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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근본적인 물음

김수영
자료제공
숨비건축사사무소
background

직능

나는 건축을 업으로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건축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고 있다. 건축가는 궁극적으로 치수를 다루면서 빛과 공간을 다루는 사람이다. 다소 고루한 생각일지는 모르나 건축가는 치수를 정하고 유지해야 할 이유를 찾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의 건축물이 세워지는 데 필요한 모든 산업적 활동과 요소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요즘처럼 학제 간 교류가 활발한 시점에 과연 건축가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하지만 건축가의 모습이 모든 영역을 다룰 수 있는 만능인이거나 골조 디자이너 정도의 제한적인 모습이라면 모두 불편할 뿐이다. 다른 나라의 건축 환경이나 건축가의 책임과 역할을 부러워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에도 초라한 건축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안타까움이 앞선다. 건축가는 철저하게 짓는 사람이고, 지어진 곳에서 다양한 삶이 자라나길 꿈꾸는 사람이다. 나는 건축가로서의 지속가능성이 업역의 지속적인 확장을 통해 얻어지기보다는, 건축물을 잘 지을 수 있는 직능에서 비롯되었으면 한다. 건축가에 대한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관점에 저항하고, 적확한 기술적 체계를 토대로 건축물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건축을 다루는 사람의 의무라 생각한다.​

 

개념

학생 때부터 가장 자주 듣는 말은 ‘개념이 뭐야?’ 혹은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뭔데?’이다. 나는 이런 물음은 ‘네 꿈이 뭐니?’라는 물음과 같은 모호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무실에서 간간이 설계공모를 하면서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나의 건축물이 계획에서부터 완성될 때까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 분명한 기준이 개념이다. 또한 건축물이 지어지기까지 수많은 순간 수정되고 자라나는 것이 개념이다.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의 단어라는 것이다. 자칫 개념 속에 빠져 너무 경직되거나 상황과의 타협으로 개념이 사라져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개념은 목표라기보다는 전략에 가깝다.​ 

 

맥락

나는 맥락이라는 단어가 건축물을 제한하는 모든 유, 무형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법규, 땅의 형태, 지리적, 문화적, 기술적 상황 등을 케네스 프램튼은 토포스(topos), 타이포스(typos), 텍토닉스(tectonics)로 분류하였다. 이 조건들이 구체적이고 명확할수록 계획의 방향을 정하거나 아이디어를 유추할 때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는 건축물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맥락 가운데에 유독 도시의 맥락에서 건축물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흐름이며 분명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진보라 생각한다. 특히나 아파트와 학교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공공건축물들이 주변 지역과 연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물리적 경계를 허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우려되는 부분은 공유와 소통이라는 추상적인 구호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그에 따른 건축적인 해결 방식이 매우 주관적이고 제한적이어서 좀 더 다양한 가치의 맥락들이 연구되고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적절치 못하거나 과도한 해석들 때문에 건축물 고유의 본질적 기능이 훼손되지는 말아야 한다. 나 역시 맥락에 대해 신중하게 고려하기보다는 건축물 자체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건축가로서 섬세하게 대지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맥락을 찾고, 이해하여 그것을 다시 건축적인 어휘로 번역하는 것에 미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맥락은 건축물이 그 땅에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며, 주변과의 관계를 공시적, 통시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의 건축물을 판단할 때 건축물 자체의 성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건축물이 위치하는 땅과의 관계에서 긴장을 끌어낼 때 건축물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치가 재생산될 것이다.​ 

 

 

                                          ​​항동유치원 설계공모안

 

 

                                          ​LH 공공주택 수서역세권 신혼희망타운 설계공모안

 

 

 

프로그램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거나 혹은 다양한 존재론적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은 공허하다. 건축물의 공간은 건축주의 의지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갖는다. 건축물의 구축을 이해하고, 매일 다른 느낌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 건축주는 너무나도 고맙고 건축가로서의 뿌듯함을 맛보게 한다. 다행히 현재까지 함께했던 건축주 혹은 발주처가 건축물을 대하는 자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여전히 공간을 생동감으로 채우는 일은 부족해 보인다. 비용의 문제이기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다만 건축물이 물리적인 인식에서 인간의 존재론적인 관점으로 좀 더 확장되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공공건축물은 규모와 비용이 사용성과 별개로 떨어져 있고, 건축물을 만드는 주체와 운영 주체가 달라서 건축물에 대한 관점이 엇박자를 낸다. 이 부분에서 건축물의 생애 주기에 대한 긴 안목과 고려가 필요하다. 근래 들어 공공건축물의 프로그램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에 반해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건축의 구축적인 어휘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사용자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나는 여전히 건축가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보다 프로그램의 이해를 바탕으로 건축 어휘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건축의 과정 중 어떤 순간이 가장 즐거운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일고의 망설임 없이 ‘평면을 구성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평면을 구성한다는 것은 그곳에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한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 상상과 주어진 제한 속에서 하나의 건축적 어휘를 발견하는 순간의 기쁨이 건축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다. 

 

도면

하나의 건축물을 완성한다는 것은 저마다 고유한 치수가 있는 재료와 제품들을 다양한 구법을 통해 연결하는 것이다. 건축가는 건축물에 적용되는 모든 재료의 구법과 원리를 이해하고, 법규, 구조, 기계, 전기, 토목 등의 시스템과 결합하는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도면은 건축주뿐만 아니라 사무실 직원, 협력 업체, 각 시공 공정의 사람들 등 수많은 사람에게 건축물의 세세한 원칙을 제시하고 설득하기 위한 설명서이다. 도면이란 치수가 있는 스케치, 투상도, 평면도, 단면도, 상세도 등의 그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치수가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건축가는 치수를 통해 스케일을 조절하고 공간을 상상하는 사람이다. 치수가 없는 그림은 이미지에 불과하다. 건축물의 모든 부분은 치수가 들어간 도면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또한 도면은 각각의 공정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누구나 디테일에 대한 로망이 있다. 디테일이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디테일을 구축 과정의 연속성에서 이해하고 있다. 즉 각 공정이 만나는 지점이 디테일이라 생각한다. 건축비가 많으면 그 지점을 좀 더 매끄럽게 연결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하면 그냥 놔둘 수도 있다. 마치 무엇인가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와야 디테일이라는 오해는 피하고 싶다. 그래서 각 공정들이 싸우지 말고 잘 만나기만 하면 좋을 것 같다.

건축가마다 건축물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다를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시공사가 도면을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급적 모든 요소를 표현하려고 애쓴다. 수많은 도면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반드시 건축가의 조율이 필요하다. 도면은 현장과의 간극을 최소로 줄이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현장은 건축가의 경험과 유연함을 요구하는 곳이다. 아무튼, 우리는 도면을 많이 그린다.​ 

 

콘크리트

우리는 콘크리트를 좋아한다. 만들어지는 과정이 캐스팅이라는 것 자체로도 만족스럽지만, 건축물의 뼈대가 되는 구조재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마감되기도 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구조적으로뿐만 아니라 형태적으로도 실험해보고 싶은 재료다. 포스트텐션도 사용하고 싶고, 프리캐스트도 해보고 싶다. 콘크리트와 철골을 혼합해서 사용해보고 싶기도 하다. 아직 사용해보지 못한 이유는 비용의 문제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비용을 들이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아무튼, 늘 가까이에서 고민해보고 싶은 재료다. 더불어 철에 대한 애정도 늘 있어 틈만 나면 적용해보려고 애를 쓴다.​ 

 

숨비

숨비는 제주도 말로 해녀들이 깊은 물속에서 숨을 참으면서 물질을 하다 마침내 물 밖으로 올라와 내쉬는 숨소리다. 순전히 어감이 좋아서 선택한 이름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건축가라는 직업이 해녀들의 삶과 비슷한 구석이 있음을 알아가고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물속에 일단 뛰어들어 숨을 참으며 견디다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와 짙은 휘파람 소리를 내는 일을 반복하는 모습은 건축가의 일상과 닮아 있다. 하나의 건축물을 만드는 일에는 장시간의 인내가 필요하고, 그 기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특히 모든 기준이 모호한 우리의 상황에서는 일을 얻는 것이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종종 사무실 식구들과 학생들에게 ‘건축은 믿음이다’라고 말한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없이는 좋은 건축물은 결코 만들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공건축물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축가들을 향하는 어처구니없는 시스템들은 그 끝이 어딘지 알 수가 없다. 건축가의 전문성은 배제되고, 여기저기에서 질러대는 아우성에, 모든 책임을 건축가에게 전가하는 기괴한 현상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고, 좋은 공공건축물에 대한 바람은 요원할 뿐이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오늘날의 건축가들은 늘어가는 사회적 요구들에 반응하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는 분명 바람직하고 사회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정작 건축 내부의 생태계는 날이 갈수록 빈약하고, 시들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시공사들의 기술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협력 업체의 도전은 부재하다. 이들의 빈약함은 건축가의 빈약함을 뜻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외형의 확대만 있고, 내실 있는 체계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건축가 개인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접하면 숙연해지기도 하고, 그곳에서 태어날 건축물이 기대되기도 한다. 하지만 늘 드는 생각은 좀 덜 고군분투했으면 좋겠다.

다시 해녀로 돌아가면 경험 많은 노련한 해녀들은 물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예측이 불가능한 날씨를 오감을 통해 몸으로 판단하고, 물속에 들어갔을 때에도 자신이 참을 수 있는 숨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한다. 자칫 날씨에 대한 예측이 틀리거나 좀 더 많은 수확량에 욕심을 부려 물속에 있다가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건축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늙은 건축가라 부르기도 뭐한 중간 건축가로서 현재 하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나 즐거움보다는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가급적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백방으로 애를 쓰고, 하나의 건축물이 태어나는 모습을 숨을 참으며 바라보며, 스스로를 지독하게 긍정적으로 위로하는 것을 반복할 것이다. 이것이 숨비건축사사무소가 취하는 태도이다.​ 

 

 


김수영
김수영은 1971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와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10년 숨비건축사사무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설계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2014년 제7회 젊은건축가상을 수상하였으며, 2015년에 화인링크로 신진건축사대상 장려상과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영주실내수영장으로 2016년 김수근 건축상 프리뷰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부터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위촉되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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