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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기억, 장소: 버려진 공간을 소환할 때] 노량진 지하배수로

최춘웅
사진
김재환(별도표기 외)
자료제공
최춘웅
진행
방유경 기자
background


최춘웅


노량진 지하배수로: 공백의 사유

 

2008년에서 2011년까지 실시한 노량진 수산시장 주변 침수해소 사업 시행 과정에서 발견된 하수암거(지하배수로)가 공공에 개방됐다. 단순하게 보면 노량진 수산시장과 노량진로 사이를 연결하는 지하보행로에 불과하지만 120년에 걸친 서울의 철도와 토목, 수자원 기반시설의 근대 역사를 직접 걸으며 경험할 수 있는 길이다. 개방된 하수암거 중 가장 오래된 부분은 마제형(馬蹄形), 즉 말발굽 형태로 설계되어 상부의 벽돌 볼트를 화강석 벽이 받치고 있으며 1899년 개통된 경인선 철로 아래 위치한다. 약 20m 길이의 마제형 암거를 포함해서 모두 다섯 개 구간으로 이뤄진 보행로의 전체 길이는 92m다. 1969년 완성된 경인선 복선화 구간 아래 위치한 약 11m 길이의 사각형 콘크리트 하수박스는 한국의 경제개발이 가속화되던 시절 시멘트 생산이 시작된 시점과 맞물려 있다. 이어지는 아치형 구간은 1995~2006년 사이에 증설된 철로 아래 위치한다. 독특한 단면과 당시 사진에서 철로 증설 이전에도 해당 구간의 땅이 복개되어 있던 사실을 근거로 추측할 때, 지금은 사라진 영등포-노량진 구간의 전차 개통 시기인 1952년에 추가됐을 가능성이 높다. 20세기 초 근대 하수시설들이 여럿 발견되어 사적과 서울시기념물로 지정 및 보호되고 있으나 시민에게 개방된 곳은 노량진 지하배수로가 유일하다. 주변 보행 네트워크의 일부로 공공에 개방된 배수로는 비록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아니지만 진정한 역사적 장소로서 물이 아닌 사람이 다니는 길이 됐다.

 

최춘웅​​​

 

노량진로 진입시설은 뾰족한 세모 타워들의 단순 조합이다. 주변의 지하보도 입구나 지하철 입구 등 도로 편의시설과 차별화되어 지하 토목 구조체가 땅 위로 솟아오른 듯한 인상을 주고자 했다. 주변과 섞이기 어려운 사물들이 독특하고 이상한 장면을 만들어, 전형적인 거리 경관과는 다른 이질적 풍경을 유도했다. 노량진로와 철로 사이 빽빽한 나무와 풀 뒤에는 공원 같은 산책로가 하나 숨어 있는데 이 산책로 끝에 세모 타워가 위치한다. 폐허가 된 폴리처럼 출현한 두 타워는 주변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선로를 지나는 기차에서 보이는 높이로 타워를 계획했다가 공사비 절감을 위해 층고를 낮췄다. 한쪽 타워에는 엘리베이터와 환기시설을, 다른 타워에는 숨어 있는 지하 공간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전시실을 배치했다. 두 타워들 사이에 갈라진 땅속으로 계단이 나타나고 중간 참에서 전시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발굴 당시 유일한 진입로였던 맨홀을 떠올리며 전시실 위에 동그란 천창을 냈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강한 빛줄기가 어둑한 전시실을 휘덮는다. 전시실을 나와 아래로 내려가면 반으로 쪼개진 아치 모양의 터널을 따라 한 줄기의 얇은 빛이 가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가 어두운 터널과 겹칠 즈음 긴 터널이 나타나고, 여러 겹의 단면들이 연결된 통로에는 조명 같은 인공 광원이 보이지 않는다. 약간 음산하며 신비한 광채가 공간 전체를 적신 듯하다. 출구도 어떤 인위적인 방해물도 없다. 멀리서 들리는 기차의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적막을 깨지만 텅 비어 있는 공백이다.

 

최춘웅​​​

 

공백이 주는 허무함과 무력감은 설계 후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개인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장면이 현실이 되어 공유될 때 설계는 장소가 된다. 그 장소를 마주칠 때 느끼는 감정의 공백은 숨기고 싶은 실수와 부족함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한 망각에 대한 욕구일 수도 있지만 이미 존재하는 공백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의 실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공백 속에서 만족감을 얻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고백이 겸손한 표현이 아닌 떳떳한 자랑이 될 수 있을까? 노량진 배수로는 건물이 아닌 도로, 즉 길이고 공식 프로젝트명도 ‘지하보행로 진입시설’이었다. 동작구청의 치수과에서 진행한 토목사업으로 토목기사들이 공사를 맡았다. 업무 영역에 건축은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자문으로, 비공식적으로는 자원봉사로 참여하는 방식이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나의 역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유적지를 보존하거나 재활용하는 경우, 공백은 이미 존재하는 잔존 가치를 지킬 때 남는 결과일 것 같다. 시간 속에 희석되고 제도 속에 묻히는 설계자의 개념과 발상은 단순한 개인의 자아일 뿐, 현존하는 과거의 흔적은 집단과 사회의 의지에 따라 보존되기에 그 발현의 형상이 어설프고 볼품없어도 존중돼야 한다. 한 장소가 조성되는 작업의 실현 과정에 얽힌 수많은 사람과 사물의 개입, 간섭은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그 장소 속에 스며들어 남는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가 취할 태도는 목소리를 낮추고 유연해지는 것이다. 수많은 목소리들의 불협화음이 소음이 아닌 음악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적막과 공백이 공공의 영역 곳곳에 숨어 있고, 사유와 독백의 장소들이 도시 속에 차분하게 자리 잡도록 건축가는 때로는 숨거나 사라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도시의 유산들 속에서 개인의 존재감이 넘실대는 거대한 구조체들보다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건축가의 존재가 오히려 기억에서 지우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미 존재하는 공백 사이에 미약한 표현들이 스며들어 영원한 과거 속에 남을 수 있다면 건축이 행위가 아닌 상태로 표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시유산 중에서도 노량진 지하배수로가 독특한 이유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숨겨진 기반시설, 특히 하수시설이기 때문이다. 건축 행위가 암묵적으로 연대하는 권력과 자본의 상징성이 닿지 않는 영역 속에 만들어진 장소이기에 더 특별하다. 누구도 경험해본 적 없는 공간의 기억은 역사보다 전설에, 집단을 향한 선포보다는 개인의 독백에 가깝다. 완성과 동시에 아무도 볼 수 없이 묻힐 것을 알면서도 세심한 정성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공백. 이제 그 공백의 균열을 따라 미약한 빛이 스며든다. (글 최춘웅, 진행 방유경 기자)​

 

 


▲ SPACE, 스페이스, 공간


최춘웅
최춘웅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역사적 건축물의 재활용, 도시재생 그리고 건축의 영역을 독립된 문화 행위이자 지식 생산 분야로 확장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2018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공동 큐레이터 겸 작가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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