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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수오지심지소고

허서구(원도시건축 대표)
사진
진효숙
진행
이성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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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창대하였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흔치 않은 성공적 협업으로 시작하였다. 미술품의 안정적 가치보존, 수복처리, 전시 및 연구 등의 체계적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점이었다. 정부 부처마다 비효율적으로 구입・관리되는 정부 미술품들과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주요 미술품들에 대한 통합 관리 또한 절실하였다. 한때, 국내 최대 담배 생산 공장이었던 청주 연초제조창. 도시의 기억과 역사를 함축하여 도시가 향유하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다는 목표가 세워진다. 미술관과 청주시의 업무협약이 체결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지방 분관으로 기획된다. 

 

집단지성의 힘이 발휘된다.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로 변경) 건립의 기획 아이디어를 낸 전 청주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립 미술관의 지방 확장을 결정한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땅과 건물을 내준 전 청주시장, 건축과 도시가 가야 할 길을 안내한 자문위원들, 심사위원들의 집단지성의 힘이 발휘되었다. 1946년 해방 직후부터 2004년 문을 닫기 전까지 연초제조창으로 기능하던 이 장소는 그 후 10년간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존재의 물음을 수없이 던지고 있었다. 장소가 지닌 잠재력을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보이는 수장고, 보여주는 수장고.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로서의 고유 기능을 도시의 기억과 역사로 버무려내면서 장소와 건축으로 새롭게 축조하려고 하였다. 도시재생의 중심이 되려고 하였다. 단단한 방화벽 속의 미술 창고가 아니라, 들여다보고 들어가 보고 드러내 보이는 수장고, 보이는 수장고, 보여주는 수장고를 계획하려 하였다. 시대마다 고유의 구축정신이 있다. 낯설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다. 단단한 물성과 엄정한 기둥열. 남겨져야 할 당위성이다. 연초제조창 건물 자체를 수장하려고 하였다. 

 

사업은 길을 잃는다. 최초 배정된 사업비 396억 원으로는 제대로 된 사업 추진이 불가능하였다. 늘 그러하듯이 정부 예산은 부족한 것이 ‘정상’으로 간주된다. 사업비 확보를 위해 불필요한 기회비용의 소모가 뒤따른다. 예산 타당성에 대한 재심의를 거쳐 사업비는 627억 원으로 증액된다. 그 사이 사업이 중단되고 2년 6개월의 공백이 생긴다. 사업은 길을 잃는다. 미술관 관장 직은 오랫동안 공석이 된다. 임기를 마친 청주시장은 다른 인물로 선출된다. 자기희생적이던 미술관의 전임 주무관들은 부처 이동이 된다. 설계사무소 내부에서도 프로젝트 수행에 대한 회의적 갈등이 생긴다. 담당자들이 대부분 교체된다.​ 

 

융통성, 발주처의 사전에는 그런 말이 없다. 본인에게 위임된 업무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분이 수요처의 후임 주무관으로 내정된다. 확신에 찬 집념 앞에선 모두가 몸을 낮춘다. 이점쇄선으로 구획된 사업 범위가 업무의 책임 범위다. 인접 건물과 주변 영역의 연계는 업무 영역 밖이다. 기획재정부의 최초 승인 면적을 초과하여 계획된 모든 사항들은 잘못된 결정이고, 전임자들은 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말한다. 설계공모 당시 포함되었던 식당동과 후생동이 계획 범위에서 결국 제외된다. 건축가는 재협의 할 수 있는 후일을 기대하지만 희망대로 되지 못한다. 주변이 철거되고 잘려나간다. 협치를 통한 융통성, 행정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융통성, 발주처의 사전에는 그런 단어는 있을 수 없다. 

 

끝은 참담하였다. “현상설계 당선, 정말 어렵습니다. 당선안의 유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설계안대로의 준공, 더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먼 길을 가게 될 겁니다. 관심과 도움, 간곡한 요청입니다.” 설계공모 당선 시상식에서의 소감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버렸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잘 준비된 설계공모 지침을 따라가면서 뚜벅뚜벅 성실하게 요구 사항에 답하였다.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계획안은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해 보인다. 근대 산업유산으로서의 연초제조창, 국가 문화 인프라 국립현대미술관에 내재된 무한한 잠재력, 보다 감동적으로 구현하지 못한 건축적 아쉬움, 형언하기 어렵다. 부끄럽다.​


각자가 우선하는 원칙이 있다. 주관사인 설계사무소의 역할은 소극적이었다. 협력사와의 소통은 원활하지 못했다. 책임은 서로에게 전가되었다. 현장에 대한 감리사와 시공사의 관심은 설계자의 관심과 다르다. 이들에게는 견적에서 공사비의 누락이 가장 큰 불만이다. 설계 부실의 원인 제공자가 무슨 낯으로 현장에 간섭하느냐, 현장에 대한 설계자의 당연한 관심은 철저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의구심을 동반한 배타적 시선에 의해 배제되었다. 각자가 우선하는 원칙이 있다. 수요처, 발주처, 청주시, 설계사, 시공사, 감리사, 각각의 책임과 역할이 다르고 이해관계와 입장이 다르다. 모두에겐 하고 싶은 말들이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옳은 말이다.


치유의 희망은 있는 것일까? 서로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오해로 변질되고 미술관과 청주시, 현장과 설계자, 유기적으로 긴밀히 돌아가야 할 모든 관계가 끊어져버렸다. 중재와 조율을 통해 프로젝트의 중심을 잡아 줄 누군가의 희생이 부족했다. 모두가 미룬다면, 희생의 몫은 결국 설계자의 것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을 것이다. 책임 또한 설계자의 몫이다. 현장을 조율하지 못한 건축가들의 잘못이다. 그렇다면 정녕 치유의 희망이 있는 것일까? 참회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가? 개방형 수장고, 보이는 수장고. 프로그램에 내재된 무한한 잠재력. 치유의 수단일 것이다. 사용자의 안목을 믿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이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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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서구
허서구는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암스테르담 베를라헤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하였다.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및 건축사무소 허.가.방(許.家.房) 대표를 역임하였다. 한국건축가협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원도시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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