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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기억, 장소: 버려진 공간을 소환할 때] 과거와의 대화: 도시 기반시설의 문화공간화

자료제공
최춘웅
진행
방유경 기자

​「SPACE(공간)」2023년 1월호 (통권 662호)

 

과거와의 대화: 도시 기반시설의 문화공간화 

대담_ 김광수 스튜디오 케이웍스 대표 × 최춘웅 서울대학교 교수 × 김정은 편집장​

 


마곡문화관 초기 스케치

 

현재에 대한 인식: 보존, 복원, 재생, 리모델링

 

김정은: 이번 대담에서는 최춘웅(서울대학교 교수)의 세 작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노량진 지하배수로(2020~2022), 마곡문화관(2018~2021), 소행성 G(2013). 각각의 작업은 공간 유산 중에서도 기반시설, 건물이 없는 시설을 문화공간으로 바꾼 사례다. 역사학자, 예술가 등 협업의 주체도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다양한 협업의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

 

최춘웅: 세 작업은 배수펌프장, 배수장, 배수로와 같이 물과 관련된 기반시설을 재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노량진 지하배수로는 구청과 소통하며 진행했고, 마곡문화관은 건축역사학자 안창모(경기대학교 교수)와 협업했다. 소행성 G는 큐레이터 김장언(아트선재센터 관장)이 기획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아티스트 김소라의 주도 아래 구조 엔지니어 이주나(서울시립대학교 교수)와 함께 작업을 도왔다. 

 

김정은: 10년 넘게 보존, 복원, 리모델링, 재생 등 다양한 범주의 프로젝트들이 국내에서 꾸준히 진행돼왔다. 최근 프로젝트의 경향이나 이를 대하는 건축가들의 태도나 방식에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지 짚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겠다.

 

김광수: 을지로, 성수동, 연희동 같은 사례를 비롯해 공공의 도시재생 사업에서도 오래된 건물이나 폐허스러운 공간이 대중적으로 상당히 확산됐다고 느낀다. 이런 감각이 특히 카페의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일종의 ‘경험 욕망’이 널리 퍼진 상태인데 이런 현상을 되짚어볼 시점이 된 것 같다. 

 

김정은: 오래된 건물, 폐허 같은 공간에 열광하는 대중의 심리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김광수: 10여 년 전 불었던 제주 열풍이나 지방 도시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하는 모습에서 탈도시 욕망을 보게 된다.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고 아파트 키드인 젊은 세대들이 마치 고향을 경험하는 것 같은 감각으로 제주도의 오래된 마을과 돌담길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시간적으로 먼 역사적 공간이 아닌 근과거의 도시건축 환경에 대한 체험 욕구가 제주 열풍과 함께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소도시의 구시가지에는 어김없이 경리단길 같은 거리가 만들어졌고, 이제는 근과거 건축물의 리모델링이나 폐산업 시설에 대한 ‘체험 공간화’ 현상이 상당히 일반화됐다. 이런 동시대 상황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시간성’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사는 ‘지금’이라는 시점이 과거와의 연속선에서 장소와 함께 맥락성을 갖지 못하다 보니 시간여행을 추구하게 되는 현상으로 본다. 시간과 함께하는 실존감이 희박해지면서 공간을 시간화시키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레트로 열풍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시간의 흔적이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나 공간의 시간성을 부각하는 작업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마곡문화관 초기 스케치​​

 

최춘웅: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기 위해 숨겨진 장소를 발견하는 현상이 유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의 시간과 어떤 연결고리를 찾고자 하는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광수: 서동진(계원예술대학교 교수)이 자주 언급하는 ‘시간의 심미화’, ‘공간의 박물관화’ 같은 현상들이 무시간성이라는 맥락에서 생기는 하나의 현상일 것이다. 과거에는 지방마다 전통 마을에 근거한 테마파크를 하나씩 만들지 않았나. 이러한 테마파크 같은 공간을 만드는 전략이 ‘시간의 공간화’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시간을 공간화하는 작업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게 과거라고 한다면, 지금의 양상은 그것이 일상 공간으로 확산된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회동 같은 동네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분명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인데도 마치 관광객 같은 행태로 다니더라. 인스타그램 문화가 그것을 더 심화시키는 부분도 있는데, 최근의 현상을 보다 크리티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춘웅: 누가 더 폐허 같이 남기느냐 경쟁하듯 작업하던 시기가 지나고, 최근에는 건축가들 사이에서 더 자신 있게 간섭하고 바꿔도 된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김광수: 사이트마다 상황이나 맥락이 너무 다양해서 보존해야 하는 곳, 복원해야 하는 곳, 재생해야 하는 곳이 다를 것이다. 여러 입장과 해법들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으면 좋겠다. 리모델링으로 재생하는 경우에도 정형수술이냐 성형수술이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예전에 리모델링은 다 성형수술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최춘웅: 새것처럼 바꾸다가 그 반대로 지나치게 갔다가 이제야 적당한 균형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개별 건물이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 어떤 장소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는 시기 같다. 부천아트벙커 B39도 그렇고 일상적으로 접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낯설게 느꼈던 거다. 이제는 이런 장소의 발굴이 도시 전체로 볼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일상적 공간의 경험과 낯선 공간의 경험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보존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지 전체 도시 맥락 안에서 따져봐야 한다. 과거에는 생존했다는 사실만으로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이제는 그 이상의 의미가 필요하다.

 

김광수: 보존에는 박물학적인 태도와 연결되어 윤리적 의미도 담겨 있다. 좀 더 진지하게 왜 보존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까지 얘기해볼 수 있는 시점이 아닐까. 다른 한편으로 무시간성과 어떤 존재감을 경험하기 힘든 동시대 상황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일상의 대부분이 가상 공간, 즉 스마트폰과 인터넷 인터페이스를 통해 실제 공간을 초월하는 영역에서 머물다 보니 이러한 상황이 심화되고 있다.

 

마곡문화관 초기 평면 및 입면 스케치

 

 

도시 기반시설과 건축적 개입: 건축가의 자리

 

김정은: 최춘웅이 한 매체에서 “산업시설의 리모델링은 다른 리모델링과는 조금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언급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도시 안에 있지만 버려지거나 숨겨졌던,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공간들이 지닌 특징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최춘웅: 수명을 다한 혹은 사용되지 않는 기반시설은 ‘숨겨져 있던 도시 공간’과 ‘과거의 공간’이라는 중첩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이때 건축가들의 근본적인 고민은 그 공간들이 건축이 없는 공간, 건물이 아닌 공간이라는 점에서 발생한다. 나 역시 설비나 기계가 주인이었던 공간에 건축가가 개입을 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건물이 없을 때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질문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김광수: 노량진 지하배수로도 건물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건축가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최춘웅: 하수암거(지하배수로)는 땅속에 숨겨두기 위한 구조물이다. 물이 흐르던 공간을 사람이 들어가 쓸 수 있게 하는 과정은 점유나 사용성 측면과는 접근이 다른 것 같다. 건축가가 이런 장소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을 제시하거나, 그런 장소가 공간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만 제시해도 건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정은: 하수암거를 문화공간으로 바꾸겠다는 아이디어는 누가 제안한 것인가? 

 

최춘웅: 해당 사업은 원래 서울시 도시공간개선단에서 추진했다. 당초 수산시장 쪽의 녹지를 수용해서 카페나 작은 전시 공간 같은 시민 편의 공간을 지으려다가, 이후 용지 확보가 불가능함을 발견하면서 계획이 무산됐다. 건축가의 역할이 사라진 상황이었는데 당시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 관여하다 보니 영역과 역할이 생기더라. 담당 부서인 구청의 치수과에서도 마감재, 조명, 정확한 디테일 등을 건축가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세부적인 결정 사안을 도면화할 수 없는 상황 등,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 프로젝트에서 건축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

 

김정은: 도면화할 수 없다는 건 절차상의 문제인가, 아니면 업무의 문제인가? 

 

최춘웅: 실제 도면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했지만 (계약체계 안에서) 발주처가 도면을 요구하거나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사업이 토목 계약 안에서 진행되다 보니 건축 도서가 추가되는 상황 자체도 불확실했다. 그림(도면)이 소통의 수단이 되려면 제도적 힘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더라. 요즘 건축가들 보면 주민들이 뜨개질로 만든 평면으로 공사를 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지 않나. 도면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거나 반대로 도면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경우 등 상황에 맞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광수: 이 상황에서 건축가의 위치가 어땠을지 궁금하다. 스스로 정체성에 대해 의문도 생기고 무엇을 하고 또 안 해야 하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의사 결정권자를 설득해 건축 프로젝트로 확장하는 것과 지금처럼 부분적으로 개입하면서 참여하는 것 중 어떤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

 

최춘웅: 사실 이 사업은 건축 프로젝트로 확장할 만큼의 모멘텀은 없었다. 사업명도 ‘노량진 근대 하수박스 문화공간 활용사업’이라는 애매한 타이틀이었다. 구청에서는 근대 하수박스라는 유물을 구 내에 부족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예산을 책정했지만, 내부적으로 어떤 문화공간을 만들 것인지 공감대가 없었고, ‘문화’가 전시인지, 공간 자체가 문화인지에 대한 논의도 없었다. 공간 자체를 전시하는 건 중요하지만 그 외에 전시 공간을 만들기는 어렵다는 결론이 났을 뿐이다. 건축물 없이 보행로에 진입 계단 하나만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초반에는 자문단을 꾸려야 한다고 제안하는 등 동기부여를 하기도 했다. 도움을 주고자 국내외 하수전시관 사례를 찾아보았지만 대부분 규모가 너무 커서 노량진의 상황과는 맞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과한 추가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잘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건축을 하지 말자고 유도한 셈이다. (웃음) 

 

김광수: 이 프로젝트에서는 건축가가 힘 조절을 잘했다는 인상이 강했다. 다만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접근이 어려운 점은 아쉽다. 평소 지나는 길과 이어지는 일상적인 통과 동선이 될 수 있게 인지도를 높였다면 좋았을 것 같다.

 


노량진 지하배수로 초기 배치 스케치

 

 

사색과 사유의 공간: 비장소, 리미널 스페이스

 

최춘웅: 노량진 하수암거는 누가 봐도 시간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 안타까웠다. 하수로이다 보니 만들어진 시기, 배경, 가치에 대한 문헌이나 기록이 없어 문화재로 등록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역사성은 차치하더라도 좋은 공간을 발견했을 때 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통로’를 개방한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간을 쓰기 위해 ‘활용’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순간 프로그램, 운영 등이 따라붙어 부담이 커진다. 도시에 비워진 조용한 사색의 공간이 많으면 좋은데 무언가로 채우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내향적인 사람도 많은데 왜 공공 공간은 군중과 집단을 위한 모임 공간이어야 하나? 대개 혼자 있는 공간은 사적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공공 공간에도 이런 공간이 많아야 한다고 본다.

 

김광수: 이곳은 우리 내부에서 횡행하던 논리를 다 비껴나간 공간이란 점이 가장 흥미롭다. 음지에 있었던 건축물도 아니고, 사용 공간도 아니고 완전히 은폐되어 있던 시설이다. 관심 대상도 아니었는데 지금에 와서 재발견되면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상황이 아닌가? 일반적으로 공공 프로젝트에서는 프로그램이나 사용성, 내러티브 등을 동원해 의미를 담으려고 하는데 그런 게 없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오래된 것이 남아 있다’는 느낌도 좋았지만 ‘뭘 하는 공간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생기더라. ‘장소 만들기’가 아닌 ‘비장소’적 감각이 훨씬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는 점에서 새로웠다.

 

최춘웅: 구청에서는 스토리텔링 용역을 따로 발주하기도 했는데, 애초에 장소로 존재하지 않던 곳이라 찾아낸 스토리가 거의 없었다.

 

김광수: 인간이 점유하는 공간은 스토리텔링을 만들기가 쉽지만 이곳은 비장소이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이 어렵다. 대신 공간 자체로 묘한 서사적 감각을 자극한다. 사진으로 처음 이곳을 봤을 때 ‘리미널 스페이스’가 떠올랐다. 이 세계와 전혀 다른 폐쇄된 세계이며 교류도 없고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정의하기 힘든 리미널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콘크리트, 석재, 벽돌이 알 수 없는 말을 거는 듯한 공간은 경험자가 직접 서사를 상상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최춘웅: 이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이를테면 물의 입장에서 공간을 보거나 열차가 끊임없이 지나는 상황 자체도 서사가 되는 것 같다. 혼자 지하에 오래 있다 보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고 축축한 느낌도 엄습해 사람이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이 공간을 보면서 도시에 인간만 사는 게 아니라는, 도시가 인간을 위한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노량진 지하배수로 초기 제안

 

 

건축적 태도: 소멸하는 건축, 소멸하는 건축가

 

김정은: 자연스럽게 마곡문화관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최춘웅: 마곡은 노량진 지하배수로와는 시작부터 차원이 달랐다. 건물의 확실한 계보와 기록이 있었다. 1920년대에 누가, 왜, 어떤 형식으로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어 문화재로 등록하기에 수월했다. 근대건축학자 안창모는 주변의 관사 등 부속 건물을 엮어서 보존하길 바랐는데, 등록문화재로 인정받으려면 목구조와 같이 눈에 보이는 실체가 있어야 했다. 단순히 오래된 관사라는 사실만으로는 지정이 어려웠다. 주변과 엮여야 장소가 보존된다는 논리도 의미가 없었다. 마곡문화관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후에는 가장 먼저 ‘보존 존립’ 기조가 결정됐다. 다음으로 활용 방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이때 내가 발견한 기회는 상층부의 목구조가 문화재인 반면 하부구조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땅에 묻혀 아무도 볼 수 없었던 물길은 오롯이 공간에 집중해서 작업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일단 남아있는 옛 도면 원도를 보고 열심히 설계했다. 뭔가를 바꾸기보다 이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가늠하며 지하에 들어갈 휴식 및 전시 공간의 규모를 파악하고 데크와 통행로 등 구성을 잡았다. 그런데 막상 땅을 파고 보니까 공간 자체가 멋있어서 별로 할 게 없더라. 건축가가 꼭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김정은: 지하층의 퇴적토를 걷어내고 나서는 실제로 어떤 작업을 수행했나?

 

최춘웅: 공간 자체만 남도록 편집하는 게 내게 주어진 작업이었다. 만일 건축가 없이 전시 업체가 공간을 만졌다면 실을 만들고 내부도 과하게 변경했을 것이다. 건축가들이 작업할 때 더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장에 조명이나 가구 등 아무것도 설치하지 못하게 막는 데에도 큰 노력이 필요했다. 하부 공간에 전시를 하자, 실내에 뭘 추가하자, 땅을 더 파자 등 많은 의견이 있었는데 “이 정도면 된다”고 설득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김광수: 지하 공간의 느낌이 너무 좋은데 이곳에 계획했던 카페는 왜 실현되지 못했나?

 

최춘웅: 공간에서 좋다고 느꼈던 첫인상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게 쉽지 않은데, 이를 설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열심히 그림(도면)으로 표현해 발표하고 보여드렸다. 사실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상상의 자유는 있지 않나. (웃음) 도면대로 휴게 공간이 지어지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사업 초반에 공원 전체 계획에서 카페가 필요없다는 결론이 났다. 공공 사업 특성상 지하 공간에까지 사업비를 책정하기도 힘들었다고 들었다. 

 

김광수: 설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신의 작업이라고 애써 소개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최춘웅: 마곡문화관 역시 이미 존재하던 공간을 발견한 거라 내 작업이라고 말하기 애매하다. 옛 건물의 복원이 잘 정리되도록 여러 사람이 협업한 만큼 누구의 작업이라는 사실이 불투명해야 맞다고 판단했다. 나는 협업할 때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는 편이다. 소행성 G에 참여할 때 여러 사람의 결정이 녹아 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김소라의 모습을 보면서, 건축가가 모든 것을 결정해놓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김정은: 김소라와의 협업이 건축가로서의 태도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소행성 G는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였나?

 

최춘웅: 2013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도시 기반시설들을 대상으로 ‘ARKO 도시공원 예술로’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작가들이 공공 장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실험한 사업으로, 주어진 대상지에 대한 작가들의 제안을 받는 공모 형식으로 진행됐다. 소행성 G의 대상지는 공주 금성동 배수장이었다. 김장언이 기획하고 김소라가 주도했던 당선안은 펜스로 둘러싸인 배수장의 콘크리트 바닥을 공주의 지형을 닮은 형태의 그라운드로 채우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공주시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안이 전면적으로 수정됐고, 모든 계획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펜스로 막혀 있던 땅을 개방해 주민들이 편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는 것과, 공주에서 주운 돌멩이가 운석처럼 배수장 한 켠에 박힌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김광수: 다리는 본인이 설계한 것인가? 정글짐 같은 목조 파빌리온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나?

 

최춘웅: 다리는 구조를 맡았던 이주나가 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그림만 그렸다. (웃음) 김소라가 배수장 내부에 거대한 돌 조형물을 얹고 싶다 했는데,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뼈대가 되는 구조체를 세웠다. 원래는 구조체를 돌 형태로 덮기로 했었는데, 구조체까지 만들고 예산을 다 써버려서 정글짐 같은 모습으로 마무리됐다. 당시 김소라는 “그래도 뭔가 하나 생겼으니 이 상태에서 멈춰도 괜찮다”고 하더라. 그 태도가 너무 재미있었다.

 

김광수: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렛잇비(let it be)’ 같기도 하고, 작가로서 어떤 집착이 없는 것 같다. 

 

최춘웅: 김소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개념미술 작가들은 조각이나 회화처럼 구체적인 표현 매체를 가진 작가들과 달리 작업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보는 것 같다. 특정 물체를 중요하게 다루기보다, 과정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한다고 할까. 궁극적으로 미술 작업의 목표를 결과물이 아닌 사회적 행위로 보지 않나 싶다.

 

김광수: 최춘웅의 건축적 태도에서도 그것과 굉장히 유사한 감각이 느껴진다. 마곡문화관이나 노량진 지하배수로를 보면서 건축가가 자신의 색깔을 애써 지우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여기에는 프로젝트가 지닌 정당성, 예를 들어 원형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건축가의 색깔을 지워야 하는 당위성도 포함된 것 같다.

 

최춘웅: 스스로를 지우는 것이 편하다. 내가 한 게 아니고 실제로 나라는 존재 없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김광수: 그런 태도도 욕망이다. 자신을 지워가는 소멸의 욕망. 최춘웅과 가끔 사석에서 대화하면 그가 ‘그래서 이걸 하고 싶은 건지, 하기 싫은 건지’ 하는 의문이 종종 들기도 했는데,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주저하는 측면도 많은 것 같다. 그런 태도를 좋다 나쁘다 평가할 수는 없다고 본다. 충분한 가치를 지닌 하나의 태도로 인정해주고 싶다. 다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서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좋은데, 만약 어쩔 수 없이 그런 태도를 취했다면 의미가 다를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두 입장이 공존하는 듯한 느낌도 있다. 


노량진 지하배수로 진입시설 단면

 

최춘웅: 작가로서 내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 ‘그 사람이 없다면 작업이 다른 방향으로 갔을 텐데,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을 보여주는 데 치중하는 것 같다. 같이 있기만 해도 도움이 되는 사람 정도가 내가 설정한 방향이 아닌가 싶다.

 

김광수: 마치 돌봄정신이 투철한 호밀밭의 파수꾼 같다고 할까? (웃음) 

 

최춘웅: 파수꾼 역할이 언뜻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방향을 알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액티비즘일 수도 있다.

 

김정은: 지금의 도시적 상황에 적절한 역할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김광수: 방금 말한 태도는 코디네이터와 유사하다. 주변의 요구를 수용하는 코디네이터의 자세로 임하다 보면 건물 자체의 완결성이나 완성도가 떨어지기 쉽다. 그런데 최춘웅의 작업은 디테일이 굉장히 섬세하다. 코디네이터로서의 역량이 대단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

 

최춘웅: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들도 대개 뭔가를 더 하기보다는 덜 하는 사람들이다. 덜 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김광수: 마지막으로 ‘대중의 노스탤지어’, ‘시간의 심미화’, ‘소멸의 과정’ 같은 주제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대중의 노스탤지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자신에게 노스탤지어가 있는지, 만일 있다면 ‘낯섦’이라는 건축 주제와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하다.

 

최춘웅: 서로 연관된 것 같지는 않다. 노스탤지어가 과거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하나의 수단인 것 같아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도시에서 꼭 느껴야 하는 요소는 아니지 않나. 기억처럼 개인이 소유한 비공간적 감성인데,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게 과연 건축적인가 하는 의심이 있다. 

 

김광수: 그런 맥락에서 일제시대 느낌을 주는 목조건축물인 마곡문화관도 충분히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기 좋은 소재이지 않나. 지상부는 차치하더라도 지하부에서 섬뜩함이나 낯섦 같은 무드를 기조로 접근했던 것은 아닌가?

 

최춘웅: 맞다. 실제 원형인 양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던 것처럼 재현되길 바랐다.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남아 있는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노스탤지어나 섬뜩함과는 또 다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옛 모습으로 되돌리거나 새롭게 구현하는 것보다는 처음에 받았던 느낌이 정제되는 상태를 원했다. 청소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한국에 돌아와 처음 했던 작업이 옛 기무사 건물(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전시 공간으로 바꿨던 프로젝트였다. 리모델링 공사 전에 계단 밑 구석진 공간을 발견하고 거기 들어가서 처음 한 일이 있던 것들을 치우고 쓸어서 깨끗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다 비워낸 뒤 현장에서 작업했던 목수가 와서 벽에 못 하나를 박고 옷을 딱 걸었을 때 제일 멋있더라. 설계가 아닌 진짜 청소, 대청소다.

 

김광수: 청소라는 말이 작업과 정체성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인 것 같다. 청소라는 게 끝도 시작도 없는 행위가 아닌가?

 

최춘웅: 그렇다. 반복되는 수행이다. 청소만 잘해줘도 대부분의 일은 맞더라. 해방촌에 작업실이 있을 때 뭘 해도 안 좋아하던 주민들이 우리가 열심히 계단을 쓸 때 제일 고마워하더라. 

 

김광수: 건축계의 청소원이라 해야 하나? (웃음) 이 방향으로 꾸준히 작업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다.​

 


노량진 지하배수로 진입시설 계단실 단면​​


▲ SPACE, 스페이스, 공간


김광수
김광수는 스튜디오 케이웍스 대표이며 집담공간 커튼홀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와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했다. 여러 장르의 전문가 및 대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뉴미디어로 인한 사회성, 도시건축 환경의 변화를 주목하며 다양한 건축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2004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방들의 가출’이라는 주제로 한국 사회의 아파트와 방 문화 현상을 조사해 전시한 바 있으며, 핀란드 국립미술관(2007), 아트선재센터(2012),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2013), 독일 에데스 건축갤러리(2014), 문화역서울284(2012, 2016) 등에 초대되어 전시를 했다. 대표작으로 부천아트벙커 B39, DMZ 철새타운, 서울창의예술교육센터, 신촌문화발전소, 판교케이브하우스, 광주시민회관 재조성 사업 등이 있다.
최춘웅
최춘웅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역사적 건축물의 재활용, 도시재생 그리고 건축의 영역을 독립된 문화 행위이자 지식 생산 분야로 확장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2018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공동 큐레이터 겸 작가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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