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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REVIEW] 건축박물관은 건축의 박물관이 아니다

송률, 크리스티안 슈바이처(수파 슈바이처 송 공동대표)
진행
김정은 편집장

건축박물관은 건축의 박물관이 아니다: 국립도시건축박물관에 관한 공개 담론을 위한 호소

 

건축박물관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모순이다. 본연의 가치를 그대로 간직한 원본을 소장하며 전시하는 미술관이나 디자인박물관과는 달리, 건축박물관은 본질의 이차적 표상들로 채워진다. 건축을 위한 도면과 모형, 또는 실제 건축을 기록한 사진들 말이다. 김수근이 쓰던 안경은 경동교회의 사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건축박물관에는 실제 건축이 없다. 따라서 건축 전시회는 근본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1929년 제2회 CIAM 전시회 를 위하여 에른스트 마이는 '순회전시'라는 형식을 창안하여 유럽 전역에서 더 많은 관객이 이 전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를 위하여 그는 운송하기 쉬운 도면과 모형, 사진 등으로 건축 작업의 표상을 축소하였다. 에른스트 마이의 순회전시에 대해 알게 된 필립 존슨은 1932년 전에서 이 전시 개념을 더욱 구체화한다. 도면, 모형, 사진, 원고, 문서와 같이 건축의 본질을 전달할 수는 없지만 건축에 대한 서사를 보여주는, 오늘날 우리가 건축전시라고 생각하는 형식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사건은 만져지지 않는 서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건축의 파편들을 전시함으로써 건축박물관을 역사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역사적인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불과 몇 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건축은 여전히 현재이다. 건축박물관은 건축을 모방하며 축소하고 대체하거나 탈맥락화한다. 그렇다면 건축박물관은 어떠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건축박물관은 절대로 ‘박물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미술관이나 디자인박물관 건축은 본연의 예술이나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는 울타리 또는 캔버스이다. 건축박물관 건축은 실재의 건축 전시가 부재하는 울타리이다. 그러므로 박물관 건축물 자체가 건축 전시가 된다. 건축박물관 건축은 그곳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건축이다. 이것은 건축박물관 건축물이 다른 박물관에 비하여 매우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점이며, 한 건축가가 자신의 창작물로 어떻게 건축 전체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건축박물관은 미술관처럼 절대 ‘화이트 박스’일 수 없다. 건축박물관은 절대 중립적이거나 수동적일 수 없다. 새로 설계된 건축박물관 건축물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게 지어졌어도 경험과 의미의 복합성을 표현하는 데 실패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건축물은 언제나 건축이 거쳐 가는 한 특정 시점을 대변할 뿐이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시작과 함께 건축박물관으로서는 구식이 될 것이다.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을 성공적으로 풀어낸 사례들이 있다. 역사적인 건물을 건축박물관으로 다시 활용한 것이다. 기존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건축박물관으로 전환하고 확장함으로써 건축물, 건축, 건축가, 전시, 관람객 간의 다중적 관계가 형성된다. 전시가 열리지 않을 때조차도 건축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복합성과 전체성은 항상 현존하며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독일건축박물관은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O.M.웅거스가 19세기의 대저택을 그의 유명한 ‘집 속의 집’ 개념으로 증개축한 건축박물관과 칼&막스 두들러가 인근의 20세기 초기의 공장 건물을 개조한 박물관 아카이브와 도서관은 앞서 언급한 의미들의 복합성을 만들어 낸다. 서로 다른 시기의 두 역사적 건물, 다섯 명의 건축가, 역사건축과 현대건축이 표현하는 각각의 네 가지 디자인 철학, 서로 중첩되며 관계 맺고, 새로운 의미들이 추가되는, 건축에 관한 건축과의 심도 있는 대화…

알레한드로 자에라-폴로는 세종시의 결핍된 도시 콘텍스트를 철거되는 고가도로의 일부 구간을 재활용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채우려 한다. 이것은 신축 건물에 역사적인 콘텍스트를 새롭게 구현하는 감탄할 만한 발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콘텍스트를 대체하는 것일 뿐이다. 건축의 이차적 표상을 담은 복제품으로서의 건축박물관은 콘텍스트의 이차적 표상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장소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서울은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을 위한 당연한 장소일 것이다. 서울에는 유진상가나 세운상가와 같은 도시건축의 역사적이며 상직적인 '상가' 건축에서부터, 1세대 또는 2 세대의 아파트 단지, 수많은 노후화된 인프라 건물들 그리고 낡은 산업 지역 전체에 이르기까지 건축박물관으로 개조하거나 확장하기에 적합한 역사적 건물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대전이나 부산은 어떤가? 어쩌면 우리는 박물관의 광범위한 주변 환경을 연결하며, 무엇을 위한 박물관인가에 따라 인근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산형 박물관이 필요한지도 모른겠다. 건축박물관을 위하여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건축박물관을 위한 하나의 단일한 장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건축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의 건축박물관은 무의미하다.     

세종시 박물관단지 안의 어린이 박물관은 건축박물관보다 훨씬 더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세종시 주민들이 건축박물관의 주요 관람객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단지 건축박물관 때문에 세종시로 이주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신도시 안에서 신축되는 건축박물관은 현대의 도시계획과 건축이 실패할 것임을 명백히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북극에서 아이스크림가게를 찾는 것과 같다.  

신도시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건축을 문화 유원지의 한 부분으로 남용하는 것은 거의 모욕적인 일이다. 건축은 문화의 눈속임이 되어 잊힌 채 썩어갈 것이다. '빌바오 효과'는 구조적 변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도시를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빌바오는 이미 뚜렷한 정체성과 의미를 갖고 있던 역사적인 도시로서, 구겐하임 빌바오뮤지엄이 없어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세종시는 먼저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잘못 이해한 빌바오 효과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국립중앙박물관을 세종시로 옮겨서 행정도시로서의 의미적 기반에 연결시키는 것이 세종시에 훨씬 더 유용하지 않을까?

 

이것은 또한 건축박물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살아있는 건축박물관은 미래에 관하여 담론을 펼치는 건축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하여 그 가치를 얻는다. 그러므로 건축박물관의 주요 관객은 건축공동체가 될 것이며, 물리적으로도 이 공동체 안에 위치해야 한다. 살아있는 건축박물관은 교육과 연구의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건축학과 학생들이 거주하고 작업하는 곳에 위치해야 한다.

살아있는 건축박물관은 건축에 관한 추상적 역사를 일반 대중에게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경험하는 건축 환경의 다차원성에 대하여 설명해준다. 따라서 건축박물관은 이와 같은 역사적 복합성이 결여되어 있는 곳에는 자리 잡을 수 없다. 

알레한드로 자에라-폴로가 그의 설계안 전체에 의도적으로 무수한 가짜 역사적 건축물 파편을 배치한 공모 당선작의 렌더링 이미지를 보면 그가 이런 특징 없는 일반적인 장소에서는 의미 있는 담론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역사의 모조된 파편이 만들어낸 경관으로 그는 이 건축박물관이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것들을 매우 단순화하면서, 비전문가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전시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클레멘틴 델리스는 자신의 저서 『The Metabolic Museum (살아있는 박물관)』에서 박물관은 지식을 쌓기 위해 작동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것은 단순한 저장장치이거나 한 방향으로만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다. 박물관 또한 전시에 대한 방문객들의 반응을 통해 지식을 얻고 축적한다. 방문객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도 방문객에게서 배운다. 박물관은 양방향으로 작동하는 아카데미가 되어야 한다. 박물관은 자신의 관람객에게 반응하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전시의 영역과 동등한 관람객의 반응을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제공한다. 이것은 실험실과 같은 박물관이며 건축 담론을 생성하는 활발한 장소이다. 이와 같이 살아있는 지식을 구축하는 장소에 기여할 수 있으며 요건을 갖춘 사람들에게 세종시까지의 짧지 않은 여정을 요구하는 국립박물관은 매우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건축박물관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는가가 궁금해진다.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은 역사로 둘러싸여 있으며 미술관들이 군집하고 있는 한가운데에 의도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상호교류와 시너지 효과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박물관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박물관은 전문가, 기관 및 단체, 실무자 그리고 관심을 갖고 방문하는 관람객 등과 같은 기반이 동반되어야 한다. 성공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의 감성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세종시의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은 건축의 묘비가 될 것이다. 텅 빈 모뉴먼트, 잊힌 기록들을 위한 벙커이다.

간단한 사유 놀이를 해보자. 정치적인 결정으로 인하여 국립현대미술관을 내일 당장 서울에서 세종시로 옮겨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미술계는 즉각적으로 격렬한 항의를 할 것이며, 본 미술관이 왜 소격동에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논거를 들이댈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논거들은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이 세종시에 세워지면 안 되는 이유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계의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건축은 자신의 문화적 중요성에 대한 목소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의사 결정권자의 부정적 영향이 두려워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잠재적인 클라이언트를 잃을까봐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건설산업, 이익단체 그리고 정치,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의 침묵은 건축의 중요성을 더욱 약화시킨다.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이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건축은 소통, 교육 그리고 건축 그 자체의 표현을 위해서 사회에 강력한 표상을 내세워야 한다. 그러나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로부터 단절된 건축박물관은 근본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공론의 장이 이제서야 시작되고 있다. 공모전 당선작이 정해진 후에 말이다. 우리의 기대가 세종시의 석관 안에 밀봉되기 전에 우리 건축공동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먼저 어떤 박물관이 필요하며 어떠한 박물관을 원하는지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이 논의로부터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며, 그것에 적합한 장소는 어디인지 결정하고, 그 다음 현상공모를 시작해야 할 것 이다. 톱다운 방식이 아닌 보텀업 방식으로 말이다.

 


송률
송률은 2001년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건축가로서 학업과 실무를 하였다. 200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수파 슈바이처 송 건축사무소를 공동설립 하였으며, 2003년 ‘에른스트-마이-인스티튜션’과 에른스트-마이-뮤지움’의 창립원으로서 활동하였다. 2005년 수파 슈바이처 송 서울지부를 설립하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에서 2008년까지 설계스튜디오 튜터로 재직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 건축과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주택과 공공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격월간 잡지 「SUPTEXT」의 발행인이다.
크리스티안 슈바이처
크리스티안 슈바이처는199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학업을 마친 후, 2001년프랑크푸르트에서 수파 슈바이처 송 건축사무소를 공동설립 하였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에른스트-마이-인스티튜션과 에른스트-마이-뮤지움의 창립원과 부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2005년수파 슈바이처 송 서울지부를 설립하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에서 2014년까지 설계스튜디오 초빙교수로 재직하였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시공공건축가로 활동하였다. 현재 한양대학교 건축과 겸임교수로도 재직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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