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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어느 지역, 어떤 제조, 무슨 산업: 을지로 인현동 일대 인쇄골목의 뼈와 살 그리고 오래됨

김준태(서울시립대 세운캠퍼스 매니저)
사진
김준태
자료제공
서울시립대 세운캠퍼스
진행
오주연

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세운청계상가 811호 디지털트윈 세운프로젝트룸에서 세운기술거버넌스 세 번째 집담회가 열렸다. 집담회는 ‘어느 지역, 어떤 제조, 무슨 산업’을 주제로 도심제조업과 세운상가 일대의 산업생태계에 대한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이다.

이번 8월의 세 번째 집담회에서는 이후빈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이 2015년 5월부터 11월까지 수행한 인현동 인쇄골목에 대한 연구를 공유했다. 이후빈 책임연구원은 ‘뼈와 살 그리고 오래됨’ 세 가지 단어로 인현동 인쇄골목 산업생태계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펼쳐놓았다.

 

 

 

을지로 인현동 일대 인쇄골목의 뼈: 순차적인 거래 관계로 지역 공장으로 기능하는 분업 체계

인현동 인쇄골목이 시작되었을 1950년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당시에 한 명의 자영업자가 모든 인쇄장비를 구매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명의 자영업자는 하나의 기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인현동에 위치한 주택에서 일을 시작했기에 작업장의 규모도 크지 않았다. 그렇게 기획, 디자인, 제판, 인쇄, 후가공 업체가 각각 하나의 역할과 기계를 나누어 가졌다. 여러 개의 가게는 주문에 따라 협력업체를 바꾸며 팀을 꾸리고 하나의 공장처럼 일했다. 여기서 파주와의 차별성이 생겨났다.

파주는 기획부터 후가공까지 모든 인쇄공정을 큰 공장 하나에서 처리하는 인쇄단지이다. 그래서 파주는 큰 주문을 저렴하게 수행할 수 있었으나 서울 도심과 거리가 멀었다. 반면 인현동은 서울 도심 중심에서 작은 인쇄 주문을 처리할 수 있었으나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았다. 파주와 인현동은 장단점을 주고받았지만, 인현동이 앞서는 것이 하나 있다. 후가공이다.

후가공은 코팅, 금∙은박, 저지, 넘버링, 엠보싱 등 종류가 다양하나 수요는 일정하지 않다. 파주의 큰 공장도 다양한 후가공 장비를 모두 구비할 수는 없다. 모든 후가공 장비가 항상 쓰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인현동은 소수의 후가공 업체가 각각 하나의 장비를 갖추고 다양한 수요에 대응할 수 있다.

주문에 따라 인쇄공정 속 구성원이 계속 변한다. 이들은 어떻게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까? 인쇄업자들은 일을 먼저하고 대금은 나중에 받는다. 대금을 주고받는 시기도 대금을 주고받는 사람도 방향도 계속 변화한다. 먼저 일하고 나중에 받는 시스템을 지탱하는 ‘살’은 과연 무엇인가?

 

을지로 인현동 일대 인쇄골목의 살: 개인의 노력, 사회적 관계망 그리고 장소의 역사

인현동 인쇄골목의 뼈를 이어주는 살은 개인의 노력과 장소의 역사로 형성된 사회적 관계망이다. 인현동 인쇄업자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오간다. 일감을 주고받으러 돌아다니고 간단하게 안부를 주고받기 위해, 혹은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가게를 맡아 주기 위해 서로서로 방문하며 시간을 보낸다. 계속 얼굴을 비추며 상대방이 자신을 인지하게 만든다. 그리고 개인의 노력에 사회적 관계망이 더해진다. 업종, 고향, 지역에 따라 형성된 공식 단체와 친목 모임이 얽혀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한다. 관계를 형성한 사람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기억한다면, 나중에 일감이 들어왔을 때 연락이 오고 함께 일할 수 있다.

이 관계망 속에서 암묵적인 룰이 생기고 그 룰에 따라 평판이 생겨난다. 인현동 인쇄업자들은 평판에 따라 서로에 대한 신뢰를 관리한다. ‘로스나 미수금을 한두 번은 낼 수 있으나 그 이상은 안 된다, 사수에게서 독립할 때 근처에는 가게를 내면 안 된다, 동종업계끼리는 서로의 기계에 관해 묻지 않는다.’ 이러한 암묵적인 룰을 어길수록 평판이 깎이고 거래 관계에서 멀어진다.

 

을지로 인현동 일대 인쇄골목의 오래됨: 한 곳에서 오래되었다는 것의 장점과 단점

뼈와 살에 이어 나타나는 인현동의 특이점은 바로 오래됨이다. 오래됨은 그 자체로 인현동의 강점이 되기도 하고 극복해야 할 어려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러 가게가 오래 일하며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시차가 생겼다. 누군가는 새로운 기계를 빨리 도입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리스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아 예전 기계를 계속 쓴다. 혹은 리스료를 모두 지불한 후에도 더 수익을 내기 위해 오래된 기계를 가게 한 편에 남겨두기도 한다. 이 시차 속에서 100년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 오리지널 평압 인쇄기부터 국전 5색 인쇄기까지 할 수 있는 기능이 서로 다른 기계가 인현동 골목 사이사이에서 주문을 기다리고 있다.

인현동의 오래됨은 기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도 함께 포용했다. 대표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인현동에서 후가공을 처리해온 전문인력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현동만의 장점이다. 지방 인쇄업자들도 후가공이 필요해 찾아올 만큼 인현동이 가진 서비스의 다양성은 다른 지역에선 찾아보기 힘든 강점이다. 인현동 인쇄골목에서만 가능한 공정이 만들어낸 관성은 앞으로도 쉽게 깨지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오래됨은 물리적 쇠퇴를 낳고 물리적 쇠퇴는 경제활동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재개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며 시설투자가 지연되는 것도 물리적 쇠퇴를 가중하는 요인이다. 천장이 내려앉는 건물에서 새로운 대형 인쇄기를 들여놓기는 어려운 일이다. 낡은 화장실과 같은 낙후된 위생환경은 새로운 인력이 인현동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 결국, 물리적 환경 개선의 지연은 업계 발전의 지연으로 이어진다.

 

 

황지은(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인쇄골목 연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이후빈(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울역사박물관 생활문화 자료조사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학생들과 함께 업종조사를 했는데, 가가호호 방문하면 너무 비효율적이니까 학생들에게 우선 간판을 모두 적어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을 보고 업종분류를 해서 엑셀 파일로 만들었다.

업종조사하는 팀은 학부생들로 12명에서 14명 정도가 함께 일했다. 인터뷰는 나를 포함해서, 석사과정 혹은 훈련이 된 사람들 모두 합쳐 5명이 함께 진행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횟수보다는 깊이 있게 들어가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전지식이 준비된 상태에서 방문하여 질문하고 답을 얻은 뒤 재방문해서 다시 질문하는 방법을 썼다. 인터뷰를 녹취해서 검토하고,  앞뒤가 맞지 않거나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은 재방문해서 알아 오는 식으로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 깊게 들어갔다.

 

최대혁(OO은대학연구소 5소장): 네트워킹의 속살을 본 것 같다. 개인적인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관계를 맺는 모습이 비장하다는 생각도 든다. 네트워크가 없으면 진입할 수 없는 건가? 그렇다면 비슷한 외국의 사례들은 어떤지, 외국에서도 이렇게 복잡한 시간을 들여서 네트워크를 맺으며 협업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후빈​: 이러한 모형으로 유명한 해외의 사례는 제3이탈리아 산업지구가 있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망에 대해 현장에서는 “이렇게 못하면 못 살아남는다”고 한다. 결국 평판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앞서 설명해 드린 이 지역의 암묵적인 룰이 있다. 돈을 떼어먹었거나, 미수금이 많거나, 이걸 한두 번은 어길 수 있지만 누적되면 지역 사회에서 안 좋은 평판이 퍼진다.

진입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렇다. 기술 좀 있다고, 돈 좀 있다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물건을 만들 수가 없다. 보통 하나의 작업밖에 못 하므로 일을 주고받지 않으면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파주처럼 대형화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1층에는 무거운 인쇄 기계를 넣고, 그 위에는 제본 기계, 3층은 기획실로 쓰는 대형 가게도 있기는 하지만 극히 소수의 예외이다.

또 하나는 기계의 리스료에 대한 부분이다. 기계를 현금을 주고 한 번에 산 것이 아니고 한 달에 일정 리스료를 낸다. 리스료가 200만 원이고 기계를 한번 돌릴 때마다 10만 원을 받는 가게라면, 20번을 돌려야 리스료 200만 원을 벌 수 있다. 30번을 돌려서 300만 원을 벌면 인건비를 겨우 충당하는 정도이고, 전기세 등을 고려하면 40번은 돌려야 비용을 겨우 감당할 수 있다. 이 기계를 40번 이상 돌리려면 당연히 일감을 많이 받아와야 한다. 그래서 싫더라도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미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최대혁: 그렇다면 온라인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케팅이나 인쇄업계에 생기는 변화가 기존 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까?

 

이후빈​: 공장은 파주에 두고 인현동에는 영업조직만을 남겨두는 형태가 있기는 하다. 큰 기계는 어차피 파주에 있으니 인현동에는 간단한 기계 몇 개만 구비해서 영업한다. 인현동이 인쇄업계에선 상징적인 공간이기에 몰리는 수요를 노린 형태다. 이러한 형태에 대한 현장 작업자들의 의견은 서로 달랐다. 기존 업체의 일감이 줄어들 거라고 걱정하는 경우도 없진 않았지만, 어차피 하는 일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다른 영업 형태가 생기더라도 본인들에게 타격이 되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인현동에서 해야 할 일은 가격이 좀 비싸도 소량, 샘플, 신속하게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 또한  파주에서 하는 일과 인현동에서 하는 일은 구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파주와 구분되는 인현동의 일이 바로 전체 인쇄업계에서 인현동이 차지하고 있는 고유한 역할이니까.

 

청중 1: 사회적 관계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선 친목 관계의 성향에 관한 질문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동종 업계의 친목 단체가 주가 되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친목 단체가 주가 되는지 궁금하다. 다음으로, 이제 인현동 인쇄골목에서도 같은 업종 간에는 경쟁이 분명할 때도 있는데 어떤 식으로 클러스터가 유지되는지 궁금하다.

 

이후빈: 동종이라고 부르는 곳은 그 업종을 하는 가게만 모이는 단체이다. 조사를 시작할 때 인쇄협회 같은 곳에 먼저 접촉했다. 여기서 다이어리를 한 권 받았는데, 그 다이어리를 보면 업체들의 명단이 다 올라와 있다. 그 명단에 무슨 일을 하는지 대강의 유형을 분류해 둔다. 그리고 전화번호, 주소, 상호, 사장 얼굴도 꼭 집어넣는다. 지나가다 만나면 알아보고 함께 일해야 하니까. 

친목 모임은 동향 출신끼리 모이는 예도 있고, 지역 사람끼리 모이는 예도 있다. 친목 모임이 꼭 경제적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동종 모임과 친목 모임은 좀 다르다고 느낀 것이 동종 모임에는 약간의 경쟁심리가 있다. 예를 들어 “너희 기계가 뭐냐?”라는 질문은 절대 금지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사수 관계이다. 가게에서 일하다 독립할 때의 불문율은 길 건너서 좀 먼 쪽에 가게를 차려야 한다는 거다. 이런 불문율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을 무조건 협력하는 공간으로 보기는 좀 어렵다. 경쟁 심리 또한 작용하고 있다. 다만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협력의 정도가 확실히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질문은 이 지역과는 좀 상관이 없는 문제이긴 하다. 클러스터에서는 암묵지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평판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평판이 구체적이고 그 분야에 도움이 되려면 기본 기술에 대한 공유는 있어야 한다. 인쇄하는 사람은 같은 인쇄업계 사람에 대해 기계에 대한 정보만 있어도 평가가 가능하다. 몇 마디 안 나누어 봐도 “로스율이 몇 프로더라” 이야기할 수 있다. 반면 도무송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도무송 하는 사람에 대해 광범위하게 이야기하게 된다. “돈 떼어먹은 적이 있다더라” 이런 식이다. 이런 평판의 위력은 동종업계에서 더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황지은: 인쇄업은 기계가 빠르게 돌아간다. 디지털 인쇄로의 변화도 그렇고, 커피 컵에 인쇄하는 등 새로운 트렌드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변화에 대한 대응이 잘 보이는지 궁금하다.

 

이후빈: 그런 면에선 발 빠르게 접근하는 것은 방산시장이다. 인쇄를 크게 둘로 나눈다. 종이에 찍는 건 일반인쇄, 종이 이외에 찍는 건 특수인쇄다. 특수인쇄는 포장자재, 박스, 에폭시 등에 인쇄하고 스티커도 만들고 라벨도 만든다. 확실히 상대적인 호황이 있다. 인현동 인쇄골목은 종이인쇄, 일반인쇄의 영향이 강하고, 방산시장은 포장, 박스 쪽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특수인쇄 호황에 조금 더 발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쇄 작업자들은 특수인쇄를 무시한다. 인현동에서는 그건 인쇄가 아니라고 한다. 이런 것을 봐도 새로운 인쇄업에 적응하는 흐름은 방산 쪽이 더 컸던 것 같다.

 

최대혁: 공존이 남다른 것으로 설명해주셨다. 그렇다면 제일 첫 단계에서 고객과 기획사는 어떻게 만날까?

 

이후빈: 보통은 기획실이 전화번호를 공개하기도 하고 발 빠른 업체들은 홈페이지를 굉장히 잘 만든다. 그 외에도 여러 경로로 일을 함께하게 된다. 전화를 주고받거나 사무실에서 만나서 일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림을 보여주고 어떻게 작업이 진행될지 대화를 나누고 계약서를 작성한다. 때로는 인쇄실에서 기획실 기능까지 함께하면서 고객을 받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인쇄를 급하게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은 인쇄업계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학교나 연구소 등 급하게 샘플을 만들거나 소량의 인쇄를 해야 하는 조직이 그렇다.

여담이지만, 인현동 인쇄골목을 조사한 이후 서울역사박물관의 요청으로 대중강연이나 발표를 했다. 평일 낮에 진행했기에 누가 들으러 올까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 특히 40대에서 50대가 많이 왔다. 아주 소소하지만 이 지역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는데, 산업 현장 체험활동으로 이곳을 보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 기획, 디자인, 제판 과정 등을 돌아다니며 각 업체의 설명을 듣고, 인현동만의 특수성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이 지역을 알리는 것이다.

 

최대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생산라인, 그 ‘살’이란 것이 굉장히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대안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업체들이 생산자 조합이나 다른 발전적인 조직 형태를 구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후빈: 예전에는 인쇄조합이 일을 따오는 통로였다. 특히 관공서 일이 조합에 떨어졌다. 조합에 떨어지면 조합이 관공서 일을 분배해준다. 물론 거기서도 임원들만 한다거나 그런 불만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관공서에서 일을 받으려면 일정 시설을 갖추고 증명을 받아야 하는 제도가 있다. 그 제도에 있어선 조합이 아직도 역할을 하고 있다. 웬만한 업체가 혼자서 그것을 만족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에 조합 이름으로 이런 시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일을 따내는 것이다. 관공서 일은 마진이 작고 늦게 받아도 떼일 염려는 없어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조합이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론 조합의 역할이 예전만큼은 아니다. 

 

최대혁: 새로운 협업방식의 모델은 어떨까?

 

이후빈: 협동조합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일전에 다른 일로 활동가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해주신 말이 인상적이었다. 협동조합 이야기를 다들 하기는 하지만, 정부 돈을 받아서 또는 펀딩을 받아서 협동조합을 만드는 건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협동조합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하고, 조합을 구성하는 등 지루한 과정을 거치기보단, 일단 내가 돈을 넣어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게 더 빠르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해도 월급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체험하게 한 다음, 이 사람들을 데리고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냐고 하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지식으로 전파하는 게 아니라 협동조합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 각자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일하면서도 다들 자신의 월급은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신뢰로 체험하게 하면 크게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조직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좋은 사례를 누가 어떻게 만드냐는 것이다. 케이스는 좀 다르지만, 협동조합에 대한 답이 될 것 같다. 

 

청중 2: 기계나 네트워킹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개인이 가진 기술력 자체가 우수성을 인정받을 때가 있을까?

 

이후빈: 기장의 능력은 오류가 날 상황을 일찍 판단해서 기계를 일찍 멈추는 것이다. 파지를 덜 만드는 것, 미스를 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능력이다. 작업자들이 하는 말이 기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대략 정해진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로스에 대한 부분이나, 미세한 품질, 미세조정 등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초반 세팅 시간이다. 인쇄기계는 세팅하고 시동을 걸면, 만 장을 찍으면 만 장을 찍을 때까지 계속 돌아간다. 이게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순식간에 몇백 장이 쏟아져 나오는 거다. 그래도 현장에서는 기계가 우선이라고 말한다. 

 

청중 2: 어느 정도 기계를 다룰 줄 아는가에 대한 부분은 어떠한가?

 

이후빈: 기계상의 역할이 단순히 기계만 공급해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기계가 나온다고 생각해보자. 비슷한 기계라고 해도 기장이 새 기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기계를 파는 기계상이 초반 며칠 동안 붙어서 알려준다. 의료기기 판매와 비슷하다. 새로운 의료기기가 나오면 의사보다 판매하는 사람이 더 잘 아는 것처럼, 그렇게 기계상과의 만남이 단발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된다.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보고, 인쇄 재료 같은 것도 공급해준다. 또한 기계를 현금 구매하는 게 아니라 리스를 하니까 그 업체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청중 3: 후가공이 인현동의 경쟁력 중에 하나라고 이야기했는데, 후가공은 보통 중년 여성들이 많이 한다. 젊은 인력들이 후가공에 투입될 수 있을까?

 

이후빈​: 그렇지 않다. 여기도 언젠가는 끊길 수 있다. 한 장에 10원, 20원, 후가공이 크게 돈이 되는 게 아니다. 후가공은 전업이 아닌 작업자들이 많고 일하는 속도가 엄청나다. 그분들은 시간이 돈이다. 그래서 인터뷰를 청해도 잘 안 받아주신다. 

재미있는 것이 광장시장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광장시장 2층을 보면 주단 집이라고 한복 파는 곳이 있고 3층에는 의상실이 있다. 맞춤 한복을 만들 때 2층에서 계약을 하면, 그 주인이 의상실로 가서 저고리,  치마 등을 따로 주문한다. 이 주문을 처리하는 아주머니들이 일하는 것은 후가공과 유사하다. 다른 것은 재택근무다. 일을 받아서 집에서 바느질을 하고 납품을 한다. 하지만 인쇄업은 그 엄청난 종이를 이동시킬 수가 없다. 인쇄업은 반드시 여기 와서 일해야 한다. 똑같이 손으로 하고 품삯을 받는 작업이지만 그런 면에서 차이가 있다.

 

청중 2: 그럼 진입장벽이 높을 것 같다.

 

이후빈: 엄청 높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익 분배의 모습이 다양하다. 이익 분배에서 가져가는 몫은 거기서 가진 권력에 의해서 좌우된다. 그런데 후가공, 수작업 집들이 권력 관계에서 제일 끝에 있다. 

원래 수작업 집을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이 근처에는 주택가가 없는데 과연 작업자들은 어디서 오는지, 여기 어떻게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 이 일을 전업으로 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5번 시도해서 다 잘렸다. 

 

최대혁: 재정비 촉진지구가 그대로 유지되어도 정책이나 제도의 변화가 없다면 10년 후에 여기가 어떻게 변할까?

 

이후빈: 보고서의 마지막에도 썼는데, 여기가 무조건 쇠퇴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나름의 경쟁력이 있다. 그런데 이 경쟁력이 현상 유지하는 것도 벅차지 않을까, 발전하는 건 조금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에 더해 여기에 정책을 통해 자금을 투입한다고 했을 때, 이 지역이 전국에 있는 인쇄업 체계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는 게 효율적일지 의문이다.

 

청중 4: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2017년에 인쇄 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이 되었다. 항목들을 보면 지원센터가 크게 들어서는 게 있고, 운반을 위한 도로 포장을 해주거나, 걷고 싶은 거리 사업, 간판 개선사업 등이 있다. 그런 것들이 효율적으로 작동을 할 것인가 궁금하다. 정말 그렇게 했을 때 지역이 좋아질 것인가? 만약 정부에서 딱 하나만 해준다면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이후빈: 두 가지 질문에 동시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딱 하나 중요한 것은 건물을 고쳐주는 것이다. 이런 지구에서 대개 집주인은 재개발을 노리고 있다. 지금 이 지역 자체의 모습보다는 나중에 재개발되었을 때의 시세차익을 노리기 때문에  자본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지역에서 임차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계속 구조적 안전 문제 등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이 지역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 정부도 있다. 도로나 공원 등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결국 개인의 주택에 공적 자원이 들어가는 일이 생길 것이다. 그때 주택 소유주들의 우발 이익을 우리가 사회적으로 감내할 수 있을지, 사회 전체적 효용이 더 크니 눈감아주자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이후 몇 년간 임대료를 올리지 말라는 제한 조항을 거는데, 지원 조건으로 이런 제한을 만들면 집주인은 동의하지 않는다. 

주택에 공적 자원이 들어가면 논쟁이 커질 수밖에 없다. 민간임대주택 등록제도 비슷한 논리다. 저소득층 거주 민간임대주택에 자금을 투입할 때 국가는 분명 저소득층의 주거환경을 보고 들어가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이윤은 주택소유주가 가져간다. 이를 막기 위해 지원 조건을 까다롭게 하면 결국 사업을 아무도 안 하게 된다. 이게 쉽지 않은 문제이다.

 

황지은: 인현동이 서울에서는 밀집된 곳이지만, 전국의 인쇄산업 측면에서 다른 산업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나 효용성이 과연 있겠냐는 의문이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도심제조업에서 인쇄가 제일 많기도 하다. 수요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생하고 소멸하지 않을 것이나 활성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위치가 필연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무리로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있었던 인쇄업의 집적지를 떠나서 도심제조업이 바뀔 수 있는 여지가 감지된다든지, 미래상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이후빈: 도심제조업이 가지고 있는 경쟁력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까 예로 들은 파주에 공장이 있고 영업부서만 인현동에 두는 업체들이  합판인쇄 시장에 진입하여 독점적 지위를 형성해서 합판을 매일 찍는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파주에서 도심까지 운반 비용이 낮아진다면 수요 접근성에 의한 도심제조업의 경쟁력은 상당히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심제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책적, 가치적 판단이 일부분 들어간 영역이 될 것이다. 경제적 이익에 상관없이 여기를 어떻게든 보존하거나  지원을 통해서 육성한다고 하려면 추가적 가치가 필요할 것 같다. 아까 이야기한 사회적 가치를 입혀서 여기의 공간적 특성을 높이는 게 오히려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여기를 경쟁 측면에서 보면 답이 나오기 어렵다. 오히려 여기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 공간적 특성에 기반해서 경제활동 외에 추가적인 가치를 덧입히고 이 공간에 나름의 역할을 만드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이라  생각한다.

인현동 인쇄골목에 남겨진 고민과 도심 인쇄업의 미래는 여전히 가능성의 공란으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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