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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 "그러면 ‘당신’은 무엇인가요?"

송률, 크리스티안 슈바이처
자료제공
에이오에이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진행
이성제 기자
background

“하지만 난 미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앨리스는 주장했다.

“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미쳤거든. 나도 미쳤어. 너도 미쳤고.” 고양이가 말했다.

“내가 미친 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너는 분명히 미쳤어. 미치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테니까.” 고양이가 대꾸했다.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865

 

서재원과 이의행은 쉽게 읽히는 건축을 하지 않는다. 이들의 작업을 논리적으로 풀이해보려는 과정의 길목마다 이들은 함정을 파놓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함정은 다음과 같은 뻔한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도대체 2019년 현 시점에, 그들은 왜 이러한 포스트모던 스타일처럼 보이는 건물을 짓는 걸까?” 그런데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패러다임에 완전히 젖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재현과 외형에 관심을 쏟는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뿐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품은 ‘오리(duck)’인가, ‘장식된 헛간(decorated shed)’인가?”, “이들은 한국의 다세대주택을 노골적으로 연출한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인 다세대주택을 도상으로 치장해 건축적 의도를 한국적으로 표현하려던 것인가?”, “이들은 현 상황에 대해 반어적 기법을 구사하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풍자를 하려던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이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진심이긴 했던 것인가?” 이 같은 질문들을 계속 붙들고 있다 보면, 그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해온다.

 

단순한 분석으로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의 작업은 그 이면에 보다 광범위한 이론적 배경이 있음을 암시한다. 만약 어떤 작업이 하나의 건축물임을 넘어서 특정 이슈와 비평적 관계를 형성한다면, 그 건축물 자체는 직접적인 비평에서 자유로워지게 된다. 이는 마치 퍼즐 조각 같아서, 작업을 낳은 사고 전반을 들여다보았을 때 풀리는 것이지, 절대 ‘그 자체’만으로는 이해될 수가 없다.

서재원과 이의행은 한국적 상황에 대하여 매우 독특한 이해가 담긴 여러 편의 글에 자신들의 생각을 담아냈다. 이들은 급격한 현대화, 예측 불가능성과 파편화, 이질성, 자본주의의 명암이 빚어낸 역설적 잡종 사회, 키치와 초현실주의 등을 언급하며 놀라운 결론에 다다른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현재의 한국성을 건축 언어로 담아내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건축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닌, 현실을 반영하는 주요 도구로 생각하려 한다. 이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건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건축가들의 망상과 그들의 고질적 낙관주의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건축의 위치를  결책(solution)에서 비평도구(critique)로 이동시킨다.

“그렇다면 이들은 비평을 건축하는가?” 이 질문에도 역시 가부를 따지기가 쉽지 않다. 이들은 한국 고유의 사회-문화적이고 사회-정치적인 복합성(complexity)에서 그들만의 복합성을 빚어낸다. 즉 의미의 복합성이라든지 자가당착의 복합성 또는 해석의 복합성 등을 말할 수 있다. 이들은 건축을 그 자체로 완성된, 고정된 상태로 행하지 않으며, 여러 요인이 결합되는 열린 것으로 행한다.

이들에게 비평은 이러한 여러 요인들 중 하나인 것이다. 이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실에 비판을 가하는, 두 가지 태도 모두를 포용하는 ‘비판적 수용(critical acceptance)’을 이용한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흔히 느끼는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우리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지만 건축 담론에서는 흔하게 외면되곤 한다. 우리는 이 이중성을 통해 일상에 내재한 복합적인 정신적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성적으로만 대하거나 혹은 여기에 거리를 두고 관찰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빠져들어 그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사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홍은동 남녀하우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위치한 남녀하우스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건물의 첫인상은 조용한 주거지에 위치한 아담한 주택으로 아직 자녀가 없는 젊은 부부가 살기에 알맞아 보인다. 서재원과 이의행은 현대사회에서 젠더에 관한 관점이 변하는 것을 견지하며, 여주인을 위한 전면 파사드와 남주인을 위한 후면 파사드로 각각의 젠더 차이를 구별 짓는 외관을 설계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아담한 외관은 좀 더 깊은 이슈를 내포하고 있다. 이들은 평등하면서도 통일성을 갖춘 혁신적인 평면을 설계하여 외관과 대비되는 젠더 이슈를 투영하였다. 이 주택은 복도가 없고, 서로에게서 프라이버시를 확보할 수도 없으며,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수직으로 된 하나의 실이다.

공간은 1층부터 4층까지 연속적으로 흐른다. 거주자가 특정 기능을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이 배우자가 잠든 상황에서도 그를 지나쳐 가고, 교류하고 ‘소통’해야 한다. 차이, 개성, 평등, 함께 함, 그리고 이러한 역설 속에서의 일상 공유 등 여러 개념들이 중첩되면서도 동시에 각각 표현된다. 단순해 보이도록 하면서도 그 많은 의미의 복합성을 이렇게 작은 건축물에 채울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특별한 능력이다. 이것은 문제 해결보다는 비판적 수용을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해결책은 단순화를 수반하기 마련이며, 이는 가능성들을 자르고 덜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반면 비판적 수용은 동시적으로 중첩된 다수의 가능성들이 존재할 자리를 마련해준다. 

서울에 위치한 망원동 단단집 또한 앞선 프로젝트처럼 급진적이다. 이 작업에서도 건축물은 한국의 일반적인 다세대주택처럼, 주차를 위해 1층을 필로티로 비워놓았으며, 파사드는 단조롭게 뚫려있다. 최대한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지어진 닭장형 건물을 참고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건축가들은 이러한 생각을 곧바로 반박하고 해체해버린다. 머리카락 무늬가 숨어있는 붉은 타일 면에서 섬세한 물성은 평평한 파사드에 깊이를 더한다. 무거운 타일로 마감된 감춰진 출입문은 바깥 벽과의 경계를 흐리며, 닫혔을 때 번잡한 바깥 공간으로부터 프라이버시가 확보되고 보호받는 듯한 느낌을 즉각 전해준다.

평면에서 각각의 유닛은 그 자체로 한정된 면적 내에서 최선의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곁가지 기능들을 엮어내는 사려 깊은 공간 배치는 이 기능들을 주 공간과 중첩시키며 공간 경험을 풍요롭게 한다. 또한 이렇게 중첩된 공간에 배치된 창문은 주택 안쪽 깊숙한 곳까지 빛이 유입되도록 한다. 침실은 유리블록 면을 넘어 주방으로 확장되는 듯하고, 천장 실링이 설치되지 않은 거실은 거대한 여닫이문과 대리석 기둥에서 느껴지는 차별화된 물성과 어우러지며 주방에서 침실로 전이가 일어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장치들은 공간이 흐르도록 하여 건물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다. 이는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서울의 일반적인 주거 공간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그에 반하는 명제를 제시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논점은 ‘이러한 공간들이 서울의 일반적인 공간과 얼마나 다른가?’가 아니라, ‘일반적인 공간도 얼마나 좋은 공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앞서 말한 정교한 디테일들은 이들이 평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노력했는지, 건축에 서울의 일상성을 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말해준다. 서재원과 이의행의 작업 프로세스는 이들이 반어적 기법이나 풍자에 관심이 없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이들은 용적률 게임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그 ‘최대한도’의 용적을 동시대적 건축으로 표현하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요구되는 본질적인 것들을 찾으려 할 뿐이다. 이들의 끊임없는 평면 테스트는 기능의 최적화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기능의 질에 대한 최적화를 찾기 위함이다. 가장 적합한 물성과 표현을 찾기 위해서 파사드를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린다. 실내 가구까지 표현된 거대한 1:20 건축모형에서는 밖에서 바라보는 내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바라본 바깥세상으로 우리의 일상을 그린다.

이토록 끈질긴 실험 끝에 탄생한 건축물은 결과물이라기보다 과정 그 자체가 된다. 건축은 우리를 담아내거나 우리가 바라볼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동등한 존재가 된다. 미국의 모더니즘 화가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어법을 빌리자면, “당신이 건축에 반응한다면 건축도 당신에게 반응할 것이다. 당신이 건네는 만큼 당신도 건축으로부터 얻게 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과 건축 사이에서 타협하게 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것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살아있는 존재라면, 건물 역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될 것이다. 건물은 다른 무엇인가를 재현할 것이다. 당신 역시 그럴 것이므로. 당신도 역시 공간이기에!”

 

제주 쌓은집

 

제주 쌓은집은 이들의 작업 중에 아마도 가장 읽어내기 어려운 작품일 것이다. 이 건물은 한국 건축가들이 품고 있는 ‘한국다움’에 대한 환영의 토끼굴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를 키치나 ‘맥락 없음’으로 치부하기 쉽지만, 우리는 즉각 무슨 근거로 이런 판단을 내리는지 스스로 질문하게 될 것이다. 건축가들은 건축과 자연 사이에 관하여 전통적인 한국적 관계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한국 본연의 정체성을 추출해보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관계성은 존재한 적이 없었거나 상실된 과거를 낭만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가 ‘상실했다’는 말의 의미를 분석하지 않는 한, 정말 ‘상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했다는 간편한 가정이 있는데, 사실 자연과 같은 것은 없었다. 자연이란 머릿속에서 구성된 지적 산물로, 단지 나날의 그리고 순간순간의 일상을 통해 ‘자연의 느낌’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이는 결단코 이상화된 과거와는 무관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시대 한국 도시의 평범한 일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실한 것’을 떠올리느라 실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을 구축하지 못하는 셈이다. 제주도에서의 건축적 맥락은 자연도 아니며 한국적인 것도 아닌 시간과 환경 조건이 만들어낸 일상성일 뿐이다. 제주 쌓은집은 자연과의 허위적인 관계를 떠올리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다. 쌓은집은 오늘날 한국인의 정신성과 메커니즘에 관한 비평을 펼쳐놓은 것이다. 그러함과 동시에 이들은 이러한 비평을 유발시킨 정신성과 메커니즘으로는 발전시킬 수 없었을 거주의 높은 질을 쌓은집에서 구현하였다.

문제해결과 비판적 수용을 구분 짓는 마지막으로 남은 관건이 있다. 건축가 자신의 ‘자기인식’이다. 사회적이고 인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일반화하고 객관화한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보다 고귀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환영의 나락으로 빠지곤 한다. 그러나 어떤 것도 되고 싶지 않은, 무엇과도 연관되고 싶지 않은, 무엇도 표현하고 싶어 하지 않는, 본질적으로 기능도 없으며, 경제적인 수명도 상관없으며, 건축주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가치가 없는 한국의 사회/문화 콘텍스트에서 우리는 대체 어떻게 건축을 디자인 해야 하는가? 그 어떤 곳에서보다도 서울에서 건축가들은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있다. 그들의 작업을 위하여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자신 스스로밖에 없다. 자신의 가치관, 자신의 윤리의식,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 이것들만이 그들 작업의 평가기준이 된다. 서재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건물은 공공적이라 할지라도 건축은 건축가 자신이 스스로 규칙을 만들면서 나아가는 아주 내밀한 주관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 

서재원과 이의행의 건축은 의도적으로 주관적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의 작품은 보편적이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전략을 취할 수 있도록 어떠한 유형을 생산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건축가란 홀로 활동하는 작가로서 결과는 오롯이 사회를 향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건축은 개인적인 과정으로 여겨져야 하며, 생각의 복합성과, 의미의 중첩 및 균열을 필요로 한다. 건축은 이 사회에서 가치를 주장하기 위한 도구로써 비판적 수용을 포용하여야 한다.​


송률
송률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스쿨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건축가로서 독일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실무를 익혔다. 200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수파 슈바이처 송 건축사무소를 크리스티안 슈바이처와 공동설립 했으며, 2005년부터 현재까지 수파 슈바이처 송 서울지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에서 설계스튜디오 튜터로 재직한 바 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건축과 겸임교수이며, 격월간 잡지 「SUPTEXT」의 발행인이다.
크리스티안 슈바이처
크리스티안 슈바이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스쿨에서 학업을 마친 후, 건축가로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실무를 익혔다. 200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수파 슈바이처 송 건축사무소를 송률과 공동설립 했으며,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에른스트-마이-인스티튜션과 에른스트-마이-뮤지엄의 공동 창립자이자 부관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에서 2005년부터 2014년까지 설계스튜디오 초빙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현재 한양대학교 건축과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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