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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 SPACE] 한국상업은행 전돌 벽화와 민중, 전통: ‘건축, 조각, 시, 그리고 민중’

조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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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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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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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93호(1975년 2월호)의 표지

 

「SPACE(공간)」는 동시대 건축을 소개하는 건축 전문지이기보다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예술 분야를 망라한 종합 예술지로 출범했다. 「SPACE」 93호(1975년 2월호)에 게재된 건축가 조건영, 미술가 오윤, 미술평론가 최민의 대담 ‘건축, 조각, 시, 그리고 민중’은 여러 분야 예술가들에게 공론장을 제공하던 「SPACE」의 이상을 잘 보여준다. 대담은 조건영이 설계하고 오윤, 오경환, 윤광주가 벽화를 제작한 한국상업은행 벽화 연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벽화가 설치된 한국상업은행 삼각지 지점, 구의동 지점, 동대문 지점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은 동대문 지점(현 우리은행 종로4가금융센터)뿐이다. 건물은 별다른 장식 없는 단순한 2층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하지만 1층 전면의 배 모양 구조물에 부착된 대형 벽화(3.4×32m) 때문인지 건물의 총체적인 인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벽화 위로 드러난 2층은 깊게 후퇴한 장방형 창문이 반복되며 기하학적 패턴을 이루고, 1~2층을 연결하는 S자형 계단이 두 개의 원통형 매스를 만든다. 혹자는 한국상업은행 동대문 지점에서 기하학적 엄밀성과 공격적인 수직성, 날카로운 예각 등을 특징으로 하는 조건영 건축 양식의 시원을 찾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JS빌딩(1990), 한겨레신문 사옥(1991) 등 조건영의 대표작들이 대체로 1990년대 들어서 지어졌으니, 그가 20대 중반에 설계한 이 건물은 실로 귀한 자료다. 그러나 최민이 대담에서 조건영을 건축에서 상징이나 기호적 측면보다 기능을 중시한 ‘기능주의자’라고 불렀듯, 이 건물은 작가주의적 면모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건물 1층 파사드 전체를 색과 질감 모두 이질적인 대형 벽화에게 양보한 채 뒤로 물러서 있는 건축가의 겸허함에 눈길이 간다. 

‘평화’라는 제목의 이 벽화는 두께 3cm의 동일한 크기의 정방형 전돌(전통 벽돌) 1,000여 장을 이용해 인물과 산, 구름 등의 형상을 단순화시켜 표현했다. 벽화는 건물 내부에도 이어지는데, 4×6m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내벽 벽화는 부여에서 출토된 ‘산수문전’(山水文塼)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외벽이 형상을 고부조로 표현해 조각적 성격을 강조한 것과 달리, 내벽은 각기 다른 형태의 색깔의 전돌과 시멘트를 섞어 회화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아직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일명 1%법)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 가외 비용을 들여가며 건물 전면에 거대한 벽화를 설치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조건영은 20대 중반의 무명 건축가였고, 오윤과 오경환은 미술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다. 이 프로젝트는 이들의 대학 동창이자 ‘현실동인’(1969)의 회원인 임세택의 부친이 한국상업은행장이라 가능했다. 친구 아버지에게 경복궁 자경전 꽃담처럼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어주겠다고 설득해 건물 벽화 프로젝트를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당시 광화문에 위치한 조건영의 기인건축(이후 기산건축) 사무실 공간 한편에서 벽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신라 토우의 장인 윤경렬의 아들 윤광주가 여기에 가담했다. 


 

‘건축, 조각, 시, 그리고 민중’, 「SPACE」 93호, 24~26, 30쪽.

‘한국고건축단장(15) 전돌’, 「SPACE」 49호(1970년 12월호), 69, 71쪽.

 

「SPACE」 93호 대담의 의의는 여러 분야의 진보적인 예술가들이 모여 민중이 누구이며, 민중적인 예술이 무엇인가를 논의한 선구적인 시도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대담자들은 벽화 매체의 공적 성격에 초점을 맞췄다. 최민은 미술관을 예술 작품의 무덤이라고 단정하고, 미술이 민중과 만나려면 거리로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기존에 건축가와 미술가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벽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김중업의 프랑스 대사관(1961, 윤명로·김종학·유강열 벽화), 김수근의 오양빌딩(1962, 정규 벽화), 세운상가(1967, 김영주 벽화) 등 노출콘크리트의 거친 표면을 다색의 도자기 파편으로 장식하는 몇몇 벽화가 1960년대에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김중업과 김수근 건물에 설치된 벽화가 건축을 미적, 조형적으로 보완하는 성격의 것이라면, 한국상업은행 벽화는 미술이 거리의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에 관한 문제, 즉 예술의 민주화와 민중적 양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오윤은 대학 시절부터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등이 주도한 멕시코 벽화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이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1979년 오윤이 최민, 성완경, 김정헌 등과 함께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을 결성하고 모더니즘의 자폐성을 넘어 현실주의에 기반한 소통을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80년대 미술운동의 서막을 알린 현실과 발언 활동에서 오윤의 관심은 벽화보다는 대량복제가 가능한 판화였다. 그러나 많은 민중미술의 실천가들에게 벽화는, 미술을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민중의 삶 속에서 작동하게 하는 정치적이고 대안적인 매체였다.그럼에도 한국상업은행 벽화를 민중미술의 직접적인 선례로 한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일 수 있다. 사실 민중이 체제 전복의 가능성을 가진 적극적인 역사적 주체로 널리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1980년대 초반이다. 1960~1970년대 한국 사회를 관통한 키워드는 다름 아닌 민족과 전통이었다.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과 실학을 위시한 근대의식의 태동은 역사학과 문학을 필두로 한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을 흥분시켰고 이는 탈춤, 판소리, 민요, 무속, 민화, 민예 등의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민족주의 열풍은 집권층과 진보 진영을 불문하고 전방위였다. 권보드래와 천정환은 1960년대 민족주의가 갖는 성격을 지적하며, “박정희 정권이 발전론과 민족을 결합시켰다면, 비판적 세력은 ‘민족’이라는 표상을 통해 현존하는 국가 체제의 부당성을 폭로해주는 시공간적 좌표로 도입”했다고 설명했다.▼1 1966년 창간된 이래 「SPACE」도 민족주의의 시대적 부상과 함께 전통의 발굴과 현대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창간 직후부터 최순우, 황수영, 김원룡 등이 필진으로 참여한 ‘우리 전통의 반추’(1966~1967), ‘우리 미의 재발견’(1968~1970) 등의 연재가 전통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건축가 신영훈과 김동현의 ‘한국고건축단장’(1967~1973), 민속학자 심우성의 ‘민속극의 놀이 공간’(1973~1974) 등이 장기간 게재되기도했다. 전돌을 이용한 한국상업은행 벽화는 ‘전통의 발굴과 현대화’라는 「SPACE」의 지속적인 편집 기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윤이 벽화 프로젝트가 끝난 직후 벽돌 공장을 설립하고 전돌의 현대화와 대량화에 매진했다는 사실은 전돌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일회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심은 오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SPACE」 49호(1970년 12월호)에 게재된 ‘한국고건축단장(15) 전돌’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돌의 역사와 제작 방식을 상세히 다루었다. 저자인 신영훈과 김동현은 조선 시대 실학자 박지원이 벽돌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점을 강조했고, 『천공개물(天工開物)』,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 전돌을 다룬 중국과 조선의 문헌을 소개했는데, 이 문헌들은 오윤이 전통 벽돌을 구현하는 데 중요한 참조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71년 부여 무령왕릉의 발굴도 건축자재이자 장식재인 전돌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사건으로 빼놓을 수 없다.

전돌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콘크리트에 대한 당대의 불신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 건축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국립부여박물관 논쟁(1967)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전통 목조건물을 콘크리트로 번안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에 관한 것이었다. 대담 중에 조건영은 “건축에 콘크리트가 구사되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재료가 무시되고 이질적인 또 유행적인 재료로서 외벽이 형성되어 왔는데, 이번 경우에 있어서는 전의 가능성이 실험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윤 역시 비싼 대리석이나 외래의 산업재료를 대체할 대안을 전통에서 찾고 있었다. 미술사학자 조인수는 오윤이 현충사의 시멘트 포장이 흉물스럽다고 지적한 김효신의 「조선일보」 기사를 접했던 사실에 주목했다.▼2 김효신은 당시 서울대학교 교환교수로 와서 불문학을 가르치며 한국 무속을 연구하던 알렉상드르 기유모즈란 프랑스인으로, 그는 기사에서 전(塼)의 아름다움을 옹호했다. 며칠 후 그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는 글이 같은 신문에 실렸는데 오윤은 두 기사를 모두 스크랩해 간직하고 있었다.▼3 김효신이 “고아(高雅)하면서도 졸(拙)하며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전통 전돌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면, 오윤은 그 외관상의 특징을 강조하기보다는 벽돌이 굽는 온도나 재료에 따라 다양한 색감과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건물과 조각의 크기와 형태를 유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재료라는 점을 강조했다.사실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새로운 건축 재료를 누구보다도 갈망했던 이는 다름 아닌 김수근이었다. 1970년대 들어 김수근은 공간사옥(구관 1971, 신관 1977)의 완성과 함께 찬란한 ‘벽돌 시대’를 열었다. 벽돌을 이용한 휴먼스케일의 건물을 통해 1960년대 김수근 건축의 특징인 노출콘크리트의 기념비적 구조물을 넘어서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을 구축한 것이다. 그의 ‘벽돌 시대’는 건축뿐 아니라 미술, 공예, 민속, 문학 등 여러 예술 분야의 전통에 대한 모색 속에서 진행되었다. 실제로 공간사옥에 쓰인 흑벽돌은 한국토형미술연구소(1966)를 설립하고 전통 와전 연구에 평생을 바친 홍익대학교 공예과 출신의 장인 김영림이 제공한 것이다. 공간사옥의 실무를 맡았던 김원석은 흙에서 나온 벽돌이야말로 자연과 조화를 이룰 뿐 아니라 휴먼스케일에 어울리는 친근감 있는 소재이고, 독특한 질감의 벽돌 벽이 들쭉날쭉하게 배치되어 건물의 해프닝 요소를 극대화했다고 평가했다.▼4 흔히 공간사옥은 건축가들의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을 ‘형태’적인 것에서 ‘공간’적인 것으로 바꿔놓은 결정적인 계기로서 논의된다. 그러나 공간사옥이 ‘재료’적 측면에서 전통론에 기여한 점, 그리고 그 논의가「SPACE」가 지속적으로 제공한 예술가들의 교류와 협업의 장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SPACE」 93호 대담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글 조현정 카이스트 교수 / 진행 방유경 기자)

 

다음 호에는 김현섭이 「SPACE」 59호(1971년 10월호) ‘건축전 2제’를 다룬다.

 

1. 권보드래·천정환, 『1960년을 묻는다: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천년의상상, 2012, 289~290쪽.

2. 조인수, ‘오윤, 민중미술을 이루어내다’, 『오윤: 세상 사람, 동네 사람』, 현실문화, 2010, 35쪽.

3. 김효신, ‘불국사와 현충사’, 「조선일보」, 1973년 10월 21일; 허술, ‘기유모즈 씨의 “불국사와 현충사”를 읽고 ‐ 전의 전승과 용도’, 「조선일보」, 1973년 11월 3일.

4. 김원석, ‘벽돌문화의 사상과 창조’, 「건축」 41.8(1997. 8.), 4쪽.

 

 

 

한국상업은행 동대문 지점의 현재 모습​ 


▲ SPACE, 스페이스, 공간


조현정
조현정은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일본 건축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축과 미술의 접점, 한국과 일본 건축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일본 현대건축의 흐름을 정리한 『전후 일본 건축』을 썼고, 공저로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김중업 다이얼로그』,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 『아키토피아의 실험』, 『시대의 눈』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1900년 이후의 미술사』(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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