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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 SPACE] 1967년 4월호, 건축가 박길룡 특집: 한국 1세대 건축가 연구의 출발점

김현섭 (고려대학교 교수)
진행
김정은 편집장

 

「SPACE」 6호(1967년 4월호) ▶ e-매거진보기​ ​

 

「SPACE(공간)」 2022년 6월호 (통권 655호)

「SPACE(공간)」 창간호(1966년 11월호)의 ‘편집후기’에서는 당초 계획과 달리 싣지 못한 몇몇 기사를 거론한다. 창간호에 수반되는 지면 부족이나 예기치 못했던 원고 미비 등이 이유였다. 그 가운데는 ‘朴吉龍氏 푸로필’도 있었다.▼1 한국 1세대 건축가의 대표자인 바로 그 박길룡(1898~1943) 아니겠나. 우리가 잘 알듯 그는 일제강점기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에서 공부하고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으며, 1932년 ‘박길룡건축사무소’를 개소해 종로의 화신백화점(1937)을 비롯한 다수의 근대식 건물을 설계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재래주택 개선과 온돌개량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계몽 활동에 열심이었으며, 당시 조선인 건축가들을 두루 품어낸 인물이기도 했다. 이런 박길룡을 「SPACE」가 첫 호부터 소개하려 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선배 건축가로부터의 계보를 확인함으로써만이 후배들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점검하고 미래를 향한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켜보건대 그의 기사가 미뤄진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박길룡과 같은 인물에 대한 기사를 간단한 프로필 정도로 끝낼 일은 아니지 않나. 비록 ‘건축가 특집’으로서는 「SPACE」 5호(1967년 3월호)의 김중업에게 첫 순서를 내주고 말았지만 말이다. 한 달 후인 1967년 4월, 「SPACE」 6호는 박길룡을 특집으로 다룬다. ‘건축가 박길룡: 24주기를 맞이하여’라는 제목 아래였다. 스물 네 해 전 같은 달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린다는 의미를 부가했던 것이다.

 

 

특집 ‘건축가 박길룡: 24주기를 맞이하여’의 시작 페이지, 「SPACE」 6호, 6쪽.

 

이 특집 섹션은 목차와 임응식의 ‘공간’ 사진에 곧이어 배치된다. 한 면을 가득 채운 박길룡의 프로필 사진과 아들 박용구가 24년 전 썼던 애도사가 오프닝이라면, 네 쪽에 걸친 작품 사진에 이은 윤일주의 글 ‘건축가와 사회: 박길룡 씨의 생애와 업적이 뜻하는 것’은 특집의 총론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박길룡의 지인 10인의 ‘추상록(追想錄)’이 뒤따르고, 그의 약력과 함께 ‘저서 및 유고목록’이 정리됐다. 그리고는 ‘유고목록’ 중의 글 세 편이 부록처럼 덧붙여진다. ‘소액수입자 주택 시안(한식)’(미발표), ‘조선주택잡감’(발표),▼2 ‘신시가지 주거지역 주가건축 경향에 대하여’(미발표) 순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게 하나 있다. 박길룡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서 곧바로(1943년 5월호) ‘추도기(追悼記)’를 냈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진, 약력, 작품 사진과 함께 10인의 글을 게재했던 것이다. 「SPACE」는 이를 참조하며 박길룡 특집의 형식과 내용을 진전시켰다고 생각되는데(전술한 박용구의 글은 「조선과 건축」에 낸 추도기를 번역한 것이고 윤일주도 이 잡지의 정보를 적극 활용한다), 그 사반세기 사이 박길룡이라는 거목을 조명한 작업이 없었다는 점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에게 그럴 여력은 없었나 보다. 총론을 담당한 윤일주마저도 그에 대해 “건축계의 대선배, 화신백화점의 설계자란 것 이외에 별로 아는 것이 없었음”을 고백하며, 「SPACE」 측이 사전 조사한 자료로 말미암아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작품별 화보에 더해 ‘작가론’과 ‘작품론’까지 담았던, 한 달 전의 김중업 특집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SPACE」 6호, 8쪽.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SPACE」 6호의 박길룡 특집을 더욱 값지게 한다. 여기서부터 박길룡에 대한 자료가 정리되기 시작했고, 한국 1세대 건축가에 대한 연구가 싹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특집은 여러 불비한 면에도 불구하고▼3 그와 함께했던 이들의 육성을 들려주고, 그의 건축관을 담은 글의 샘플을 보여주며, 그의 역사적 위치를 시론적(試論的)으로 말해준다. 먼저 윤일주의 글을 보자. 그는 글의 제목에 보였듯, 서두에서 ‘건축가와 사회’의 관계를 논하며 “1920~30년대의 사회적 양상을 캐어 그의 건축사상의 위치를 부각시켜” 보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결국 관심은 일제강점기라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박길룡이 과연 얼마나 ‘민족적 긍지’를 지켰고 이를 건축적으로 나타냈는가에 있었던 것이다. 윤일주는 당초 그에게서 발견될지 모를 ‘친일적 요소’에 대한 우려를 가졌지만, 그가 “한국인으로서 뚜렷한 입장과 주장”을 가졌음을 확인했다며 안도한다. 한국주택에 대한 통찰과 개량을 위한 노력, 한국어가 혼용된 잡지 「건축조선(建築朝鮮)」의 발행, 당시 활용성이 불분명했던 한국어 건축용어집의 집필 등이 근거였다. 「조선과 건축」 추도기에서 박길룡과 박용구만이 창씨개명 하지 않은 이름으로 등장했다는 사실 또한 강조된다.▼4 그의 건축관과 관련해서도, 재래주택 개선을 위해 따르지 말아야 할 것 가운데 일본식도 있었음에 방점을 찍었다. 박길룡이 졸업을 앞두고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조선인 학생 다수가 참여했던 3.1운동에 무관했던 이력이나 일제 말의 경력에 내재한 “식민지 시대의 테크노크라트가 당한 한계와 모순”에 대해 근래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는데,▼5 아직은 이게 그리 쉽게 거론할 문제는 아니었던 듯싶다. 그런 비판의 대상이 될 1차 서사 자체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으리라. 아마도 윤일주가 박길룡의 글과 작품에서 발견해낸 ‘기능주의’ 및 ‘모더니티’의 가능성이야말로▼6 이후의 서사를 위한 발판일 것이다. 하지만 박길룡의 건축 이력이 큰 의의와 더불어 시대적 한계를 가졌듯 윤일주의 서사도 그랬던 것 같다. 그가 ‘건축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가졌던 놀랄 만큼 명징했던 개념이 박길룡을 논하며 다소 둔탁해졌으니 말이다. 건축가가 사회적 조건을 “얼마나 멀리 벗어나서 그의 전위성을 발휘”하고 “당대 예술에 얼마나 투철하게 반영”했는지가 그가 서두에서 제시한 평가기준이었다.

 

「SPACE」 6호, 9쪽. 

 

한편, 10인의 추상록은 박길룡의 보스 기질과 폭넓은 인맥, 일본인들에게까지 존경받은 품성, 사무소에서의 일상 등을 다면적으로 전해준다. 그중 김한섭의 글은 윤일주의 글 못지않게 총론적이다. 박길룡건축사무소의 마지막 구성원으로서 그의 밑에서 13개월 근무했던 경험이 바탕이었다. 김한섭의 업무는 박길룡의 설계 및 연구에 대한 보조로 대별됐는데, 그가 박길룡의 주택연구에 시기 구분을 시도한 점이 뜻깊다. 박길룡이 초년에는 ‘민가연구’, 중년에는 ‘재래주택의 개량’, 만년에는 ‘소주택(서민주택)의 연구’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소주택에 대한 관심은 사실 박길룡의 초기 출판물부터 이미 표출됐지만,▼7 김한섭의 큰 그림에서는 지엽적인 사안일지 모른다. 그는 박길룡이 국제건축 양식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강조하면서도 민족적 지역적 건축양식을 추구”함으로써 후진들의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로까지 나아갔다. 또한 그의 글에서는 박길룡이 안암동의 ‘집장사 집’을 비판한 일화라든가, 대량생산 프리패브리케이션을 강조하며 1935년 즈음 4척의 모듈을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눈에 띈다. 전자는 현재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이른바 ‘도시형 한옥’에 대한 박길룡의 입장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후자는 박길룡이 『재래식 주가개선에 대하야』(1편, 1933) 등에서 주장한 8척 기준과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김한섭의 글 이외에도, 박길룡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김해림이나, 화신백화점 내부의 “기형적이고 모순된 부분”을 지적한 전창일의 글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더욱 빠트릴 수 없는 게 박길룡건축사무소 건물을 공평동에 신축했던 일에 대한 최광필의 회고다. 그에 따르면 원래의 사무소는 관훈동에 있는 목조건물 2층의 10평 공간을 사용했지만, 점차 공간이 협소해져 3년여 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공평동에 건물을 짓게 됐다는 것이다. 신축건물은 1층이 살림집, 2층이 사무실로 구성됐는데, 직원 집무실이 15평이고, 박길룡 전용실은 5~6평에 응접세트까지 구비했다. 박길룡이 처음부터 공평동에 사무소를 냈다고 오인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글은 그에 대한 보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공간사옥을 건축하고 자신의 공간을 가졌던 김수근의 경우를 떠올리게도 한다.▼8 각 세대의 대표자인 두 사람은 각자의 공간으로 여러 인사들을 이끌며 왕성히 활동했던 점이 유사한데, 심지어는 그들의 사회와의 관계성이 현재적 관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는 점도 그렇다.

 

 

「SPACE」 6호, 10쪽.

 

끝으로, 특집에 포함된 유고에 대해 논하자. 박길룡 연구가 일정 부분 진척된 오늘에도 그 세 편이 출판된 것은 의미 있다.▼9 미발표 원고 둘을 선보인 것 때문만은 아니다. 「SPACE」 편집팀이 어떤 기준으로 이 셋을 택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여기에 나름의 내적 논리가 흐르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글들을 엮어보면 그의 절충주의적 입장과 기능주의적 입장 사이의 모순이 종종 발견되는 한편으로, 그의 건축관(주택관)이 종합적으로 파악된다. ‘소액수입자 주택 시안(한식)’이 집중식 평면, 중복도, 지하실, 온돌 아궁이, 8척의 칸(間) 단위 등을 바탕으로▼10 소규모 주택을 제안하는 각론이라면, ‘조선주택잡감’은 당시의 조선주택을 비판하며 ‘주택개선의 근본이념’을 피력하는 일반론이다. 그리고 ‘신시가지 주거지역 주가건축 경향에 대하여’는 개별 주택의 범위를 넘어선 도시계획적 차원의 주택론인데, 이윤만을 추구한 신시가지(돈암, 안암, 신설)의 건축 경향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가 영국의 전원도시를 준거로 평하는 점도 흥미롭다. 이렇게 볼 때 박길룡의 건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연구된 것 못지않게 앞으로도 연구할 것이 많아 보인다. 「SPACE」가 게재한 그의 작품 사진에서든, 글 목록에서든 명쾌한 해명을 요하는 일들이 아직 다수 아닌가. (글 김현섭 / 진행 김정은 편집장)

 

 

다음 호에는 서재원이 「SPACE」 56호(1971년 7월호)에 게재된 공일곤건축연구소의 OH씨 댁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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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PACE(공간)」 650호(2022년 1월호) ‘리-비지트 「SPACE」’ 13 참고.

2 이 글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1941년 4월호)에 출판된 것이지만 친필 원고(1941.3.21) 자체를 중요시해 여기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건축」의 일본어 출판본과 「SPACE」의 한국어 출판본 사이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데, 특히 전자의 후반부 여러 문장이 후자에서 빠진 점이 두드러진다.

3 대략이나마 ‘저서 및 유고목록’이 실린 것과 달리 ‘건축작품 목록’이 아예 빠진 것이 대표적이다. 다소 임의적으로 보이는 열 장의 작품 사진이 이를 대신하기도 어렵다. 

4 그러나 유상하(劉相夏)의 글 역시 한국식 이름으로 나갔다. 한편, 박길룡건축사무소를 이어 받은 김세연이 「조선과 건축」 같은 호에 곧바로 광고를 냈는데, 창씨된 이름 ‘金岡世演’이 쓰였다. 

5 함성호, ‘연대하는 건축 - 건축의 사회적 실천과 건축가’, 「건축평단」 6호(2016.6), 50~63쪽. 그러고 보니 「조선과 건축」의 추도기에서 가사이 시게오(葛西重男)는 박길룡을 ‘내선일체의 인물’로 평하기도 했다. 

6 그는 박길룡의 ‘조선주택잡감’에서 (특히 “... 기성관념에 포획됨이 없이, 생활 자체가 짜내는 새로운 방향에서 재발족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기능주의를, 그리고 ‘경의전(수도육군병원)’ 등의 디자인에서 모더니티를 본다. 그런데 근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일부로 거듭난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의 설계자가 박길룡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검증이 필요하다.

7 초기의 예로 ‘우리 주가개량에 대한 나의 고찰 (24)~(25)’(「조선일보」, 1926.11.9.~10), ‘개량 소주택의 일안’(「조선」, 1928.10) 등 참고. 

8 「SPACE」 638호(2021년 1월호) ‘리-비지트 「SPACE」’ 1 참고. 

9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81년 제출된 최순애의 홍익대학교 석사논문 「박길룡의 생애와 건축에 관한 연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그의 작품론과 주택개량론 등에 관해 여러 연구가 진행돼왔다.

10 글 쓴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이 주택의 기본 개념은 『재래식 주가개선에 대하야』(1편, 1933; 2편, 1937) 등에서 주장한 바와 상통한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김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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