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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사이버 토크: 여성, 미래 건축문화의 중심에 있을 것인가?

자료제공
「SPACE(공간)」 419호

2002년 한국여성건축가협회(KIFA)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SPACE(공간)에서는 여성건축가 특별 기획을 마련했다. 특집은 건축가 대담, 여성건축가 에세이와 여성건축가들의 작품을 건축디자인 입장에서 바라본 비평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우리 건축 사회에서 여성건축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들이 전문직능과 그 집단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문제와 그 해법은 어떻게 진단하고 있으며, 여성건축가들의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최근 사회 전반의 화두인 성평등 문제에 관한 논의가 건축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 움직임을 조명하여 동시대 여성건축가의 이야기를 확인하기에 앞서 2002년의 대담을 돌아보고자 한다. 1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성건축가들이 스스로 바라보는바, 또한 여성건축가가 마주하는 우리 건축문화가 얼마나,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함께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것이다. 

 

본지가 여성건축가협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마련한 좌담회는 참석자 모두가 일시에 한 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방식에서 벗어나 인터넷 온라인상에서 이뤄졌다. 이는 참여의 폭을 넓히고 대화 공간의 제약에 따른 한계를 극복한다는 대화 형식상의 문제와 함께 대화를 글로 읽어 행간의 의미와 앞뒤 대화의 문맥을 헤아림으로써 대화의 깊이를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번 사이버 토크에는, 우선 여성건축가협회를 이끌어 온 1세대 건축가들과 요즘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후 세대의 건축가들 그리고 건축 안팎에서 ‘여성’건축, 건축가에 용기를 주기를 기대하고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남성’들 몇 분을 참여자로 모셨다. 이번 좌담회는 대화를 통해 논의할 수 있는 의제를 미리 제시하고, 특별히 대화를 주도하는 사회자 역할은 가능한 한 축소하여 자유로운 대화가 이뤄지도록 했다. 여기 실린 대화 내용은 지면관계상 요약 정리된 것이다.

 

참석자: 김인숙, 박완기, 박철수, 이명주, 이선영, 이재림, 지순, 정유정, 최승원, 한지숙

 

▷ 대화일정: 2002년 8월 27일 ~ 9월 10일

▷ 대화장소: 공간 웹진 vmspace 사이버 토크방

▷ 대화의 줄기들

- 우리 사회에서‘여성으로 살기’는 당사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 여성성과 위상에 장애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 여성성(외연: 페미니즘)과 여성의 위상(내포: 비교/평가)은 서로 관계가 있는가?

- 여성과 사회, 우리 건축계에 담론으로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인가?

- ‘건축과 여성’은 인접 분야 문화예술계의 경우와 특별히 다른 것인가?

-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건축은 있는 것인가?

- 건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유리 혹은 불리한 경우는 있는가?

- 여성건축가들간의 조직적인 의사소통 구조는 필요한 것인가?

- 우리의 시대성을 반영하는‘한국적’인 여성건축가상은 어떤 것인가?

- 여성이 미래 건축문화의 중심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김인숙: 지난날 얘기를 하나 하지요. 제가 주택공사에 근무하던 시절입니다. 아파트 설계를 하면서도 금기시된 현장을 갈 수 없어 하루는 용기를 내 현장에 나가는 직원을 졸라 몰래 따라가게 되었답니다. 물론 변장을 하고, 머리를 말아 올려 모자를 깊이 쓰고 현장 작업복을 입구요. 그러나 조금 있다가 들키게 되었고 미장일을 하던 인부가 "어쩐지 간밤 꿈이 사납더니 재수없게." 하면서 일하던 도구를 내던지고 현장을 나가 버리더군요. 여성들이 일하는 여건은 좋지 않았지만 오기가 발동하고 더욱 일벌레처럼 노력할 수밖에 없더군요. 이제는 건축 영역도 넓어졌고 또 여러 부분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의 시각보다는 부분별 전문성이 요구되어 본인의 적성에 따라 얼마든지 어울려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봅니다. 정치성이니 페미니즘이니 하는 단어는 관심없어요.

 

이선영: 교육 현장에 있다 보면 건축과 여학생은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처럼 더이상 화젯거리가 될 수 없다는 느낌과 여전히 실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20년 전처럼 남다른 각오로 일해야 한다는 두 가지 상반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서구사회에서는 발전적인 해체소식들이 들려오는 여성건축가협회가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건재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그것보다는 왜 '여성건축가'라는 타이틀이 여전히 존재해야 하는가에 의문을 갖습니다. '여류' 운운하는 시대가 더이상 아닌데 이러한 타이틀을 계속 고집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이들을 '주류'에 넣기를 망설이는 이상한 고집이 있지 않나 의심을 합니다.

지금 현장에서 뛰고 있는 많은 예비 여성건축가들이 반가워해야 할 역할 모델은 소수의 스타시스템에 합류한 유명한 '여성건축가'가 아니라 전문가의식으로 무장된 그냥 건전한 건축가일 것입니다. 항상 '열외'에서 특별대접 받으며 뛰고 있는 스타 '여성건축가'는 당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고 이는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가이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현실에서 건축계는 더이상 '여성건축가'라는 명분으로 다양한 잠재력을 가지는 예비건축가의 의욕을 꺾어서는 안 되겠지요.

 

최승원: 제 경험담을 이야기하자면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고 하는데 저는 일의 범위가 넓지 못해서 작은 주택에 주력했습니다. 제 손에 들어올 수 있는 일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택이 기초가 된다고 믿고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스트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현장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색채 디자인에서 집사람이 참여하는데 색이 쓰리 톤 정도 나왔습니다. 그러자 현장 감독은 복잡하니까 귓속말로 “이러면 최승원의 디자인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라며 견제를 했습니다. 저는 같이 사는 집이고 스튜디오이기에 의견을 참고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힘들면 소주라도 한 잔 살 터이니 지시대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현실로 부딪히는 일들입니다.

 

이선영: 몇년 전 미국건축가협회 회장으로 여성이 선임되었던 것이 하나의 상징적 사건은 되었으되 정작 미국의 여성건축인 전반에 대한 차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사실도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전, 우리 건축계로 넘어와서 특히 요즈음의 정치상황에서 '여성할당제'의 색깔을 갖는 일련의 일들이 여성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전국을 통틀어 열손가락 안에 드는 여성교수들이 각종 심의위원회에 30%라는 할당제 때문에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일로 위촉대상이 되어 이를 고사하느라 힘든 일부터, 공문에 버젓이 '여성위원은 자격요건을 낮출 것'이라고 써있는 일, 결국 찾고 있는 여성인력은 키워 놓지도 않고 이제와서 자격미달인 사람을 위원회에 불러 앉혀 놓고 여성들은 기회를 주어도 잘 못한다는 식의 케이스를 만드는 일까지 우리나라 건축계는 '여성' 컴플렉스를 겪고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순

1935년생.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일양건축연구소 대표, 연세대 주거환경학과 교수 역임. 현재 (주)간삼종합건축사 사무소 회장.​

김인숙

1945년생. 연세대 건축공학과, 동대학원 졸업. 대한주택공사, 효성드라이비트 등 근무. 1997년부터 2001년까지한내엔지니어링. 현재 (사)한국여성건축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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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숙: 현재 미국에서는 60초에 한 명씩 여성이 회사를 설립한다고 합니다. 여성 사업주는 약 900만 명을 능가하고, 이 수는 전체의 38%에 해당하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비교하여, 과연 건축 분야에서는 여성의 전문활동 비중이 어떤가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의외로 미국에서조차도 여성의 전문활동 비중이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예로, NCARB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 건축 전문대학에서 여학생의 비율은 평균 42%라는 놀라운 수치이지만, 막상 학교를 마치고 회사에서 자격증 건축가(Licensed Architects)로 일하는 여성은 불과 10%가 안 되며, 여성 AIA Membership도 9%, 여자 교수는 20% 정도라고 합니다.

지금 현실은 여성들이 자신의 전문 영역을 지키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적인 제약을 논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성건축학도, 여성건축인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야겠다는 강한 열정을 가져야 하며, 시대적 사명의식 하에 우리의 역할을 다시 한번 자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명주: ‘공간’의 사이버 토크에 초대받고, 저를 여성건축가라고 생각하신 이주연 주간께 당황스럽다는 내용의 답장을 쓴 적이 있습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건축을 공부하는 동안 그리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극히 개인적이지만, 여성이었기에 부당한 대접을 받지 않았었고, 건축분야 동료들 사이에 동화되거나 중성화되면서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 '여성' 건축가가 되어야 하는가? 어떤 입장이 되어야 하는가는 차후 문제였습니다. 단지 고백하기도 부끄럽게도 지금껏 수많은 건축가들에 대한 행적을 배워 오면서도 여성건축가들의 발자취에는 너무도 무관심했었던 사실과, ‘위대한 여성건축가는 있었는가?’라는 자문에 답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이 토론이 자아발전의 계기가 되리라 여기며, 여성건축가들의 활동사항이 담긴 책과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틈틈이 그 자료들을 탐독하며 느낀 점으로는 제가 지금 건축분야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최승원: 자하 하디드에게 CNN 기자가 질문한 내용입니다. 여성건축가로서 큰 활동을 하시는데 남성 중심 속에서 애로 사항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이 도와주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여기에도 성(性)의 협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TV 심야방송에서 보았습니다. 성공하신 분들 중에 부부가 같이 공부하고 같이 건축을 하는 분들이 여러 분 계십니다. 성(性)의 협력이 경쟁력이 있어 보입니다. 한 건축가가 신건축 공모전에서 수상되었으나 이름표가 없어져 후에 수상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작품성은 다르더라도 성의 협력이 이루어낸 국제적 경쟁력의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공시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재림: 우리는 태어나면서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테두리를 갖는다고 봅니다. 여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는 남자의 영역이 있듯 아마 남자분들로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여성의 세계가 존재하리라고 봅니다. 사회적 욕구와 시대흐름에 따라 그 폭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이와 같은 차이점에 의해 언제나 오해는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서로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는 것, 즉 안과 밖을 뒤집는다는 것이 사실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언급하고 싶어서입니다. 심의위원의 일정 수가 여성이어야 하고, 전문가로서의 경력이 다소 미흡해도 위원직을 주는 것이 여성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에 동의할 여성건축인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겠으나 역으로 자신들의 주요 역할을 여성들에게 흔쾌히(?) 내주었는데 매일 불평만 한다고 투덜대는 남성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진심을 몰라주는데 대한 불만인지 아니면“그것 봐라”하는 야유인지 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 모든 일에 단정적이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 판단도 결국은 내 한계 속에서 결정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새삼 조심스러운 부분도 생기더군요. 여성과 남성의 문제는 오랜 시간이 투여되고 거듭된 시행착오 속에서 차차 정착되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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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원

1945년생. 홍익대 건축학과, 동대학원 졸업. 최승원 건축작품전(1986), 최승원의 여름명상, 신영옥의 여름바다 전(2001) 개최. ARCASIA 건축상 골든메달 수상(1998). 앙가주망건축사무소 대표, 성균관대 겸임교수.​

박철수

1959년생.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학사, 석사, 박사학위 이수. 현재 대한주택공사 연구위원. 주요 저서로『한국 공동주택계획의 역사』, 『소설속공간산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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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수: 두 가지 상반된 얘기를 하죠. 먼저 제 딸아이에 관한 얘기입니다. 건축가 승효상이 TV에 나온 것을 본 후 딸아이에게 그와 같은 건축가가 되는데 혹시 어려움이 없을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토론에 어떻게 해서든 글을 올려야 하는 아비의 절박한 심정을 알지 못하는 아이는 질문의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아주 가볍게 말하기를 자신이 노력하면 그분보다도 훨씬 더 유명하고 재능있는 건축가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더군요. 이제 작가 김형경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라는 이름의 소설은 “유년의 기억이 과연 성년의 정신세계와 활동을 지배할 수 있는가”라는 정신과학적 물음을 독자에게 던지는 동시에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정신분열적인 상황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는 단정에 가까운 전제를 설정하고 서른 일곱의 동갑나기 '인혜'와 '세진'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김형경의 소설에서 얘기되는 '결핍'이나 남들로 인해 만들어진 '단단한 외곽' 혹은 '굴레'는 앞서 글을 올리신 이재림 선생의 '테두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겠지만 저는 이번 대화를 한 곳으로 모아가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지숙: 상대적이긴 하지만 미국에서도 일하는 여성에게는 남성보다 가사나 출산, 자녀 양육 등의 과중한 부담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저도 출산과 육아 문제 때문에 그 동안 꿈꾸던 건축의 길을 접고 중도에 포기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마 고학력 여성들의 대부분이 저와 같은 일을 경험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건축을 다시 하겠다는 의지, 동반자의 지지 등이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공백기를 갖고 다시 사회로 나오는 저를 미국사회는 큰 어려움 없이 받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도 하루 빨리 인간 특히 약자에게 불리한 제도와 법률을 수정·보완하고, 여성단체 중심의 인간운동이 대중화되고, 남녀 평등의식이 더욱 확대되어 여성에 대한 의식이 여성 스스로는 물론이고 나아가 남성들에게도 인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선영: 책 하나가 생각나는군요. Annmarie Adams가 쓴『Designing Women』이라는 책인데 미국이나 캐나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여성건축가의 숫자가 왜 적은가를 여러 데이터와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 것입니다. 이미 핀란드의 경우는 1980년대 초에 여성건축가가 전체의 1/3이나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건축가로 크기 위해 거쳐야 하는 교육과 수련기간, 면허시험까지의 기간과 절차가 험난한 나라일수록 여성건축가의 숫자가 적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그래도 제도적인 보완이 마련되어 있어서 Affirmative Action(소수민족 보호정책)이 여성건축가가 자리잡는 데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공부분의 일을 항상 주어진 비율만큼 여성을 포함하여 Minority에게 할당되도록 한다는 것이 언뜻 들으면 역차별처럼 들리지만 실적이 없어서 시작을 못하는 쪽을 배려한다면 나중에 실력이 되지 않아 중도에 탈락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일어나므로 적어도 비스듬히 출발하는 육상 트랙처럼 출발선상의 불평등은 교정을 해주는 제도로 보입니다. 한지숙 씨의 이야기처럼 드러내놓고 차별을 못하도록 하는 전문가사회의 분위기도 중요하겠지요.

 

지순: 건축생활을 통해서 남녀의 성차별을 논하기 전에 남녀의 차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점을 얘기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 정보화, 자동화 시대로 접어들자 여성(주부)을 구속했던 가사 기능과 구조, 육아, 탁아의 남녀 공동분담 등 과거의 사회인식 구조가 바뀌고 가족 체계의 변화가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는데 아직 남성의 일반적 의식구조는 건축설계에 몰두하거나 사회활동을 하는, 혹 가정을 내동댕이친 불량주부로 보는 시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성보다 여성 스스로가 시대 변화를 인식하며 지혜롭게 가정과 직업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없이 평가절하하며 자조적 의식을 갖는 것은 더욱 한심한 것이지요. 남성과 공동협력하는 시대에도 변할 수 없는 남성과의 신체적 조건과 인간 생산의 귀중한 하늘의 섭리를 어길 수는 없지요. 그 중요한 기간을 어떻게 넘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성으로서 남성과의 차이는 생리적 차이며 차별화될 수는 없지요.

 

정유정: 저는 현재 일본 도쿄에서 건축사로 건설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역시 여성으로서 사회에 진출해서 계속 직업을 유지한다는 것은 건축분야뿐만 아니라 타 분야에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합니다. 법률이나 제도적으로 본다면 일본은 아마도 미국, 유럽보다는 미흡하지만 한국보다는 비교적 제대로 정비되어 있는 정도일 겁니다. 1986년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 시행되면서 차차 여성의 전문활동가 비중이 커지고 그에 따라 결혼, 출산, 육아 등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기반, 환경이 조금씩 갖춰지고 있는 듯합니다. 제 자신이 출산과 육아 휴가를 약 14개월 지내고 복귀했지만 모든 여성들이 그러하듯 엄마로서 아이와 항상 함께 있고 싶은 마음과, 하지만 쉬고 있는 이 순간도 나 혼자 점점 뒤떨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것으로 내 자신의 사회성은 집 테두리 이외에 소멸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여성건축인이 중도하차하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고비를 어떻게 넘기는가에 따라서겠지요. 마침 저는 동반자가 건축설계하는 사람이고, 많은 자극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기에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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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기

1964년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수원경실련 사무국장, 경실련 경기도협의회 사무처장을 거쳐 현재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사무국장 겸 지방자치국장으로 재직중.​

이재림

1960년생. 한양대 건축공학과 및 대학원 졸업. 현대산업개발, 에머럴드 근무. 1993년부터 지담건축사사무소 대표. 현재 (사)한국여성건축가협회 이사 겸 홍보위원장, 서울건축사협회 간사 등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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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순: 건축계의 여성차별문제가 거론되는군요. 그래서 저도 이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저는 현재 간삼건축의 파트너 건축가이며 건축설계와 감리를 책임있게 수행하는 조직으로 발전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백수십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중 여성은 현장감리직과 관리직 이외의 기획연구 설계직의 약 30%가 되는 구성원입니다. 해마다 여성인력 증가 추세가 두드러집니다. 저도 결혼 전에 개인설계사무소에서 주말 휴식도 없이 늦도록 설계 작업하다 통행금지 시간에 쫓기며 퇴근, 귀가하면(서울올림픽 이전까지는 밤12시부터 새벽4시까지 야간통행금지) 아버지께서“빠-걸처럼 늦게 다닌다”고 혼을 냈지요. 부득이 시간제로 일할 수 있는 관청근무 환경을 찾아 주택영단(주택공사 전신)으로 옮겼으나 설계근무는 예외없이 쫓기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때는 여성을 위한 노동근무 규정도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고 남성세계에 끼어 든 소위‘홍일점’으로 주목받는 흥미 대상일 뿐이어서 과연 건축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인식이었으므로 여성인 저로서는 남성보다 낙오되지 않고 오히려 책임있고 충실한 결과를 보여주겠다는 인내와 고집이 지속되면서 생활의 흐름이 된 것이 되새겨집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동료의식을 갖는 뜻을 같이하는 남성건축가도 많이 알게 되고. 부부가 협력할 수있는 건축인생을 펼쳐왔습니다.

 

이재림: 우리네 현실에서 여성으로 가정을 꾸려 나가며 일을 한다는 것, 그것도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건축분야에서 전문인으로 자리매김하기란 사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기에 올려지는 글들의 대부분이 건축환경 내에서 여성이 겪게 되는 차별과 중도탈락의 문제 그리고 아이들의 양육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보면,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역량을 집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즈음에 우리 여성건축가협회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명주: 한국여성건축가협회의 위상과 역할에 관하여 많은 분들이 귀한 의견을 제시하시는 동안, 독일에서 문헌을 통해 독일 여성건축가들에 대한 활동 사항을 접하고 있는 저는 독일 여성건축가들의 활동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81년 독일 건축전문잡지 아흐풀루스(Arch+) 60호는, “그 어디에도(여성들을 위한) 장소(Orts)는 없다. - 여성 공간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특별 호를 발행하였으며, 그 후의 행사들은 바로 1981년 Arch+의 내용에 그 구심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예로, 도르트문트 FOPA 전시회였던, ‘도시 내에서의 여성’(Frauen in der Stadt)(1985, katalog 1987)과 1989년 3월 라움플란눙(Raumplanung, Nr.44호) 잡지에서의 '여성중심'(Frauenschwerpunkt) 그리고 1991년 '여성, 계획, 건설, 거주'(Frauen, Plan, Bauen, Wohnen)의 카탈로그나 전시회 등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20년이 지난 오늘, 여성들의 관심사는 페미니스트적인 범위를 넘어 모든 면에서 주제화되어 있고, 또한 경영과 학문분야에서도 여성들의 요구와 진출을 적극 권장하는 연구소가 체계적으로 그 하부단위에서 조직화되어 있습니다.

 

김인숙: 각자의 위치와 각 나라의 입장은 천차만별이겠지만, UIFA(Union International Female Architect) 총회에서 만나는 세계 여성건축가들의 공통적인 대화는 "너희 나라는 여성건축가의 대우가 어떠냐"입니다. 이명주, 한지숙, 정유정 씨의 글에서처럼 법적으로 제도화하고 보호해 주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부딪치는 건축이라는 테두리는 여성이 이겨내기가 쉽지는 않나봅니다. 일본 여성건축가 몇 분이 우리 협회를 방문하고 싶다고 합니다. 일본 여성건축가의 사회적 인지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고 인정되어 이웃나라인 한국, 그리고 미국과 영국을 방문하고 자료를 모아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함이라고 하네요. 그들과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여성건축가협회에서는 여성으로 4년제 건축과 졸업생은 모두 입회할 수 있는 자격을 주며 회원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갖고 있습니다. 출산을 위해 잠시 쉬는, 또는 중간에 잠시 작업을 중단한 회원을 위해 교육, 또는 현장견학, 원로 건축가와의 만남이나 강연 초대 등, 그외에도 여러 가지 모임을 갖습니다. 대민사업의 하나로 오랫동안 진행해온 무료 건축 상담에 자원 봉사자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라든지, 전문인이 되는 과정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결혼이나 출산으로 작업이 중단되더라도 다시 자기 길을 가는 과정에서 고민을 덜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다른 건축관련 협회에는 없는 것들이지요.

 

이명주: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이분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성세대는‘모범여성’과, ‘모범남성'을 흑백 논리화하면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왔습니다. 그 안에는 돌연변이처럼 여성의 남성화, 남성의 여성화로 삶을 끌어가는 여성들과 남성들이 있었고, 그들이 하나의 인격체로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도덕과 제도를 상대로 외롭게 싸워야 했음 또한 신문지상을 통해 보아왔습니다. 평등한 제도로 개편하기 위하여 다방면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이 시기를 상호간의‘양보’와‘격려’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건축가협회가 전문분야에 당당히 전문 여성건축인을 추천할 수 있는 단체가 되고, 건축과 여학생들에게 미개척분야에 대한 논문을 쓸 수 있도록 격려하는 단체가 되며, 또한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들이 직위고하를 떠나 능력과 경륜으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도와준다면, 단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참여도는 한층 더 높아질 것이며, 시민과 사회가 단체를 신뢰하는 인지도 또한 강해지리라 믿습니다.

 

이재림: 이번 기회에 여성건축가협회에서 국내 여성건축가들에 관련된 정보를 재정리하고 외국에서 활동하는 여성건축가들을 파악하여 상호간의 정보교환을 위한 채널을 구축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외국의 여성건축가들과의 교류도 활발해질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건축문화의 선진화를 도모하는 새로운 기회 제공의 한 방법일 것입니다. 작년 세계여성건축가협회 총회에 참석했을 때에도 느낀 점입니다만, 아시아권의 여성건축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현장 뿐 아니라 공직에도 여성들이 많이 포진함으로써 여성건축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제교류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부분인 것 같아 예로 들었습니다.

협회의 존재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척박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우리 현실에서는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그간의 협회 역할이나 활동에 대한 비판과는 무관합니다. 압력단체까지는 아니어도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서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의 경우 앞으로 여성건축인들의 수가 급증할 것이므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제도적 장치도 시도해봄직 합니다. 사실 이 제도는 예산이 집행되고 실행이 전제된 것이기 때문에 심의나 심사에서 일정 비율로 위원 수를 확보하는 것과는 본질을 달리합니다. 따라서 기존 체제의 반발도 심할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건축인들의 자질도 검증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건축문화를 생각해봅니다. 운 좋게 또는 든든한 배경이 있어 이를 피해가는 여성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런 현실에 맞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차제에 이와 같은 혼탁한 건축의 풍토를 우리 여성들이 나서 보다 투명하게 개선할 방법은 없을지 생각해봅니다. 우리 여성건축인들이 또는 협회가 주체가 되는 건전한 건축문화 운동은 어떠할지......요란한 구호나 공허한 외침이 아닌 우리의 생활을 파고드는 진정한 의미의 건축문화 운동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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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숙

1960년생. 한양대 건축공학과와 오하이오주립대 건축과 대학원 졸업. SchofildDesign Group, Elite Construction Inc.,Edmond Hakimian P.E.근무, 현재 뉴욕 Robert E. Levien & Deliso P.C.에서 활동.​

이선영

1962년생. 서울대 건축공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캘리포니아대 석사학위 이수. 미국 Prairie View A&M University(Texas A&M University System) 건축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시립대 건축도시조경학부(건축학 전공)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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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숙: 우선, 미래건축을 선도하는 여성단체를 구심점으로 하여 많은 여성건축인들이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여성단체의 결집을 통하여 최신의 지식과 정보를 쉽고 가깝게 접하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과 의미를 함께 나눈다면 현 시대가 요구하는 여러 복잡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고 여성건축인의 권리와 주장도 펼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미래 건축문화에 우리 여성건축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주요한 테마 중 하나는 소외계층 특히 어린이, 노인, 장애인 복지를 향한 주거문화입니다. 다시 말해 각자를 위해, 서로를 위해 더 나아가 세대통합을 위한 주거문화 창조에 우리가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단체가 아닌 여성건축가 각 개인의 의식 변화와 능력​ 계발이라고 봅니다. 여성건축가들은 프로근성을 갖고 좀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며 전문영역을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선영: 알게 모르게 여성에 대한 선입견은 여전히 건축분야에 여성의 진입을 힘들게 하고 있지요.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혼자서 고군분투합니다만 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지요. 아직도 여성건축가협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여성관련 단체가 우리나라에서 해체되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전, 이런 이야기로 정리를 하고자 합니다. 선진국형의 건축설계는 결국 건축에서의 여성성을 증대시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미국의 영향력 있는 여성건축가가 20여년 전에 제기한, 건축에서의 성과 관련된 이분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제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여성건축가는 남성건축가의 기념비적 건축과 여성건축가의 미로형 건축을 대비시켜 논의를 전개하였는데 저는 오히려 이러한 이분법보다는 건축이 가지는 양성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이러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일에 여성들이 적극적이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흔히들 여성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건물이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며 공공성을 더 많이 띠고 사용자를 배려한 것이 많다고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친환경적이라고 평합니다. 21세기에 진입한 현 상황에서 볼 때 이러한 이슈들은 단지 설계자가 여성이어서 부각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건축의 중요한 패러다임의 변화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최승원: 미래를 보기 위해 1960년대 영화를 보았습니다. 선구적인 감독의 의지가 보입니다. ‘상록수(신상옥 감독)’가 유명하지요. 그 당시 문제는 지금 거의 해결되었습니다. 앞으로 10년간 여성건축가나 협회가 노력한다면 많은 발전과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현대에도 상록수는 필요합니다. 여성건축가와 협회가 정복과 평등이 아닌 매사에 조화롭게(Harmony) 남녀의 문제, 협회의 문제에 접근한다면 사회발전과 함께 제도의 모순도 풀려 나갈 것입니다. 적극 참여하는 회원과 협회를 기대합니다. 또한 깨끗하고(Clean), 즐겁고(Enjoyable), 매력있는(Charming) 여성건축가, 건축가협회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명주: 건축에는 남성, 여성이라는 성 구별은 없지만,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절반은 남성이며 그 나머지 절반은 여성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의도적으로 되새겨 볼 때,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건축물은 여성적인 건축물이 아닌 삶의 주체인 여성을 고려한 건축물, 여성을 배려한 건축물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남성건축가도, 여성건축가도 페미니즘 건축물을 설계할 수 있고, 가정주부 심지어는 아내를 사랑하고 위하는 남편의 마음, 엄마를 도우려는 자식의 효도만으로도 페미니즘 건축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성건축가협회가 남성건축가들에게 그리고 여성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여성의 아이덴티티를 알리고 여성이 누려야 할 공간이 이 사회 내에 꼭 의도적으로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해주어야합니다. 이 또한 데이터베이스 구축하는 작업만큼이나 중요한 결실을 얻게 되리라 믿습니다.

만약 ‘여성을 배려한 주택계획각론’,‘ 여성을 배려한 오피스계획각론’,‘ 여성을 배려한 병원계획각론’그리고‘여성을 배려한 리모델링 사례조사’등. 여성건축가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 이러한 자료가 배치되는 날이 온다면, 더이상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여성을 옭아매는 굴레가 되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재림: 우리 건축 현실은 여전히 여성에게 냉혹합니다. 더 많은 노력과 열정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교육과정을 이수하고도 정당하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출발점이 달라도 각자의 의지에 따라 결과가 확연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잠시 쉬어야 한다면 느긋한 마음으로 미래를 준비해보세요. 반드시 새로운 기회가 올 것입니다. 앞으로도 여러 난관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들이 건축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날 것이고, 더디기는 하겠지만 건축계에서도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건축문화적 측면, 건축어휘를 통한 패러다임 측면, 혹은 제도적 측면 등에서도 변화가 예상됩니다. 우리 여성건축인들 스스로가 건축문화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인식을 갖는다면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며 건축에 있어서 성의 공존 내지는 발전적 합일점도 도출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우리 협회도 이러한 역할의 구심체로서 어떤 일에 주력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여성건축가협회의 30주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박철수: 마치 부챗살처럼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논의를 보면서 내심 무척 걱정을 하였습니다. 어느 시점에 끼어들어 어떤 얘기를 이어가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이해가 적어서일 것이라고 자괴하고 있으며, 또 여성들이 느끼는 많은 것이 제가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르구나 하는 점을 알게한 자리였습니다. 그렇다고 여성건축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 혹은 영역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에 동조하거나 우리 사회가 그렇게 짜놓은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서러움의 고백에 느낌을 함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선영 선생 의견처럼 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여성성의 부각에 의한 양성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을 (여성)건축가들의 화두로 삼으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 다른 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분파되거나 분리되지 아니한 건축인으로서의 공감과 같은 목표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굳이 여성으로 따로 떼어놓고 무언가를 언급하는 것이 제게는 여전히 서투른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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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1965년생. 일본 와세다대 건축학과, 동대학원 졸업. 오오바야시구미 개발기획부를 거쳐 1995년부터 오오바야시구미 엔지니어링본부 재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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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주

1967년생. 명지대 건축공학과, 홍익대 건축학과 대학원, 베를린공과대 대학원 졸업. 베를린공과대 박사과정 중. Ch. Dierkes 건축설계사무소, Gewers Kuehn & Kuehn 건축설계사무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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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기: 토론 내용을 죽 살펴보니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건축계에서의 여성의 역할 등이 주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첫째, 가정에서의 문제는 어려운 시절들이 있었지만 다들 한 고비를 넘어 해결하고 계신 듯합니다. 젊은 여성건축가나 지망생들에게는 남편의 이해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전조치를 충분히 해두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마디하고 싶군요. 둘째, 여성이 건축계에서 일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많은 말씀이 있었​고 이에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직 여성의 경우 사회에서의 남녀차별에 비해서는 비교적 나은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회 전반에서 여성의 권익을 강화하고 사회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육아, 교육 등과 관련된 노력을 상당한 정도 해주셔야 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셋째, 여성할당제와 관련해서는 여성분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분이 할당제에 의해 중복되는 활동으로 본연의 역할에 차질을 빚는 경우를 말씀하셨지만 각 분야에서 여성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에 비해 머지않아 여성할당제 자체가 상당히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성건축가라는 명칭이 참으로 듣기 좋습니다. 건축가로서 일반적인 능력과 자질을 갖춤과 동시에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여성성을 건축계에 불어넣어 새로운 건축문화를 창조하는 역할, 남성 중심의 낡은 관행을 뒤바꾸는 긍정적 여성건축가의 역할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가 아닐지요.

 

정유정: 저는 이번 기회에 일본 여성건축인의 문제의식은 어떠한지 여성건축가협회라는 단체를 찾아보았는데, 존재하지도 않고 비슷한 역할을 UIFA JAPON이 담당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1976년에 만들어져 현재 회원 약 130명의‘여성건축기술자의회’또한 여성건축인을 지원하고 있고 그밖에 여성만으로 구성된 설계사무소, 자그마한 모임 등이 있다고 합니다. 단순히 갖은 의문점은 왜 한국에는 협회가 있는데 일본에서는 설립되지 않았을까 였지요. 사회적 요구, 문제의식, 추진력 등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일본에서도 역시 여성은 Minority로서 존재하지만 남성적인 부분을 관찰해볼 때 한국 사회구조가 훨씬 더 남성적이란 점도 한몫 하지 않나 봅니다. 일본에서는 여성건축가로서 주로 주택을 중심으로 현저한 활동과 영향력을 끼친 하야시 마사코, 하세가와 이쯔코, 세지마 가즈요 등 건축가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한 극히 소수파 건축가이지만 이들도 일반사회 민중 속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깝지요. 

지금 일본 여성건축가 중 제가 제일 주목하고 있는 세지마 가즈요가 참가한, 1994년부터 시작된 획기적인 프로젝트로 공영주택단지의 대규모 재개발 ‘기후 키타카타 주택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이소자키 아라타가 종합 코디네이터를 담당하고 8동의 볼륨을 4명의 여성건축가(2명은 외국인)가 설계하도록 한 아주 참신한 프로젝트지요. 주거공간의 설계는 여성적 감수성과 시점이 가장 필요함에도 불과하고 이제껏 공공주거 설계, 계획에 여성건축가가 들어설 장소가 없었다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러나 공공사업에 있어서의 Minority에의 할당제와는 무관한 발상에서 얻어진 것이라면 이 프로젝트는 아주 돌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성건축가의 역량을 집결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많은 사고방식이 부딪쳐 가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며 형성된다고 믿습니다. 그 구심체 역할을 하는 여성건축가협회의 무한한 가능성을 계속해서 주목하고 싶습니다.

 

지순: 여성건축가는 일반 여성과 대조적으로 건축전공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여성건축가는 반드시 설계만을 고집하고 설계작품으로 저널에 자주 오르고, 유명인이 되는 소위 스타건축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전제로 야심만을 불태운다면 중도포기, 탈락의 괴로움을 갖는 듯합니다. 저는 건축계야말로 설계, 시공, 자재, 교육연구, 환경, 관리 등 광범위한 영역을 모두 모아 이루어지는 우주와 같은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 할 일이 많아 보입니다. 특히 여성의 슬기와 강인한 생활 잠재력을 북돋아 출산, 육아의 어려움 속에서도 재택활동을 하는 자동화 컴퓨터시대야말로 대학 건축교육에서 굳어진 건축관에 의지하는 진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하겠다는 깨우침을 받습니다. 신인 젊은 여성건축가를 좌절시키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 가운데 설계 기회를 기득권층이 독점하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젊은 여성건축가는 반드시 가장 안전하고, 신뢰받는 항해선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장차 기득권층이 되겠지요. 저도 여러분처럼 끊임없이 어려움과 마주합니다. 그래도 옛날보다 동료 여성과 대화하는 환경을 갖게 되어 너무나 행복하고 미래에의 희망과 기대에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한지숙: 오늘 저의 회사 사장님이 "My house is bad feng shui"라고 말하며, "풍수지리로 보았을 때 우리집은 안 좋은 것 같아. 제니퍼, 너도 이런 풍수지리에 익숙하겠지?" 하며 저에게 빌려준 두 권의 책은 영어판으로 된 한국풍수지리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책들은 이해하기 쉽게 다이아그램, 사진과 설명들이 곁들여져 있었습니다. 한국의 우수한 풍수지리 이론이나 태양과 지구의 우주론 관계 등을 고려하는 우리 전통 건축문화야말로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 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동양에 대해 신비스럽게 생각하며 호기심을 갖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제가 일을 하면서 가끔 바쁠 때 파일을 위아래 반대로 집어넣는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마치 한국의 '빨리 빨리 정서' 혹은 '사고와 문화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듯 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린 가족의 성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이름을 적지만 미국은 그 반대인 것처럼 동양과 서양의 많은 부분이 서로 반대의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의 실수라기보다는 문화 차이에서 오는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도 여성과 남성의 투쟁이 아닌 서로가 다른 것을 인정해주고 이해해주는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사회로 가야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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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2002년 10월) 전체 보기 (E-Magazine 유료 구매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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