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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공간과 성평등

장미현(젠더공간연구소 소장)
진행
이성제 기자

197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도시와 건축의 공간 구성이 젠더와 연관되어 있다는 비판적 인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근대 산업화의 흐름이 가부장적 질서와 결합되면서 남성은 생계부양자, 여성은 가사와 돌봄 담당자라는 젠더에 따른 이분법적 체계가 강화됐는데, 이러한 점이 공간 구조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것이었다. 도시공간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연구들은 일터/공적영역이 남성의 공간으로, 주거/사적영역이 여성의 공간으로 이분되었음을 밝혀냈다. 젠더 역할에 따라 구축된 공간이 차별적 공간 경험을 초래한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공적영역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젠더이분법적인 사회 질서는 점차 완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차별적 공간의 변화를 모색하는 담론과 시도들도 나타나는 중이다. 그런데 건축은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고 있는가? 적어도 인식은 하고 있는가?

한국 건축계에서 젠더에 대한 관심은 미약하고, 도시와 건축이 성별연관성이 없는 중립적인 가치를 지향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공간이용자는 성별과 무관한 불특정 다수로 여겨진다. 때로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하면 된다는 의견도 나온다. 물론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은 보다 많은 사람의 편의와 안전을 향상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모두’의 공통점을 도출하는 것만으로는 모두로 묶인 이들의 ‘다양성’이 간과되기가 쉽다. 성별, 연령, 장애 등에 따르는 불편함이야 해결할 수 있겠지만, 각기 다른 경험과 활동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무엇인지, 그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도출하기에 충분치 못하다.

한국에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18년 기준 52.9%에 불과하고, 특히 30-40대 여성 고용률은 65.1%로 OECD 국가 중 가장 낮다.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이나 ‘독박육아’라는 말은 여성에게 따라붙는다. 돌봄노동은 경제활동 제약과 소득 격차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돌봄 역할의 수행은 이 노동을 전담하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경험, 다른 방식의 공간 이용을 만들어낸다. 공간과 젠더의 관계를 여러 측면에서 논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여성의 성 역할로 강조되어온 돌봄노동, 특히 영유아 돌봄과 관련된 공간을 사례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성 역할을 강제하고 강화하는 공간계획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주민센터나 시군구청을 찾아본 경험이 있는가? 경사로로 진입한 후 출입문을 지난 뒤 돌봄노동 수행자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유모차를 보관할 장소를 찾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영유아시설인 공동육아나눔터마저도 ‘유모차 공간’을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둘 곳 없는 유모차는 대개 복도에 늘어서게 되고, 복도의 보행 유효폭은 침범당하기 일쑤다. 공간계획에서 영유아동반자를 위한 고려가 단과 턱을 없애고, 경사로를 설치하고, 유효폭을 확보하는 등 유모차 통행에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영유아 활동과 돌봄에 요구되는 공간, 그리고 유모차 보관 공간은 많은 경우 간과된다.

유사 사례로 수유실을 들 수 있다. 배고픈 아이를 달래려고 수유실을 찾아보지만, 건물 안내지도에는 위치가 표시돼 있지 않다. 물어서 찾으면 민원실 기둥 옆 틈새공간이거나 복도 끝 한 켠에 칸막이를 세워 만든 작은 공간에 수유실이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문을 열어 보면 이유식을 얹어놓거나 짐을 둘 만한 탁자는커녕, 아이를 안전하게 눕힐 곳도 적당하지 않다. 유모차를 겨우 밀어 넣어야 들어갈 수 있다. 모유수유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유실’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작은 시군에서는 수유 공간을 마련한 관공서 찾기가 어려워 이 정도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한다. 물론 관공서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번엔 화장실을 살펴보자. 역시 영유아가 사용가능한 화장실도 안내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방문한 부서가 있는 층에는 영유아 시설이 없고, 도로 내려와 1층 화장실에 들어가보면 벽 한 쪽에 접이식 기저귀교환대가 부착돼 있다. 교환대를 펼치면 세면대에서 손 씻는 사람과 부딪치기에 사람이 뜸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민폐를 끼치지 않고 아이 기저귀를 갈 수 있다.

영유아를 동반한 보호자가 화장실을 이용하는 경우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이를 앉힐 보조의자나 유모차를 들일 여유 공간이 있는 화장실 부스가 필요하지만,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있는 부스로만 채워져 있기 마련이다. 모르는 이에게 아이를 부탁하기는 어렵고, 결국 눈치 보며 장애인화장실을 이용하게 된다. 대도시의 경우, 장애인화장실에 기저귀교환대, 영유아 보조의자, 어린이용 변기 등을 설치해 ‘가족화장실’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도 있지만, 교통시설을 제외하면 없는 곳이 대다수다. 아이가 자라 걷는 나이가 되어도 어린이용 변기와 세면대가 설치된 곳이 부족해 어려움은 지속된다. 즉,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은 불편함을 감수한 채 아이를 데리고 움직이거나, 누군가가 돌봄노동을 대신할 때에만 집 밖을 다닐 수 있다. 여성이 돌봄노동을 전담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고려하면, 돌봄에 대해 미흡한 계획과 건축 공간들은 여성의 공간 이용에 불편함을 가중시키고 여성의 활동을 제한한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면 육아에 참여하는 남성이 늘고 있지 않냐는 반문이 뒤따른다. 그런데 남성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더 큰 고난을 마주하게 된다. 남성이 수유실을 이용하는 것은 난감하고, 영유아시설이 설치된 남자화장실을 찾는 것은 난망하다. 다시 아이를 동반한 공간이용은 여성의 몫이 된다. 결국 여성이 아이 돌보는 것을 전제로 조성된 공간은 남성의 육아 참여를 가로막고, 여성들의 돌봄 부담을 가중시킨다.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건축이 사회의 성 역할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변하는 사회, 변하지 않으려는 건축

돌봄공간을 여성의 공간으로 간주해 온 건축계획의 틀에서, 돌봄 관련 시설 또는 장소는 중요한 (혹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프로그램이 계획된 뒤 자투리 공간에 끼워져 들어간다. 예산을 이유로, 공간의 협소함 등을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려 계획단계에서 고려되지 않거나, 고려되더라도 가볍게 여겨진다. 수유실이나 영유아 화장실이 조성되어도 건물 안내판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돌봄노동자가 돼보지 않은 건축가라면, 혹은 이들의 답답함과 난처함을 떠올릴 수 없는 이들이라면, 중요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죽을 때까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돌봄이 개인의 삶을 지탱해주고 사회를 유지하는데 불가결한 것이라면, 이 공간을 사회의 필수 인프라로 여기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은가?

한국 건축계가 젠더 인식의 변화를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건축과는 무관한 것으로 두는 사이, 실질적 변화가 법과 제도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1995년을 기점으로 전세계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정책은 한국에서 성별영향평가, 성인지 예산, 성별통계 등의 제도로 자리 잡았다. 특히, 성별영향평가는 「성별영향평가법」을 근거로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법, 계획, 사업 등 모든 정책영역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국토교통부와 광역/기초단위 지방자치단체의 도시 및 건축정책들 또한 예외 없이 적용된다. 또한, ‘여성친화도시'라는 지역 성평등 정책이 추진되어 2018년 기준 87개 기초지자체가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받았다. 여성친화도시는 여성정책뿐 아니라 공간정책을 주요 영역으로 다루며, 돌봄과 일-가족 양립, 안전 등 지역의 성평등을 지원하는 공간환경의 조성을 주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돌봄시설의 경우 전문 연구자들에 의한 특정성별영향평가 중 ‘출산양육지원법령 및 돌봄시설 특정성별영향분석평가(2016)’가 시행되었다. 연구결과의 하나로 수유실, 화장실, 가족샤워실, 일시돌봄시설 등에 대한 설치 기준 개선 방안과 가족수유실, 가족(다목적)화장실, 가족샤워실, 일시돌봄시설에 대한 표준설계(안)이 도출되었다. 이러한 안들은 법령 개정을 유도하고, 지자체의 여성친화도시 공공시설 가이드라인에 활용되면서 실질적인 공간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가장 체감되는 곳으로 고속도로 휴게소를 꼽을 수 있다. 영유아 동반 이용이 많고, 편의성이 경쟁력이 되는 시설이기에 화장실과 수유실 개선이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과감하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휴게소 내 ‘가족화장실’ 설치는 당연시 되고 있다. 수유실도 모유수유뿐 아니라 기저귀교환, 분유나 이유식 급여까지 가능한 장소로, 그 공간의 범위와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남성도 이용가능한 가족수유실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 공간도 변해야 한다. 건축과는 상관없는 일로 간주하고 기존 질서에 부응하는 공간을 계속 만들어낼 것인가, 떠밀리듯 법이 바뀌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공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재료의 변화에, 기술의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형태와 공간의 문법을 만들어왔던 건축은 이제 인식의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놓여 있다. 모두를 위한 건축은 정말 모두를 위한 건축이었는지 자문하고 성찰해야 한다. 모두의 이용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건축은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 누군가를 제약하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의 기반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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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별표] 공중화장실등의 설치기준(2017.5.8. 일부개정, 2018.1.1.시행)

 

개정 전

12. 여자용 대변기 칸막이안에는 영유아를 동반한 여성의 이용편의를 위하여 영유아 보조화장실을 설치할 수 있다.

14. 어린이용 대·소변기및세면대는각각 1개 이상 설치하여야 한다. 다만, 행정안전부령으로 정하는 공중화장실등의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개정 후

12. 대변기 칸막이안에는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의 이용편의를 위하여 영유아용 변기, 거치대, 보조의자 등을 갖춘 영유아 보조화장실을 설치할 수 있다.

14.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에 어린이용 대·​소변기(남자화장실의일반인용 소변기가 바닥부착형의 일반인·​어린이 겸용인 경우는 제외한다)와 세면대를 각각 1개 이상 설치하여야 한다. 다만, 행정안전부령으로 정하는 공중화장실등의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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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경우,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별표] 공중화장실등의 설치기준 중 ‘여자용 대변기 칸막이안에 여성의 이용편의를 위한 영유아보조화장실 설치’ 기준이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의 이용편의를 위한 영유아용 변기, 거치대, 보조의자 등을 갖춘 영유아 보조화장실 설치’로, ‘어린이용 대?소변기 및 세면대 각각 1개 이상 설치’는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에 어린이용 대?소변기 및 세면대 각각 1개 이상 설치’ 기준으로 개정, 시행되었다. 2018년에야 이루어진 일이기는 하나, 공간과 관련된 법령의 개정은 실질적인 공간 요구를 고려할 뿐 아니라, 용어의 사용에서도 여성과 돌봄을 연결짓는 고정관념을 지양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장미현
장미현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도시 및 건축 분야의 성인지적 분석모형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젠더공간연구소 소장으로 ‘여성친화형 도시재생뉴딜 실행모델 개발(2018)’, ‘여성친화도시 이행현황 분석 및 발전방안(2018)’, ‘국토 및 지역개발 분야 성불평등 쟁점 발굴과 성인지 예산제도에 대한 시사점(2017)’ 등의 연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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