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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각의 건축가가 박길룡이 아니라면? ‐ 「SPACE」라는 물증, 혹은 미스터리

김현섭(고려대학교 교수)
진행
김정은 편집장

 「SPACE(공간)」2023년 1월호 (통권 662호)  ​​​

 

보화각의 건축가가 박길룡이 아니라면? ‐ 「SPACE」라는 물증, 혹은 미스터리

 

보화각은 간송미술관 경내에 자리한 건축물로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하여 1938년 완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현섭(고려대학교 교수)은 이번 리포트를 통해 이 보화각의 설계자가 박길룡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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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6월 간송미술관 <보화수보(寶華修補)> 전시 당시의 보화각 ©archistory KU, Research Unit of Architectural History, Korea University 

 

1.

보화각의 건축가가 박길룡이 아니라면? 최근 필자에게 든 생각이다. 한국 건축계와 소유주인 간송미술관이 다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 마당에, 어디 감히 이런 발칙한 의문을 품다니…. 게다가 2019년 보화각(1938)이 국가등록문화재(768호)로 등록된 데는 한국 1세대 건축가의 대표자인 박길룡(1898~1943)이 설계자라는 점도 핵심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당시 문화재 등록을 심의한 문화재위원회 회의록(2019.12.17.)을 보라.▼1 2022년 4~6월에 개최된 전시 <보화수보(寶華修補): 간송의 보물 다시 만나다>도 대중에게 이를 각인하는 계기였다. 사실 필자도 박길룡 작품으로서의 보화각을 주시해왔고, 근래에는 박길룡의 기능주의적 개념에 견준 보화각의 전환기적 성격을 주제로 논고를 준비하던 차였다.▼2 그런데 기본 사실 관계를 검토하는 가운데 의문이랄까, 상상이랄까, 뭐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발단은 「SPACE(공간)」 6호(1967년 4월호)에 게재된 특집 ‘건축가 박길룡: 24주기를 맞이하여’에 대한 재고찰이었다. 이는 「SPACE」가 2021~2022년 24회 연재한 꼭지 ‘리-비지트 「SPACE」’의 18회차(2022년 6월호) 주제였으니, 1960년대의 박길룡 인식에 대한 필자의 현재 논평을 위해서는 해당 ‘리-비지트’ 기사를 참고하시라.▼3 건축가 박길룡을 연구하기 위한 해방 후의 원천 자료로서 이 특집 기사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데, 보화각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필자가 아는 한, 「SPACE」 6호야말로 보화각을 박길룡의 작품으로 간주한 최초의 출판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특집을 꼼꼼히 살펴보면 보화각과 관련해 두 가지 의문이 생기며, 각각은 또 다른 의문점을 자아낸다. 첫째, 특집의 총론 격인 윤일주의 글이든, 박길룡과의 기억을 회고한 10인의 추상록(追想錄)이든, 어디에도 보화각은 언급되지 않았다. 박길룡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추도기를 냈던 (그리고 「SPACE」 6호에 적극 참조됐던)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1943년 5월호)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왜일까? 둘째, 이 특집에 글과는 거의 무관하게 삽입된 열 장의 박길룡 건물 사진 중 ‘북단장(北壇莊)’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둘인데, 하나가 보화각이다. 나머지 하나는 간송 전형필(1906~1962)이 1930년대 전반 인근의 터와 함께 구입했던 2층 양관이다. 매도자인 프랑스인 폴 플레장의 주택이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이는 보화각으로 오인되어 잘못 삽입된 것일까, 아니면 여기에도 박길룡의 손길이 묻어 있는 것일까?

주지하듯 간송은 문화재 수집을 본격화하며 1934년 즈음 지금의 성북동 간송미술관 일대의 터를 매입했고,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옛 선잠단 부근이라 하여 ‘북단장’이라 명명했다.▼4 북단장은 건물을 포함한 터 전체의 영역을 지칭한다고 하겠으니, 보화각은 북단장 경내에 지어진 건물이다. 한편, 혼동을 피하기 위해 옛 플레장 주택을 여기서는 편의상 ‘플레장 양관’이라 부르자. 이에 대해서는 이흥우(1996)의 문장을 인용할 만하다. “[플레장이 지은] 빨간 지붕의 그 양옥은 건평 70평 정도로 거듭 수리를 해 지금도 남아 있으며 1966년에 설립된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초기의 사무실이었고 지금은 도서실로 사용된다.”▼5

 

「SPACE」 6호(1967년 4월호)의 특집 ‘건축가 박길룡: 24주기를 맞이하여’에 삽입된 보화각(위) 및 플레장 양관(왼쪽 아래) 사진 

 

2.

「SPACE」 6호 박길룡 특집에서 보화각과 관련해 필자 스스로 제기한 의문은 이해하려고만 한다면야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는 문제이긴 하다. 첫째, 추상록을 쓴 필진들이 (두 아들만 빼면 대부분 박길룡건축사무소를 거쳐 간 인물이긴 하지만) 굳이 보화각을 언급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보화각이 일제의 문화침탈에 맞섰던 간송의 야심찬 프로젝트였음을 생각하면 이 건축공사는 일부러 조용히 진행됐을 수도 있는 일이다. 건축가를 익명으로 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회자되는 것을 자제하면서 말이다. 당시는 중일전쟁 중인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으로 전시통제를 강화하던 때였다. 둘째는 더 간단한 문제다. 앞서 시사했듯 플레장 양관 사진은 편집자의 실수로 들어갔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을 너무 쉽게 억누르지는 말아보자. 보화각 정도의 프로젝트를 박길룡이 맡았다면 우리 건축인들이 전혀 몰랐을 리 만무하다. 만약 알았다면 해방 후의 회고에서는 한 번쯤 자유롭게 거론됐을 법하지 않은가? 더 진한 의구심은 윤일주에게서 온다. 특집의 총론을 쓸 당시는 박길룡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그였지만, 해당 특집에 보화각 사진이 삽입된 이상 그가 이를 주목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1978년 출판한 『한국현대미술사(건축)』의 박길룡 작품 목록에 보화각은 빠져 있다. 이 책 집필을 위한 자료 수집에 그가 공을 들인 것을 생각하면 뜻밖의 일이라 하지 아닐 수 없다.▼6 한국 근대건축사 분야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건축사학자 윤일주에게 보화각이 박길룡의 작품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선친의 입장을 이어받아서인지 윤인석이 「건축사」에 기고한 글 ‘한국의 건축가: 박길룡 (1)~(2)’(1996.7.~8.)에도 보화각은 거론되지 않았다. 더욱이 김정동이 1980년대 말 같은 회보에 15회 연재했던 ‘한국 근대건축의 재조명’(1987.5.~1989.2.)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시리즈에서 한옥에 둥지를 튼 미국공사관(1883)에서부터 박길룡의 근대적 이문당(1943)에 이르기까지 109건에 이르는 건물을 연대순으로 다루었다. 누구보다도 자료 수집에 열심이었던 김정동에게도 보화각은 아직 미결의 상황이었나 보다.

그렇다면 「SPACE」 6호 이후, 보화각은 어떻게 박길룡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됐을까? 역시 시작은 박길룡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인 최순애의 홍익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박길룡의 생애와 건축에 관한 연구」(1981)였다. 여기서 최순애는 보화각을 북단장으로 지칭하며 논문 마지막에 짤막하게만 다루는데, 이를 주택 범주에 넣은 것으로 보아 플레장 양관과 혼동한 듯하다. 「SPACE」가 선보인 모호함의 연장이다. 송석기의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박길룡의 건축작품 특성에 관한 연구」(1992)도 보화각을 북단장이라는 이름의 주택으로 다룬 점이 최순애와 유사하다. 다만 최순애에게 없었던 건축 연대를 1940년으로 (잘못) 넣은 것이 새롭고, 보화각의 입면 처리에 비판적 견해를 나타낸 점이 다르다(51~52쪽). 하지만 송석기는 같은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한국 근대건축에서 나타난 모더니즘 건축으로의 양식 변화」(1999)에서 보화각에 대한 현재적 이해를 상당 부분 보여주기 시작한다. 보화각을 간송 전형필의 소장품 전시를 위한 문화시설로 보고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모더니즘 건축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206쪽). (단, 보화각에 여전히 잔존한 전근대적 요소에까지 눈길이 미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일례로 출입구 계단의 돌 세공을 보라.▼7)

보화각에 대한 송석기의 새로운 이해에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1993년 4월 「건축가」에 실린 송율의 글 ‘미발표 한국 근대건축물’이었다. 이 글에서 송율이 「SPACE」 6호에 북단장으로 나온 두 건물이 서로 다른 것임을 인지하는 가운데, 보화각이 간송미술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임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건축 연구자들과 달리 간송미술관 측의 문헌을 살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간송문화」 41호(1991.10.)에 실린 최완수의 ‘간송선생 평전’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송율은 북단장을 (즉, 플레장 양관을) 박길룡이 설계했으나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앞서 인용했던 이흥우(1996)의 말과 배치되는 지점이다.▼8 그러나 송율의 글에서 더 눈여겨볼 점은 「SPACE」 6호의 사진 한 장만이 보화각 건축가를 박길룡으로 보는 근거였다는 사실이다. “보화각의 설계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공간 67년 4월호 박길룡 특집의 화보 중 북단장이라는 사진 제목으로 끼어 있는 보화각의 사진은 이 건물이 박길룡의 작품인 것을 알 수 있게 한다.”▼9

 

3.

아무튼 우리 건축계가 북단장의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그리고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명시한 것은 1993년 송율의 글이 처음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보화각이 박길룡의 작품임을 간송 측이 먼저 확인해준 것이 아니라, 건축계의 인식을 따라 간송 측도 보화각의 건축가를 박길룡으로 생각하게 됐다는 사실 말이다.▼10 간송 측의 문헌을 시간순으로 살펴보면 명확한데, 앞에 언급한 1991년 최완수의 ‘간송선생 평전’이 일단은 중요하다. 앞으로 반복될 간송의 일대기뿐만 아니라 보화각 건축의 서사가 대개 이 글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불래샹(플레장) 등으로부터 땅을 구입해 1934년 북단장을 개설한 배경,▼11 1938년 윤7월 5일(양력 8월 29일)의 보화각 상량식을 축하하는 위창 오세창의 정초명(定楚銘)에 대한 해설, 계단에 사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하면서까지 보화각 건축에 만전을 기한 이야기 등이 골자인데, 이때까지는 아직 건축가에 대한 언급이 없다.▼12 이후 여기에 살이 붙는 과정에서 건축가 이야기가 삽입되는 형국인 것이다. 최완수의 글을 확장한 1996년의 이흥우가 그렇다. “이 건물은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의 설계로 조선인 건축가가 가장 초기에 설계한 양관 중의 하나라고도 한다. … 1930년대에 지어졌던 화신백화점도 그의 설계였다.”▼13 송율의 ‘발굴’로 인해 가능했던 서술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로서의 보화각은 이제 간송 측에서도 빠트릴 수 없는 스토리가 됐다. 간송 유족의 연구문헌에서든,▼14 간송미술관 웹사이트의 소개문에서든, 건축가 박길룡은 간송의 유산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간송 측이 먼저 제시한 (혹은 제시할 수 있는) 보화각의 설계자에 관한 1차 자료가 부재한 것은 아쉽다. 보화각의 폐쇄등기부증명서(1979.2.26.)에 기록된 ‘1938년 도면편철장 제3책 83장’이 어딘가에 현존할까? 문화재 등록을 심의하던 과정에서도 이 자료 확인의 필요성이 언급된 듯한데,▼15 궁금한 노릇이다.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의 굴곡을 겪은 우리에게 이 같은 자료의 추적은 너무도 힘든 일이 돼버렸다. 물론 1차 자료의 행방이 묘연함은 비교적 근래의 건축계도 다르지 않다. 박길룡의 장남인 소설가 박용구(1923~1999)가 보관하던 그의 자료가 (「SPACE」 6호의 특집 및 최순애의 석사논문이 이 자료 덕을 보았는데) 어딘가에 존재하고 연구자들이 접근할 수 있다면 보화각과 관련된 의문이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송율 이전, 간송 측의 문헌 중에는 북단장 내 건물의 건축가와 관련된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일까? 필자는 한 가지 유의미한 언급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건물은 불란서 부부가 살던 곳으로 화신을 설계한 분이 하셨다고 합니다.” 보성고등학교 교장으로 간송의 뜻을 이어가던 아들 전성우가 1973년 했던 말이다. 이구열이 사회를 보고, 김원룡, 진홍섭, 최순우 등 여러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한 간송 서거 11주기 좌담회에서 보화각에 관해 논하던 대목이었다.▼16 전성우가 맞다면 박길룡은 플레장 양관에 관여했고 보화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면 최소한 보화각에 대해서는 전성우가 아는 바는 없다. 물론 그가 두 건물에 대해 거꾸로 오해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말 전성우 말이 맞다면, 「SPACE」 6호의 편집자가 플레장 양관 사진을 넣는 와중에 보화각 사진까지 잘못 넣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셈이다.▼17 무엇이 사실일까?

 

특집 ‘건축가 박길룡: 24주기를 맞이하여’의 시작 페이지, 「SPACE」 6호, 6쪽. 

 

4.

지금까지 본고는 보화각의 건축가와 관련된 의문점을 건축계의 문헌과 간송 측의 문헌을 살피며 짚어보았다. 요약하자면, 보화각의 건축가가 박길룡이라는 근거는 현재로서는 1967년 4월 「SPACE」 6호 기사의 모호한 사진 한 장뿐인 것으로 보인다. 이 물증, 혹은 미스터리에 바탕을 둔 1993년 송율의 글 이후 보화각의 건축가가 박길룡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1973년 전성우의 발언 등 몇몇 정황은 또 다른 가능성을 궁리하게 만든다. 사진 한 장이라는 연약한 근거는 한번 의심해볼 만도 하지 않은가.▼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전히 보화각의 건축가가 박길룡이었기를 바라고, 이에 대한 더 확실한 근거가 건축계에서든 간송 측에서든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만이 지금까지 어렵사리 구축해온 우리 현대건축사의 출발점이 흔들림 없을 것이며, 앞으로 더 튼튼하고 풍성한 서사가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선의 시나리오는 「SPACE」 6호에 오류가 없는 것, 즉 박길룡이 북단장 내 두 건물 모두를 각각 개축과 신축으로 담당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류가 있다면 교정이 필요하리라. 필자의 이 글도 자료의 한계와 소통의 제약 등으로 인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미 자명하듯 이 글은 의문을 해결한 결과물이기보다 오히려 그 해결을 향한 과정 중의 추정과 가설의 조합이라 하겠는데, 실마리를 가진 독자 제현이 있다면 조언을 구한다.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점도 작은 실마리 하나에 일소되곤 하니 말이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관련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글이 언급한 모든 연구자들께 경의를 표한다. (글 김현섭 / 진행 김정은 편집장)

 

 

1. 문화재위원회, ‘제12차 근대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4. ‘서울 보화각’ 문화재 등록’, 『문화재위원회 회의록 [공개용]』 , 문화재청, 2019, 10929~10975쪽. 이 회의록은 문화재청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문화재청과 간송미술관은 문화재 등록 한 해 전(2018.12.7.)에 이미 ‘간송과 보화각’이라는 제목의 공동 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때 ‘건축’에 대해서는, 즉 건축가 ‘박길룡의 작품’으로서의 보화각에 대해서는 안창모가 발표했고, 송석기가 토론으로 참여했다. 한편으로 분명히 할 점은, 만에 하나 보화각이 박길룡 작품이 아니더라도 국가등록문화재가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2. 필자는 몇몇 발표와 출판물에 박길룡의 작품으로서의 보화각을 논한 바 있으며, 그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2018년 10월에는 간송미술관의 양해로 보화각을 둘러보기도 했다. 필자의 개인적 방문을 허락한 간송미술관과 당시 실측도면을 제공하고 안내해주신 정병삼·백인산 선생께 감사드린다.

3. 본고는 졸고, ‘1967년 4월호, 건축가 박길룡 특집: 한국 1세대 건축가 연구의 출발점’, 「SPACE」 655호(2022년 6월호), 112~119쪽에 있는 이 ‘리-비지트 「SPACE」’ 글의 연장이기도 하다. 

4. 최완수, ‘간송선생 평전’, 「간송문화」 41호(1991.10.), 61~122쪽(85쪽).

5. 이흥우, ‘간송 평전’, 『간송 전형필』, 보성중고등학교, 1996, 137~272쪽(188쪽). 주8 참조.

6. 윤일주, 『한국현대미술사(건축)』, 국립현대미술관, 1978, 7~8, 52~53쪽.

7. 2018년 12월의 심포지엄에서 안창모도 보화각의 전근대적 요소를 몇 가지 언급한 바 있다.

8. 필자가 직접 방문해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플레장 양관이 아직까지 존재한다고 할 때, 간송미술관과 관련해 검색되는 성북동 74번지의 건물이 아닐까 짐작된다. 건축물대장상 이 건물은 1934년 ‘신축’으로 등기됐고(1934.8.20.), 멸실 기록은 없다. 토지대장에 기록된 토지 구입일은 건물이 등기되기 약 두 달 반 전(1934.6.2.)이다. 이흥우의 말과 함께 종합해 추정한다면 이전까지 미등기 상태였던 플레장 양관은 1934년 개축(개보수)을 계기로 건축물대장에 오르게 됐고, 이때 부득이 신축으로 적었을 수 있다. 「SPACE」6호에 이 건물이 잘못 들어가지 않았다면, 바로 이 개축 프로젝트에 박길룡이 관여했던 것은 아닐까?

9. 송율, ‘미발표 한국 근대건축물’, 「건축가」(1993.4.), 14~18쪽(15쪽). 

10. 이 글에서 ‘간송 측’이라 함은 일차적으로는 간송의 유족과 간송미술관(한국민족미술연구소) 관계자를 지칭하지만, 더 넓게는 간송 컬렉션과 관련된 미술계 및 1940년 간송이 인수해 경영한 보성(중고등)학교 관계자까지도 포함한다. 

11. 최완수는 19세기 말 서울에 온 플레장이 석유 매매로 돈을 벌어 땅을 사고 프랑스식 집을 지었는데, 간송이 주변 땅과 함께 이를 구입했다고 서술한다. 토지대장에 ポ—ル プレサン, ポル ブレ—サン 등으로 기록된 이 인물은 1939년 8월 가짜 화장품을 제조해 판매하다 발각된 부래상상회(富來祥商會) 사건의 당사자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옛 신문에는 부래상, 푸레상, 프레산 등으로 표기됐다. ‘폴·안토니·푸레상’ 등으로 전체 이름이 나오기도 하는데, 원어명은 ‘Paul Antoine Plaisant’으로 추정된다.

12. 최완수는 1991년의 글을 약간 보정한 1998년의 글에서도 건축가를 언급하지 않는데, 공사 중인 보화각 사진의 촬영연도 불일치 등 몇몇 차이점도 주목된다. 최완수, ‘간송이 보화각을 설립하던 이야기’, 「간송문화」 55호(1998.10.).

13. 이흥우, 앞의 글, 216쪽.

14. 전인지, ‘보화각’, 『한국 박물관 100년사』, 국립중앙박물관, 2009, 205~209쪽; ‘테마 박물관으로서 간송미술관의 미래’, 『박물관학보』 28(2015.6.), 243~259쪽. 

15. 문화재위원회, 앞의 책, 10972쪽. 

16. 이구열 외, ‘좌담: 간송의 생애와 예술 ‐ 서거 11주기를 맞으며’, 「보성」 74(1974). 다음에 재수록됨. 『간송 전형필』, 보성중고등학교, 1996, 371~390쪽.

17. 이 경우라면 박길룡은 플레장 양관의 신축이 아닌 개축(개보수)에 관여했을 것이다. 주8 참조. 

18. 그런데 이런 의심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 보화각 건축에 관한 아주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충렬의 전기 『간송 전형필』(김영사, 2010)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건물 완공을 상량식 한 달 후로 서술한다. 그리고 건축 공정별 소요 기간을 따져 보화각의 전체 공사 기간을 3~4년으로 보았고, 1935년 화신백화점(1935~37) 설계 이전에 보화각이 설계된 것으로 단언한다(161쪽). 공사 기간을 역산해 설계 시점을 잡은 것이다(필자와 이충렬의 카카오톡 메시지 교환, 2022.5.11.~5.13.). 매우 합리적인 추론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우선은 건물 완공 시점인데, 상량식 한 달 후면 시간이 너무 빠듯해 보인다. 보화각이 건축물대장에 등기된 시점(1938.11.20.)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설계 시점에 관한 것이다. 보화각이 (박길룡 설계라는 전제하에) 화신백화점에 앞선다는 서술 말이다. 여기에 내포된 모더니즘에서 역사주의로의 회귀는 또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화각의 옛 토지대장에서 이 땅을 구입한 때가 필자에게는 소화 12년(1937년) 1월 9일로 읽히니, 설계 시점 자체를 정확히 잡았는지가 의문인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와 논리를 종합한다면 보화각 설계는 아무리 빨라도 토지 구입 시점 직후인 1937년 초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이 책은 저자가 간송 측의 많은 자료를 고증하고 관련 인물들을 취재해 집필한 것으로 상당한 신빙성이 있지만, ‘전기문학’으로서 여전히 “자료와 상상,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 수밖에 없다. 유족을 대표해 전성우가 “줄거리 구성에 허구(상상)가 있음을 밝히는 조건으로 출판에 동의”했다고 작가 자신이 서문에 밝혔다. 한편, 서울대학교박물관이 근래 개최한 전시회(2021.9.~2022.2.)와 그 결과물로서의 책 『우리가 그려온 미래: 한국 현대건축 100년』(도서출판 집, 2022)은 보화각의 설계 의뢰를 1932년으로 추정하며, 공사 기간을 1936년부터 1938년 9월로 잡았다. 이충렬의 책을 참조했다고 한다(필자와 전봉희의 이메일 교환, 2022.5.4.~6.). 사실 최완수(1991) 이전 한동안은 보화각의 건축 연대를 1936년으로 보기도 했다. 1971년 10월 「간송문화」 1호의 ‘연보’를 보라.​ 


▲ SPACE, 스페이스, 공간


김현섭
김현섭은 영국 셰필드대학교에서 박사 및 박사후과정으로 유럽 근대건축을 연구했고, 2008년부터 고려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건축 역사가이자 비평가로서 한국 현대건축에 관한 비판적 역사 서술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건축수업: 서양 근대건축사』(2016), 『건축을 사유하다: 건축이론 입문』(역서, 2017), ‘DDP Controversy and the Dilemma of H-Sang Seung’s ‘Landscript’’(2018), ‘The Hanok Paradox: Modernity and Myth in the Revival of the Traditional Korean House’(2019) 등 다수의 단행본과 논문을 국내외에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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