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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무수한 사잇길들이 있을 것이다 – 페미니즘의 미래라면

양효실(미학자)
진행
박세미 기자

‘한국 문화예술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전개 방향’이란 제목의 원고청탁이었음에도 나는 대신에 지금 현재, 아니 계속 처음으로 돌아가고 릴레이 경주처럼 각기 다른 곳에서 연이어 나타나고 있는 움직임, 상황, 사건에 대한 나의 느낌이나 분석으로 이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9월초에 참석한 어느 무용 잡지 주최 대담에서 나는 바야흐로 막 무용계에 일고 있는 미투 전후의 상황을 접했고, 9월 중순 참석한 어느 미술관 공청회에서는 나혜석에 대한 기존의 평가가 이제야 바뀌고 있음을 감지했다. 2015년 이후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페미니스트적 각성과 운동은 대서특필되었고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뇌리에 남았고 너무나 많은 사건들 이야기들 사이에서 곧장 잊혀진 것들이 있고, 계속 또 벌어지고 있지만 이제는 언론과 매체의 관심영역에 들어오지 못한 채 ‘내부’에서만 회자되는 것들도 있다.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진영과 영역과 공동체들 사이에서 연달아서 혹은 동시적으로 혹은 눈에 띄지 않게 변화가 운동이 사건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잊혀지고 있다. 어쩌면 지금도 막 시작된 곳이 있을 것이고, 승리한 사건들, 완성된 이야기들, 뒤숭숭한 루머들, 사라진 사람들이 보듬고 사라진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로 꿰어지지도 전체로 포착되지도 않는 상황이고 현재 페미니즘의 운동/움직임이고 너무 복잡하고 다종다기해서 차라리 듣고 보고 싶어지지 않는, ‘내면의 고요’ 같은 것을 유지하고 싶게 만드는 이유다.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압도하는 시대에, 세대, 계급, 젠더 등등의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관점,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관점을 참칭하는 것은 오만이거나 무지이기에 나는 저 의뢰받은 주제를 염두에 두면서도 한국, 페미니즘 운동, 전개방향과 같은 일반어들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은 채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작성하려고 하고 있다. 지금은 지식인이나 전문가처럼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가정된 사람들의 종래의 지위가 쇠락한, 누구나 혹은 당사자들이 직접 말하는 시대이기에,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을 장착한 전자의 사람들, 즉 현장과 상황에 매몰된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초연한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는 글은 별 ‘가치’가 없어 보인다. 요컨대 일반적 당위, 추상적 결론, 개괄된 요약, 말끔한 정리 같은 것이 전문가들이 구체와 특수를 사상시키고 걸러내는 ‘찌꺼기’라는 사실이 나의 보편적 말하기, 혹은 나의 대표성을 꺾어버린다. 그런 찌꺼기 혹은 가치는 물론 사태의 바깥에서 이해하고 정리하고 편해지려는 방관자들에게는 유효하고 유익할 것이다. 지금 그 상황에 가담한 사람들, 매몰된 사람들을 삭제하거나 대신한 페미니즘 전문가들의 초연한 말과 글에 생생한 현장은 없을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이라면, 관념이 아니라 낱낱의 구체를 담지한 글이려면 그것은 지금-현재에 충실한 채로, 재현불가능하고 번역불가능한 전체의 현재성에 머물러야 한다(이게 예술-언어, 몸-말, 감수성의 언어의 기능이자 가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지 인간이나 국민이 아닌 여성으로서 자신을 공표하고 여성의 문제를 함께 나누고 이야기하는 일은 이곳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여성들 자신에게도 낯설고 두려운 일이어서, 압도하는 사건의 말에 익숙해지고 통제할 수 있으려면 계속 쉬지 않고 지치지 않고 말해야 한다. 날 것의 말, 아직 지식에 이르지 못한 말, 자신의 몸에 아직 충분히 도착하지 않았기에 떠도는 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반복훈련, 즉 새로 태어난 아이나 망명한 이들처럼 신어를 배우는 일은 수없는 실패와 수행 속에서 일어난다. 지금처럼 여성들이 1인칭으로 자신들의 이야기, ‘속’에 깊숙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릴레이로 잇는 과정은 부단히 지루하고 고단한 과정이다. 누구나의 말, 당사자의 말,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말을 무차별적으로 존중하면서 경청하는 것은 처음에는 충격이고 계속되면 무감각해지고 종래에는 냉소적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피해자, 당사자, 증언자 등등의 용어들에서 연상되듯이 그 경험을 공유한 이들 사이에서 서로를 향해 들려지고 서로를 살리려는 말이기에 계속 최초의 퍼포먼스처럼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 말은 계속 들려지고 전해지고 반복되어야 한다. 직접적인 대화로건 트위터의 140자의 문자건 일기장이건 그 말들, 문장들은 계속 쓰여지고 공유되고 전달되고 기록되고 공기 중으로 흩어져야 한다. 마침내 그 말이, 내 ‘안’에서 끄집어낸 말이 지금의 내게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까지, 마침내 그 이야기를 하면서 울지 않을 때까지, 마침내 함께 박장대소할 수 있을 때까지 그 말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교훈도 없는 말을 계속 하는 실천은 그 말-상처-독침에서 다름 아닌 내가 벗어나고 자유로워지기 위함이고, 학대받고 고통 받은 내가 비단 내가 아니고 우리였음을, 그 경험과 그 말이 새로운 연대와 소통을 가능케하는 ‘재원’이었음을 깨닫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자들, 피해자들,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사람들, 비밀 같은 것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고 공유하는 실천은 무엇보다도 가해자들을 지목·처단하고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실천은 나를 무력하고 공손하고 무가치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언어 규범들에 맞서 나의 힘, 나의 가치, 나의 자긍심을 재획득하는 실천이고, 덤으로 ‘우리’로서의 여성을 출현시키는 실천이다. 그래서 지식인이자 전문가로서 여러 자리에 호출되는 내게는 지금 현재의 상황에 대해 덧붙일 말이 없다. 나는 지지하고 기다리면서, 내가 갖고 있던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거의 포기한 채로 현장에, 집담회에, 공청회에 참석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당연히 있다-지금도 그걸 겨우 쓰고 있다. 여전히 전문가를 기다리는, 고견을 듣고자 하는 이들의 그 태도가 왜 사건을 삭제하는지를, 그러므로 평범하고 시시한 당사자들의 육성을 듣는 무대를 더 자주 만들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사람으로서, 또 지식인-전문자로서의 내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배웠는지를 고백하기 위해서도 나는 계속 어딘가에 참석 중이고 내 나름의 1인칭 고백을 진행 중이다.   

 

나는 오십대 여성이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페미니즘 미학을 가르쳐왔고 어쩌다보니 아주 우연하게 주디스 버틀러의 최근 저서들을 번역해왔고 어쩌다보니 미술계에서 평론가로서 작가들을 아주 자주 만나고 리뷰를 쓰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수업에서 주로 읽고 가르친 페미니즘은 후기구조주의와 연동하는 ‘이론’이었고, 따라서 여성의 경험, 여성의 문제를 프레임화하는 페미니즘 보다는 그 프레임을 의심하고 그 프레임을 가시화하는(그럼으로써 그 페미니즘이 어떤 여성을 포함하고 배제하는지, 어떤 남성적 전제들이 페미니즘 안에서도 여성주체를 통해 시현되고 작동하는지를 성찰하는) 포스트페미니즘 계열에 더 친숙한 사람이다. 동시에 개인적으로 작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특히 여성 작가들의 작업에서 여성의 경험, 여성의 문제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늘 보아왔지만 그들은 자신의 작업을 페미니즘의 프레임으로 해석, 번역하려는 내게 애써 불편함을 호소했다. 미술계에서 여성 작가로 분류되는 것은 지엽화, 국지화됨으로써 예술의 보편성 헤게모니에서 밀려나는 위험에 다름 아니었고, 그렇기에 뻔히 여성적 시선, 내용, 구성을 내포한 작업인 게 보이는 데도 그들은 자신의 작업이 여성 작가의 작업으로 분류, 해석되는 데 저항했다. 젠더표시가 드러나지 않는 보편적인 예술가이길 원했고, 따라서 그들은 자기 작업에서 소외되었다. 미술대학은 페미니즘과 같은 국지적 방법론이나 전략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고, 어리고 젊은 여학생이나 여성으로서의 1인칭 이야기를 경청하는 선생들은 전무후무했고,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작업의 사적인 동기나 문제를 더 이상 객관화, 공론화할 채널을 얻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에게는 인간 보편의, 그러므로 남성의 특수한 미적 관심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길 외에는 달리 생존을 위한 대책이 없었다. 그럼에도 무의식이나 욕망이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매체이자 영역인 예술에서 나는 이미 항상 여성적 스타일이나 구성인 그런 작업들의 존재를 읽어냈지만 그 여성들을 설득하거나 그들에게 그 대가를 감수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미술계에는 기획자이건 비평가이건 수많은 여성 전문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페미니즘이 전면에 나서는 전시나 작업은 비교적 희귀했다. 물론 이미 1980년대 이후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여성 예술가들이 존재했지만 2010년대에 이르러 그것은 공동 운동으로서는 더욱 게토화되었고 개별 예술가들 몇몇이 그 기운이나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여성 작가의 작업을 분석할 때 가급적 여성이란 단어를 자제한 채로 비평을 했다. 무엇보다 예술은 예술가 자신의 1인칭 고백을 관통하면서 그것을 자양분으로 더 보편적인 방향으로 더 사회적인 관심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내게 1인칭 고백이라는 첫 번째 단계가 빠진 작업들은 단추가 잘못 꿰어진 웃옷처럼 뭔가 어색하고 불편해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권위있는 실기 선생의 충고나 비난을 듣고 결국 여성 작가로서의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미술계는 내게는 그렇듯 보수적인 곳으로 보였다. 여성 작가들은 미술계에서 여러모로 소외되어 있었다. 

 

메갈 이후, 나아가 미투 이후 많은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경험, 문제를 소재나 내용으로 한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성주의적 방법론을 공유하면서 함께 작업하는 여성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미술계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을지라도 연대, 콜라보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공통의 문제와 이제 공통의 즐거움을 전제로 함께 작업을 할 수 있겠다는 경험을 ‘얻었다’는 증거다. 일상에서 현장에서 성취한 성과다. 올해 나는 문화 생산자들에게 격년으로 기획상을 수상하는 집단의 임시 위원 자격으로 참여해 페미니즘 문화 기획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이미 페미니스트로서, 여성 문화예술 생산자로서 함께 작업을 해오고 있는 공동체 집단, 단체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늘 있었던 그들을 이제야 알게 되었음은 물론 나의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각자의 투쟁이나 노력이 모여서 하나의 움직임이나 운동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성 개인들의 영웅적 작업들을 당연시했던 내게 도착한 집단적인 여성들의 연대에 근거한 공동 작업들이었다. 그들은 분노, 연대, 생성, 긍정, 유머를 작업으로서 증명했다. 어른들, 남성이나 명예남성 선배들이나 지배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들만의 작업, 그들만의 서사를 만들고 있었다. 모두를 위한 작업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작업을 하고 있었고, 결과, 효과, 성취, 과시에서는 비록 미약할지라도 우선 함께 하는 소수가 일궈낸 자기-화해의 과정이었다. 

거대한 충격들, 놀라움들, 사건들로 전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던 페미니즘, 매체와 방관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극대화했던 페미니즘의 움직임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고, 대신에 낮고 작고 적게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주제들, 진영들, 입장들은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내가 들락거리는 SNS의 문장들은 여성을 배제시키고 왜곡하고 억압하는 사안들, 쟁점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고, 그런 지엽적이고 국지적인 문제들에 집중하는 페미니즘의 시각을 불쾌해하고 삭제하려는 이들도 끊이지 않고 목소리를 낸다. 이러한 누구나 말하는 형식적 평등을 위한 매체들을 모두 읽고 분류하는 나 같은 사람은 바깥의 방관자들일 것이다. 팔로워와 팔로잉 사이에서 반복해서 말하고 함께 말하고 세를 키우고 여파를 만들어내는 젊은 여성들이 어떻게 알면서 모르면서 페미니즘을 학습하고 재구성하는지를 나는 최근 몇 년 간 꾸준히 보았다. 굳이 학교가 아니어도 전문가가 없어도 현장, 일상, 온라인에서 스스로 각성하고 차이로서의 감수성을 익히고 새로운 미적 형식을 만들어내는 젊은 여성들의 분위기를 지켜보면서 나는 더 이상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 누구나 스스로 계몽당하고 계몽하는 조건이 나타났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모두를 위한 말이나 보편적인 진리를 위한 발언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각자 자신의 긴급함이나 자신의 상황에 충실한 말을 하면 되는 시대이다. 전문가들이 아마추어에게 배우는 시대이고, 더 이상 주류를 지향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도 무수히 많은 사잇길들, 방향들을 함께 트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여성(The Women)’은 없다. 오직 무수한 여성들이 있고 그 여성들이 어떻게 연대하고 어떻게 생존하고 어떻게 즐기는지는 방관자들이 아니라 내부자들, 직접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낸 여성들의 자취가 증언하게 될 것이다.

 


양효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보들레르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여성, 청년, 동성애자 등을 재현하는 미적 혹은 윤리적 방법의 복수성과 다양성을 전달하는 데 주된 관심을 갖고 있다. 삶을 그 자체로 선명하게 감각하며 이를 글로 드러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불구의 삶, 사랑의 말』 등을 썼고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 『윤리적 폭력 비판』, 『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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