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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 SPACE] 한국성이라는 그 추상적 원죄: 박대인의 집, 알파오메가 건축연구소

서재원
진행
김정은 편집장

 

「SPACE」 58호(1971년 9월호)의 표

 

 

“그러나 이런 모든 한국의 아름다움은 아마도 한국의 초가지붕의 아름다움에서 집약될 것 같다. 거의 매년같이 손질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 초가지붕은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초가지붕을 벗긴 후에 보아야 그 아름다움이 어떠한가를 더 실감할 수가 있다. 슬레이트만 올린 집은 마치 살이 없이 백골만 남은 사람 같다. 그러나 초가지붕은 어딘지 여유가 있어 보이고 풍부하고 살쪄 보인다. 이는 자연과 아주 가까워진 탓일까? 아마도 자연과 가장 가까이 사는 인간의 지혜를 보기 때문이리라. 불편하기에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기 전에 먼저 사라져 가는 초가지붕을 생각하면 아름다움을 멀리하게 된다는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1 

 

박대인, 초가집

건축주 박대인(1932년생)의 본명은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로 1953년 6.25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으로 건너온 미국인 선교사이다. 지프차를 타고 지방을 다니던 중 추풍령 산등성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던 덥수룩한 초가지붕과 그 너머로 솟아오르던 연기, 그리고 나지막이 깔린 희끄무레한 저녁 안개가 빚어낸 동양화 같던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피난민과 폐허가 뒤엉켜 있던 도심의 삭막한 모습과는 극히 대조적인 평화로운 풍경이 연민을 자극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는 붉게 익은 홍시를 좋아하고 만둣국을 즐겨 먹으며 유창한 한국말로 한국문학을 번역하여 외국에 소개하던, 누구보다도 한국을 잘 이해하고 한국인을 사랑했던 이방인이다. 그런 그가 본인이 기거할 집을 구상할 때 초가집을 모티브로 한 것은 언뜻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한 인간이 살아온 문화와 환경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미국인으로서의 오랜 생활을 뒤로하고 초가집을 짓겠다는 것은 단순히 집을 짓는 것을 넘어 일종의 선언으로 보이는데, 그런 와중에 한국성에 천착하던 건축가 김석재를 찾은 것은 어쩌면 운명 같은 인연이다. 

 

김석재, 한국성

건축가 김석재(1937년생)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학교까지 찾아온 건축가 김중업에게 “앞으로 나와 건축을 평생 같이하자”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빼어난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시작해 1960년부터 1967년 동안 김중업 수하에서 실무를 배웠고, 군복무 기간을 제하면 실질적으로 일한 기간은 5년 남짓이다.▼2 그런데 정작 그는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 김중업에게 “구체적이고 기하학적이며, 논리적인 건축을 배우지 않았고 또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정작 그가 배운 것은 바로 김중업의 인간애와 건축에 대한 태도였다는 것이다. 건축가 김석재는 「건축문화」 143호(1993년 4월호)에 실린 글에서 “훌륭한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솔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던 평소 김중업 선생의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특히 ‘한국적인 정신’을 모티브로 삼아 서양 문물 속에서 교육받은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우리 것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모습에 숙연해져 스스로를 돌아봤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 후 건축가 김석재에게 휴머니티와 한국성은 그의 독실한 신앙심과 맞물려 일종의 종교적, 건축적 소명의식으로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한국성에 천착하며 작업을 이어갔는데 그 기간은 1983년 코리아건설사옥▼3 준공 때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런 시기 안에서 김석재가 김중업 사무실에서 독립해 얼마 되지 않은 1970년경 설계한 박대인의 집은 매우 야심 차게 한국성을 실험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대인의 집’, 「SPACE」 58호, 30쪽.


 

‘박대인의 집’, 「SPACE」 58호, 31쪽.

 

박대인의 집

「SPACE(공간)」 58호(1971년 9월호)의 주택3제를 통해 건축가 안영배(1932년생), 원정수(1934년생)의 작업과 같이 소개된 박대인의 집은 여타 다른 주택들과 약간은 다른 내용으로 지면이 구성되었다. 준공작일 경우 대개는 준공 사진 위주로 지면이 채워지나 박대인 집의 경우는 준공 사진은 물론 입면도를 대신하는 네 방향 모형 사진, 레퍼런스 이미지, 스케치, 좌담 등 다양한 형식이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중 필자의 눈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지붕이 잘 드러나게 찍은 모형 사진과 시골의 초가집 풍경, 장독 등의 이미지였는데 건물의 외관은 논쟁의 여지 없이 한국성을 모티브로 한 것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초가집의 이미지들이 없었다면 이 집이 초가집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채기는 쉽지 않고 오히려 사대부 한옥의 현대식 주택으로 오인되기 쉽다. 이는 결정적으로 초가집이 가지는 소박함의 정서가 결여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평면 스케치와 배치도 형식의 모형 사진을 통해 유추해볼 때 지붕의 크기는 적어도 15 × 15m의 상당한 크기로 추정된다. 북측에 위치한 창고와 차고 등을 별동으로 배치하여 지붕 크기를 줄이거나 분절할 만도 한데 지붕 하나로 모든 실내 공간을 덮고 필요에 따라 볼륨은 지붕에 넘쳐나기도 모자라기도 하는 형국이다. 아마도 이는 남측에 정방형의 정원 확보와 내부 동선의 편리함을 우선시한 결과로 추정된다. 그로 인해 지붕은 전형적인 초가집과는 반대로 아래 볼륨들을 포근히 품지 못하고 오히려 불룩한 가마솥 위에 올려진 솥뚜껑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임지붕 가운데 불쑥 올라온 사각의 덩어리가 마치 손잡이처럼 보이기에 더욱 그러한 인상을 더하는데 이는 굴뚝으로 추정되나 집주인의 고국과 당시 유행을 고려하면 벽난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내부 공간 조직은 상당히 기능적인 편이다. 마당을 항해 소위 ‘포베이(4-bay)’를 취한 평면에 남향으로 거실과 마스터 베드룸, 작은방, 서재를 위치시키고 북쪽으로는 서비스 영역인 주방과 세탁 공간을 위치시켜 폐쇄된 복도로 연결한 중복도 형식이다. 거실 북측에 길게 세워진 벽체만 없애면 영락없는 아파트 평면이다. 하지만 굴뚝을 그 자리에 설치해야만 했기 때문일까? 가로로 지나는 벽체로 인해 거실과 주방이 완전히 분리되면서 공간은 위계가 명확해지긴 하지만 환기에는 매우 불리한 평면이 된다. 뿐만 아니라 식사 공간은 창고로 가로막힌 필로티에 면함으로써 전망은커녕 한낮에도 어두침침한 공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전통적으로 선조들의 집이 통풍을 매우 중시하여 가능한 한 겹공간을 만들지 않고 방 주변으로 툇마루를 형성해 외부 공간을 둔 것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접근이다. 아마도 지붕 조형의 완결과 명분을 우선시하다 보니 생긴 결과가 아닐지 추정해볼 뿐이지만 그가 좌담에서 밝힌 바와 같이 “건축의 외형에서뿐 아니라 평면구조 자체에서 한국의 전형적 주택의 좋은 점을 살리려 했다”고 한 부분은 여전히 의구심을 남긴다. 집의 외형은 전통건축의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차용하고 있는데 서재와 거실에 설치된 들어열개창은 지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초가집 이미지의 정서와는 괴리가 있어 보이고, 벽돌벽의 배흘림은 집의 크기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처마끝에 매달린 빗물받이의 강직한 조형도 민가의 소박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전체적으로 박대인의 집은 전통의 모티브들이 텍스트적으로 나열된 일종의 페스티시(pastiche)인데 정작 건축가는 이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 주택이 포스트모던적 패러디를 넘지 못한 채 키치적 모더니즘에 그쳤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1960년대 종합박물관 설계공모안부터 1980년대 독립기념관까지 국가 발전 시기에 정치적으로 필요했던 한국성은 노골적으로 형태의 차용이나 재료의 사용이 요구되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국가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개인 주택에서의 한국성의 탐구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건축가의 솔직한 태도를 엿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측면에서 의미 있을 것이다.▼4 아직 판단하긴 이르지만 이 주택의 사례로 봤을 때 국가 차원의 시설이나 개인의 주택이나 한국성에 대한 접근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설계공모 지침서에 직접적인 차용에 대한 강요가 없었다 하더라도 결과는 비슷하게 나타났을 수도 있을 것이리라 조심스레 추측되는 부분이다. 

 

 

 

  

‘박대인의 집’, 「SPACE」 58호, 32~34, 36쪽.

 

 

한국성, 난제

무엇보다도 건축주 박대인이 이 집에 대해 만족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지면 말미에 실린 좌담을 통해 미루어보면 아쉬운 부분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좌담에 참석한 건축가 김석재(당시 35세)는 물론 철학박사 박대인(당시 40세), 신학박사 윤성범(당시 56세), 화가 윤명로(당시 36세) 네 사람은 한국성을 ‘정신적 차원’의 문제로 보는 데 뜻을 모은다. 겉모양을 차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김석재가 먼저 나서서 비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건축주 박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초가집 모양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자 김석재는 “진실한 한국인이라면 그가 창조해내는 것은 한국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짙다는 전제는 말할 수 있다”고 응수함으로써 둘 사이의 미묘한 대립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박대인은 계속해서 문창살 무늬나 지붕 라인 같은 장식적인 것은 단순한 수단일 뿐 그 이면의 정신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박대인이 말하는 정신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이는 그가 쓴 에세이에 잘 드러난다. 그가 한국에서 인상 깊게 본 것은 ‘꾸밈없음과 여유’ 즉 자연스러움과 정겨움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을 초가집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는 박대인보다 앞서 이방인으로 한국의 미를 탐닉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과 일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막사발에서 ‘무심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박대인은 초가집에서 ‘어수룩한 여유’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초가집의 정신 같은 초-추상적인 개념이 한국 건축으로 번안될 수 있는가의 오래된 문제에 직면한다. 그간 한국성의 탐구는 눈에 보이는 실에서 점차 보이지 않는 허로 방향을 틀어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오랜 문제를 풀지 못해서 오는 피로감이 점차 쌓이고 있는 것은 암묵적인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성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한국성은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다. 

 

 

엑소노메트릭 스케치 ©Suh Jaewon
공간구조 & 굴뚝벽이 없는 경우의 예상 평면도​ ©Suh Jaewon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택을 설계할 당시 김석재는 30대 초중반의 젊은 나이였다. 좌담에서 말했듯이 시대적, 국가적 소명의식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이 주택에는 초가집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움과 여유, 요즘 말로 하면 ‘쿨’한 면이 없이 너무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시대의 건축가들과 얼마나 다른 길을 걷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그리고 여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당시 외국에서 공부한 많은 건축가들이 현실을 부정하고 계몽하려 했다면 김석재의 작업은 현실을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밥풀때기에 고춧가루 잔뜩 묻은 밥사발은 외면한 채 먼지 하나 안 묻은 박물관의 막사발을 상정하는 한 한국성은 획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 집이 초가집을 표방하지 않았다면 한국성을 획득한 것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글 서재원 에이오에이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 / 진행 김정은 편집장)

 

다음 호에는 조현정이 「SPACE」 62호(1972년 3월호)에 게재된 ‘한국의 초가’를 다룬다.​ 

 

1. 박대인, 『한국의 가을』, 범우사, 1976, 71쪽.

2. 김석재, 『건축가 김석재 신앙수기』, 동연출판사, 2020, 17~22쪽.

3. ‘코리아건설사옥’, 「건축문화」 41호(1984년 10월호), 32~35쪽. 김석재 본인이 대표로 있던 코리아건설의 본사 사옥은 건축가의 한국성이 전통의 시각적 표현에 방점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4. 박정현,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의 한국 현대 건축』, 서울: 워크룸프레스, 2020. 종합박물관 설계공모에 관해서는 61~69쪽을 참고할 것. 독립기념관과 한국성에 대해서는 187~215쪽을 참고할 것.​ 


▲ SPACE, 스페이스, 공간


서재원
서재원은 단국대학교와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을 졸업하였고 현재 에이오에이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의 대표이다. 현대사회의 다면적 상황을 ‘비판적 수용’의 관점 아래 애증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부조화와 조화, 합리성과 비합리성, 풍자와 농담 등의 모순적 병치를 통해 한국 사회의 ‘동시대성’을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2017년에 젊은건축가상을 수상하며 올해의 주목할 만한 건축가로 선정되었고, 현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와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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