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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리스 건축과의 대화: 변곡점의 증인들

사진
노경
자료제공
네임리스 건축
진행
최은화 기자
background

네임리스 건축은 지난 12년간 약 10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유형도 건축, 전시, 예술, 가구, 출판물 등으로 다양하고 규모도 성격도 저마다 주목하는 점도 다르다. 이번에 다루는 다이얼로그, S 라이브러리, 자라나는 숲, 달빛노들은 이전 작업들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그리고 네임리스 건축은 지금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이들의 과거-현재-미래를 김수영, 임동우, 정소영이 함께 짚어본다. 

 

 

나은중, 유소래 네임리스 건축 공동대표 × 김수영 숨비건축사사무소 대표 × 임동우 홍익대학교 교수 × 정소영 시각미술 작가​

 

 

자라나는 숲 모형
 

 

이 건물이, 네임리스 건축이 한 거야?

 

임동우(임) 이번 프로젝트들은 새로웠다. 사전 정보 없이 그냥 길을 가다가 봤더라면 네임리스 건축이 했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을 것 같다. 새롭게 시도한 부분, 이전에는 없던 변주가 많아서 초기 작업들과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이 정도의 변화가 한 팀에서, 그것도 약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는 게 신기하다. 르 코르뷔지에가 수십 년 동안 하나의 길을 가다가 말년에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그런 말년에 일어날 법한 변주가 네임리스 건축에 벌써 일어난 거다.

나은중(나) 욕과 칭찬 사이를 애매하게 오가는 말 같다. (웃음)

욕은 아니고 이제 은퇴해도 되겠다는 말이다. (웃음) 농담이다. 물론 10년이라는 기간이 중요한 건 아닐 거고, 프로젝트를 많이 했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였을 거다.

김수영(김) 나도 이번 답사를 하며 ‘이게 네임리스 건축이 한 거야?’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다이얼로그, 자라나는 숲, 달빛노들이 비물질적으로 보였는데, 그전까지 나는 줄곧 네임리스 건축이 콘크리트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제까지의 작업들에서 보여지는 구축적인 모습 때문인 것 같다. 그런에 이번에 본 프로젝트들은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된 느낌이다. 그동안 쌓아온 구축적 노하우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자 애를 쓴 흔적들이 건축물 곳곳에서 드러난다. 네임리스 건축의 이전 작업들이 구축적 선언이었다면, 최근작들은 건축적 알레고리의 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도 네임리스 건축이 하고자 하는 건축에 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이번 프로젝트들이 ‘네임리스 건축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만큼 작업의 역량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정소영(정)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프로젝트들이 만들어내는 여백과 빈틈에 흥미를 느꼈다. 다이얼로그는 중정을 만들기 위해 나머지 공간을 둔 채로 중앙을 파고 들어가고, 자라나는 숲에서는 기둥이라는 수직선들 사이에 생기는 빈 공간이 있고, 달빛노들은 도시공간에 하나의 빈 점을 만드는데 재료도 타공판을 사용한 점이 흥미로웠다. 물론 이건 순전히 주관적인 해석이다. 다만 비워냄으로써 생기는 균형감이 어쩔 때는 유희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해체적이기도 하면서 변주되는 것 같다.

네임리스 건축의 프로젝트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모던하다. 모더니스트들의 언어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을 넘어서는 지점들을 찾을 수 있다. 내 생각에 그 지점은 구축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범위를 좀 더 넓게 이야기해보자면, 건축은 비교적 최근까지 기둥, 슬래브, 자유로운 파사드로 구성된 건축물이 대부분이었다. 100년 전에 고안된 도미노 시스템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몇몇 건물들이 실험적인 파사드를 내놓긴 했지만, 아무리 파사드가 새롭다 할지라도 사실 기존의 구축체계를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국내외 할 것 없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왜 기둥-슬래브로 구성해야 할까?”, “파사드를 디자인하는 게 건축일까?”, “매스로 설계하는 게 건축일까?” 등 본인 스스로 질문을 던지거나 이러한 의문이 프로젝트에 묻어나는 현상이 지금 세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 세대는 본능적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이 기저에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네임리스 건축의 프로젝트는 구축의 관점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S 라이브러리, 다이얼로그는 콘크리트라는 물성의 가능성을 확장해본 프로젝트다. 표면적으로 경직된 콘크리트 주조 방식을 벗어나서 유선형을 시도했다. 반면에 자라나는 숲과 달빛노들은 둘 다 공공미술이고 프로그램의 성격도 자유로워서 조금 다른 시도를 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다. 예를 들어 달빛노들에서는 달이라는 주제를 물성으로 접근하지 않고 “도시의 시적인 비움은 무엇일까?” 하는 다른 지점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자라나는 숲에서는 스틸 구조를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했는데, 재료를 실험하기 위해서이기보다는 숲, 자연과​ 인공 등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해서 나오게 된 결과물이다.

이전 프로젝트인 삼각학교(2015)는 학교라는 건축 유형에 변주를 줬다. 이제까지의 혹은 전형적인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서 변주를 줬다면, 최근작을 보면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서 변주를 끌어올리는 것 같다. 정형화된 평면과 단면의 틀을 깨는 변주로 보인다. 

그때는 “좋은 교육 공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명확했다. 철저히 프로그램에 기반을 둔 프로젝트다. 아홉칸집(2017)에서도 주거공간의 전형성을 바라보며 “거주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했다. 

유소래(유) 자라나는 숲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망대가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했다. 수직적인 타워 형식의 전망대와 이에 따른 견고한 물질성을 다르게 생각한 결과물이다. 

우리 건축의 많은 출발점은 익숙한 것들에 대한 의심이고, 질문이다. “과연 이게 맞을까? 이 프로그램이, 이 형식이 본질을 건들고 있는가?” 하며 스스로 의문을 가진다.

 

 

다이얼로그 모형

 

 

정돈하지 않고 흐트러트려도 될까?

 

자라나는 숲에서는 건축가인 우리와 예술가인 정소영이 협업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건축가는 뭘 하고, 예술가는 뭘 했나?” 하고 묻기도 한다. 건축가는 형태를 만들고, 예술가는 색을 칠했냐 하는 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디어 회의부터 같이 했다. 모형도 많이 만들고 같이 이야기하고, 서로 생각을 물으며 발전시켜 나갔다. 정소영과 작업을 하면서 조금 더 풀어헤치고, 흐트러트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항상 다듬고, 정제하려는 성향이 컸다는 걸 깨달았다. 

자라나는 숲은 건축가의 직능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 정소영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작업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건축가는 늘 정리하려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려고, 구조화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왜냐하면 건축가는 개념부터 구현까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소영은 “어떻게 풀어헤칠 수 있을까?” 하는 보다 자유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가? 난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웃음) 내가 생각하기에 흐트러짐과 명쾌함의 경계는 “건축이 태생적으로 정리를 하는 입장이니까 이번에는 풀어보면 어떨까?” 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해체되면서 다시 

정리되는 그 균형점은 우리가 자연현상에서 체득하게 되는 것 같다. 다만 해체와 구축의 중간 지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건축가 저마다의 색깔과 태도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정리와 흐트러트림, 구축과 해체 사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이전에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작업한 프로젝트에서의 일화가 떠오른다. 그때 콘크리트 타설의 퀄리티가 썩 뛰어나지 않았다. 사실 엉망에 가까웠다. 깨지고, 틀어지고, 특히 사용자의 몸이 스치는 중요한 부분인 건물 모서리가 의도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나왔다. 이걸 보수하기 위해서 깨끗하게 자르고 정리했는데, 주변과 조화롭지 못하게 너무 두부 자르듯이 마무리가 된 거다. 그제서야 이전의 흐트러짐이 더 좋았다는 후회가 들었다. 왜 건축가는 현장성, 불확실성을 내버려두질 못할까 싶었다. 그 이후로 불완전성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페이퍼 아키텍트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짓는 프로젝트인 만큼, 현장에서 벌어지는 우연성과 의도하지 않은 과정의 이야기를 결과물에 남겨두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흐트러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렇다면 과연 ‘우연한 흐트러짐’과 ‘의도된 흐트러짐’ 사이는 어떨까, 그에 대한 고민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들을 관통하는 게 바로 그 ‘의도된 흐트러짐’인 듯하다. 다이얼로그에서 계단 참의 폭이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고, 건물로부터 독립적으로 위치하는 등의 제스처 말이다. 1, 2층에 있는 배흘림기둥도 아주 의도적으로 보인다.

자라나는 숲에서도 지붕과 기둥이 맞닿아 있지 않고 틈이 벌어져 있다. 새로운 재료와 구축의 방식들로 이러한 새로운 언어를 시도하는 과정을 지금 네임리스 건축이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불완전한 사전』(2019)의 표지와 닮은 부분이 있다. 표지에는 아주 단순한 원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완전하지 않고 한쪽이 어긋나서 틈이 조금 벌어져 있다. 다이얼로그와 자라나는 숲에서처럼. 그런데 달빛노들에서는 어긋났던 원이 다시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틈이 다시 사라진 느낌이다. 여기서부터 조금 민감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틈을 만들 수 있었던 데에는 정소영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만약 협업 없이 네임리스 건축 스스로 했다면 즐겨 사용하던 콘크리트를 평소처럼 사용하지 않았을까? 달빛노들에서도 흐트러트려주는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또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로버트 필리유(Robert Filliou)라는 작가의 작품이 생각난다. ‘잘한 것, 못한 것, 안 한 것(Bien Fait, Mal fait, Pas fait)’(1968)이라는 작품이 있다. 작품의 완성도나 태도의 경계에서 오가는 지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나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미학을 생각한다. 어설퍼 보이지만 명료하고, 명료함 속에 또 흐트러지는 부분이 있고, 또 그것을 편안하게 드러내는 게 미학의 정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미학도 존재하지만, 건축이 명쾌하고 명료할 때 극대화되는 카타르시스도 분명히 존재한다. 

“명쾌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명쾌한 자연스러움은 무엇일까?” 늘 이런 고민을 한다. 궁극적으로는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또 풍요롭게 공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하는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좋은 공간은 뭘까?”보다는 “자연스럽고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은 뭘까?”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다.

 

 

『완전히 불완전한 사전』(2019)​

 

S 라이브러리 모형

 

 

건축가는 짓는 사람인가? 디자인하는 사람인가? 조율하는 사람인가?

 

작업을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나? 공통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나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나?

우리는 최근 경험에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경험을 어떻게 하게 할 것인가 하는 실체적인 공간의 이야기다. 조금 들어가서, 좁아지고, 거친 질감에 발을 디디며, 어두워지고, 올려다보면, 바람이 느껴지는 등의 시나리오를 고민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구축에 좀 더 초점을 맞춰서 작업했다면 요즘에는 구축을 넘어 사람들의 경험, 행위, 감각을 고민한다. 이 고민은 아홉칸집에서 시작됐다. 16개의 십자형 구조로 이루어진, 9개의 방으로 구성된 집인데 이곳은 계절이나 상황에 맞게 방의 프로그램이 바뀌기도 하고, 그 안에서의 움직임도 자유롭다. 그런데 사실 사용자의 생활과 쓰임이 없다면 그리드 체계로 이루어진 아주 무미건조한 공간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건축가보다 건축주의 영향이 더 크다. 건축이 구축만으로는 형성되지 않는다는 걸 체감하게 됐다.

위계가 없는 공간을 만들었더니 유동성이 나온 케이스다. 

유동적인 걸 고민하는 건 좋지만, 의도적으로 유동성을 만드는 건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건축화되는 순간 사용자의 자율은 그만큼 줄어들고, 의도된 시퀀스만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중요할 것 같다. “건축가는 짓는 사람인가? 디자인하는 사람인가? 조율하는 사람인가?” 건축가가 제안하는 어떤 것이 때로는 무의미할 수도, 지나치게 풍요로울 수도, 때로는 건조할 수도 있다. 다만 그걸 선택하는 건 건축가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건축가는 조율자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관계들을 조율해 나가면서 가능성을 짚어보는 게 필요하다.

동의한다. 건축가는 누울 자리를 짚어보고 누워야 한다. (웃음)

우리가 갈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 최근에는 설계공모를 통해서 공공프로젝트도 진행 중인데, 그건 조금 다른 결의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에는 공공성은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있다. 

네임리스 건축은 질문을 참 많이 한다. (웃음) 이런 태도를 계속 유지해서 90살까지 작업한다면 최종적으로 유작으로 남는 건 플레이클라우드(2010) 같은, 건축의 가장 근본적인 무언가를 건드리는 작업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네임리스 건축이 이제까지 해온 프로젝트들은 모두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반응이었지 않은가. 

두 개의 욕망이 공존한다. 모더니스트가 되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의구심을 갖는 것. 둘 사이를 계속해서 진동하면서 조율점들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지금 있는 것 같다. 

네임리스 건축이 맷집이 세진 느낌이 든다. 건축이 지어지기까지 별의별 상황이 있기 마련인데,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 예전보다 더 여유로워진 것 같다. 그러면서 또 구축에 기본을 삼고서 또 다른 

건축적 방향들을 찾아나가고 있는 듯하다.

한국에는 젊은 건축가가 지을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회화되는 과정으로 맷집이 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결과물에 충분한 고민과 생각을 담았나 하는 경계심이 들 때가 있다. 클라이언트, 대지 상황, 예산 등 외부적 조건이 결합된 사회적 결과물에 불과한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 어쩌면 우리만의 언어를 견고하게 구축해서 일관성 있게, 단단하게 이어나가야 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 전에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게 맞나? 그런 고민의 사이를 계속해서 오간다. 

예술 작업하는 작가들을 보면 작업의 주제가 명확한 사람도 있고, 매체가 시그니처한 사람도 있고, 이미지적으로는 통합되지 않더라도 태도가 일관적인 사람도 있다. 네임리스 건축은 마지막에 해당하지 않나 싶다. 물성과 태도를 통해서 변주를 많이 주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달빛노들 모형

 

 

‘관념적’의 반의어는 무엇인가?

 

10년 넘게 네임리스 건축을 옆에서 보고 있는데, 사실 한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들이 굉장히 진지하게 건축에 임한다. 그래서 행여나 관념, 철학, 개념에 너무 깊게 빠지진 않을까 했는데 이제는 방향이 명확해진 것 같다. 

예전에 몇 명의 건축가의 강연을 한 장소에서 연달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한 건축가는 개념적인 이야기, 관념적인 단어, 광범위하게 큰 생각들로 프로젝트를 설명한 반면 어느 건축가는 아주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그런데 언어와 결과물이 비례하지 않았다.

큰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그보다 작은 결과물이 나오고, 반대로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 나오는 걸 목격했다. 그 이후로 생각과 결과의 격차를 줄이려고 그때의 경험을 되새긴다.

건축적 언어는 문화, 지역, 나라마다 다르다. 설계와 공사의 방법과 과정 등 기본적으로 모든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잣대로 보면 안 된다. 그저 다를 뿐이니까. 또 세대도, 상황도 계속해서 달라진다. 앞선 세대의 일부 건축가의 태도를 논하기 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나는 그런 면에서 네임리스 건축에 대한 기대가 크다. 국제적인 맥락에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작업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오늘 이야기 나누면서 질 들뢰즈를 언급 안 한 게 어디냐. (웃음) 굉장히 진보했다, 우리.

네임리스 건축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을, 그래서 나 또한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본인이 작업한 결과물을 곧바로 언어로 치환하는 건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결과물이 충분히 좋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도 명확하고, 가능성도 뚜렷하게 보인다. 

자라나는 숲, 달빛노들도 어쩌면 ‘숲’과 ‘달’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더 좋게 느껴질 수도 있다. “서울에 달이 뜨면 어떨까?” 하는 접근은 흥미로운데, 무언가를 명명함으로써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 두 작품처럼 서사가 중점으로 보이는 작업은 네임리스 건축의 프로젝트들에서 아직은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앞으로 그와 비슷한 종류의 작업이 더 많아진다면 자연스럽게 네임리스 건축만의 서사가 만들어질 것 같다. 

결론적으로 건축으로 이야기하면 된다는 뜻이구나.

우리가 계속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이 네임리스 건축의 전환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이번 네 개 프로젝트에 대해서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다. 앞으로 어떤 프로젝트를 이어나가는지에 따라서 현재 이 시점에 대한 판단이 이뤄질 거다. 지나온 12년을 갈무리하는 것일지, 앞으로를 여는 것일지는 아직 모른다. 

 


네임리스 건축
네임리스 건축은 아이디어 기반의 설계사무소이다. 나은중과 유소래는 각각 홍익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미국 UC 버클리 건축대학원을 같은 해 졸업했다. 2010년 뉴욕에서 네임리스 건축을 개소한 후 서울로 사무실을 확장하였다. 예측불허한 세상 안에 단순함의 구축을 통해 건축과 도시 그리고 문화적 사회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김수영
김수영은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와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했다. 2010년 숨비건축사사무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설계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2014년 제7회 젊은건축가상, 2015년 신진건축사대상 장려상과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2016년 김수근 건축상 프리뷰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시 공공건축가와 동작구 마을건축가 MP로 위촉되어 활동하고 있다.
임동우
임동우는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도시설계 건축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교수이자 프라우드 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다. 2013년 미국건축연맹 젊은건축가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한국관 참여 아티스트이다. 2017년 서울건축도시비엔날레에서 <평양살림>을 기획했으며 2019년 서울건축도시비엔날레 도시전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정소영
정소영은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원을 졸업하고, 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조형 작업과 특정 장소 설치, 공공미술 작업을 통해 조각 매체의 범주를 확장하고 실험하는 시각미술 작가다.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 송은아트스페이스, 대림미술관, OCI미술관 등 국내 여러 미술기관 및 브라질 쿠리치바 비엔날레, 런던 로열 아카데미, 델피나 재단과 프랑스 릴 3000 및 로망빌 피망코 재단 등 해외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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