛 억새밭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고 산을 내려오는데, 억새를 보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서 건축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때부터 “자연의 기록에 사람의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는 건축 방식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철쭉과 억새 사이

철쭉과 억새 사이는 황매산군립공원의 관광휴게소로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억새밭이 펼쳐지는 해발 850m 등산로 길목에서 대문 역할을 한다. 대지는 황매평전과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기 때문에 마치 계곡이 자연스럽게 인간과 자연의 세계를 분리해놓은 듯 보인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건물은 정확하게 반원의 형태다. 계곡을 등지고 산을 배경으로 건물이 서 있지만 그 높이가 낮아 황매평전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는다. 또한 키 큰 나무가 없어 햇빛을 피할 곳조차 마땅치 않은 고도의 평야에서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그늘과 휴식 공간이 된다. 반원 모양으로 펼쳐진 건물은 군데군데 비워져 있어 그 사이로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들어온다. ‘철쭉과 억새 사이’는 건물의 틈으로 철쭉과 억새가 언뜻언뜻 보이는 모습을 상상해서 지은 이름이지만 한편으로는 철쭉 보러 봄나들이 갈까, 억새 보러 가을여행 갈까 고민하는 우리의 마음을 은유하기도 한다. 

 

 

 

 


 


 

재료의 감각

건물은 콘크리트 뼈대에 철과 유리만 입힌 상태로 완성됐다. 감싼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입혔기 때문에, 콘크리트 구조가 철과 유리 사이에서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위아래로 살짝 맞댄 철판 사이로 지붕 슬래브의 콘크리트 면이 보이고, 중간에 박힌 기둥과 거기에서 이어지는 콘크리트 바닥 구조는 등산객을 위한 벤치 역할을 한다. 사계절이 변화함에 따라 콘크리트와 철은 점점 자연과 동화되면서 색이 바뀌고, 비바람에 녹슬고 얼룩진다. 외장재로 사용된 내후성강판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부식되는 재료다. 처음 설치될 때는 단색의 검정이지만 표면이 부식되면서 밝은 오렌지색으로 변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거치면서 거기에 붉은 색깔이 조금씩 강해지다가 결국에는 검붉은 암적색으로 정착하는 것이다. 편의상 단순한 색깔로 설명했지만 실제 보이는 것은 더욱 변화무쌍하다. 비바람에 노출되는 정도에 따라 같은 면이라도 부식의 속도가 달라지고,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과 아닌 곳의 모양새가 또 다르다. 날이 흐린지 맑은지, 해와 달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이른 새벽, 이슬이 맺힌 강판은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지만 해질 무렵 노을 빛을 받으면 주변까지 함께 붉게 물들이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점에서 내후성강판은 황매산의 다채로운 날씨와 계절을 표현하는 데 제격인 재료라 생각했다. 봄의 철쭉과는 비슷해서 보기 좋고, 여름의 청록색과는 보색으로 조화롭다. 가을의 누런 억새밭은 거칠고 강한 철판의 물성을 순화시키고, 겨울철 건물은 눈 덮인 새 하얀 세상의 한 점 아이콘이다. 황매산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석산은 아니지만 비교적 바위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등산로 바닥에는 흙과 함께 조각난 돌이 많았다. 나는 건물의 주변에 작은 돌을 채웠고, 철판을 얇게 접어 건물과 주차장의 경계를 만든 다음 그 안쪽에 회색 조약돌을 깔았다. 걷기에는 다소 불편하지만 바닥의 느낌과 소리가 산행을 할 때의 감각과 유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치 등산로와 같은 공간으로 인식할 거라 생각했다. 건축재료가 가진 물성이 가장 돋보일 때는 눈으로 보는 감각이 아니라 손과 발로 느끼는 촉각과 귀로 기억하는 청각을 제공할 때라고 본다. 페터 춤토르의 테르메 발스는 나의 이러한 사고에 확신을 주었다. 맨발과 맨손으로 느꼈던 편마암 바닥과 벽의 촉감이 그곳의 기억을 내 몸에 각인시켰다. 좁고 높은 공간에서 증폭된 온천탕의 물소리가 아직도 내 뇌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황매산의 절경 또한 이곳에서 느끼는 발의 감촉과 작은 돌이 부딪치며 냈던 소리와 함께 기억되기를 바란다. 

 

황매산 가는 길

이 프로젝트는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정욱주의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황매산군립공원 마스터플랜의 일환으로 시작된 기본 구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 안에 들어갈 관광휴게소를 설계할 건축가로 나를 소개했다. 2016년 어느 날, 정 교수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사실 나는 황매산이라는 곳을 알지 못했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동대구역까지 간 후, 렌트카를 빌려 다시 2시간 가까이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황매산은 이젠 내가 가장 많이 올라가본 산이 되었지만 말이다. 공사가 한창이던 지난 가을, 현장으로 가는 나의 머릿속에는 항상 은빛 억새밭이 펼쳐졌다. 방문에 하루를 온전하게 사용해야 하는 현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오랜만에 헤드셋까지 가방에 챙겨가는 내 모습을 보면 소풍을 가는 건지 감리를 하러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출사 명소로도 유명한 억새군락지는 우리 땅에서는 보기 힘든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황매평전의 억새군락을 볼 때면 이상하게 스웨덴 스톡홀롬 교외에 있는 우드랜드 묘지공원의 인공 언덕이 떠오른다. 시구르드 레베렌츠가 설계한 언덕 맨 위에 ‘명상의 숲’ 벤치에 앉아서 내려다본 주변의 전경이 황매산 억새밭 속에서 내려다본 황매평전과 중첩되어 보인다. 지형이 비슷해서 생긴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고,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인공 언덕의 지형이 황매평전에 개입한 인간의 흔적과 겹쳐 보였을 수도 있다. 문득 세월의 힘으로 많은 것을 되돌려놓은 자연의 섭리가 무지한 건축가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싶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빨리 봄이 오고 몹쓸 팬데믹도 사라지면 울긋불긋한 철쭉으로 곱게 물든 황매평전을 보러 합천으로 소풍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임영환
임영환은 홍익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과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하다가 2006년부터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7년 파트너 김선현과 (주)디림건축사사무소를 설립했다. 현재 서울시 공공건축가, 금천구 MP, 대한건축학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안중근의사기념관, CJ나인브릿지 더포럼, 스타덤사옥, 쉬즈메디병원, 네이버어린이집, 세마당집 등이 있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 한국건축가협회상, 서울시건축상 최우수상, 경기도건축상, 젊은건축가상, 김수근건축상 프리뷰상 등 다수의 건축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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