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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에서 발굴한 개념의 탐구: 기억된 미래

이성제
자료제공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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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기억된 미래>는 근대 유산으로서 덕수궁의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는 전시로, 2012년과 2017년에 진행된 ‘덕수궁 프로젝트’의 계보를 잇는다. 국내 예술가들로만 구성됐던 이전 프로젝트와 달리, 올해에는 스페이스 파퓰러, 씨엘쓰리, 뷰로 스펙타큘러, OBBA, 오브라 아키텍츠 등 국내외 건축가 다섯 팀이 참여했다. 전시를 기획한 이지회(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덕수궁의 역사에서 ‘개항’, ‘근대화’ 등의 키워드에 주목했다”며 “이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아시아 지역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들을 섭외하고, 공간으로 경험되는 설치 작업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덕수궁을 조명하는 다섯 관점

먼저 OBBA(곽상준, 이소정)는 덕수궁 중화전 마당에 ‘대한연향’을 세웠다. 이들은 1902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고종 즉위 40주년의 축하 연향에 주목, 당시 사용됐던 햇빛 가리개를 재해석했다. 원기둥 모양의 구조물을 설치하고 오색 반사 필름을 부착한 발을 달았다. OBBA는 “당시 행사는 결국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향이 됐는데, 기쁨보다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슬픔이 있었을 것 같았다”며 “연향을 기쁨으로 승화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현재 덕수궁을 보면 주변이 고층 빌딩들로 둘러싸이고 궁궐 내부에서는 목조 건물과 근대의 석조 건축물들이 맞서고 있다”며 “이러한 대립과 충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양면적 성질을 지닌 오색 반사 필름이 활용됐다”고 말했다.

‘대한연향’의 발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빛을 투과하고 산란한다. 특히 저녁에는 조명을 받아 중화전 마당에 몽환적 ‘연향’을 연출해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든다. 이번에 선보이는 다섯 작업 중 가장 감각적이다.

뷰로 스펙타큘러(히메네즈 라이)는 시간을 공간적으로 풀어내는 데 몰두했다. 석조전 분수대 앞에 설치된 ‘미래의 고고학자’는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지면의 높이로 전환한 작업이다. 그는 흙과 먼지가 자연적으로 쌓일 경우 지면이 매년 3mm 높아진다는 어느 연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1,000년 후 미래에 어느 고고학자가 덕수궁을 찾는다면 3m 상승한 시점에서 현재를 내려다볼 것이라고 상상했다.

뷰로 스펙타큘러는 “궁궐을 색다른 위치에서 경험시키는 이 구조물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근대적 조망을 재현하고 있다”며 “르 코르뷔지에가 제안한 ‘돔-이노’ 시스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초기에 ‘미래의 고고학자’는 끝없이 상승하는 구조물로 구상됐다. 과감한 규모로 제안됐는데,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치며 현재의 7m 높이로 완성됐다. 건축가의 탐구가 온전하게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구조물은 덕수궁을 새로운 높이에서 조망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오브라 아키텍츠(제니퍼 리, 파블로 카스트로)의 ‘영원한 봄’은 덕수궁을 벗어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마당에 들어섰다. 가로 15m, 세로 7.6m 규모의 철골구조물에 투명 반구체들이 부착된 이 ‘온실’ 파빌리온은 덕수궁에서 시작된 ‘고종 국장’의 행렬이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밀어붙인 작업이다. 이들은 “봄이라는 기후 조건이 3・1운동, 1980년 민주 항쟁처럼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역사적 행동들의 배경이 되고, 또한 봄이라는 계절이 ‘프라하의 봄’, ‘아랍의 봄’처럼 시적 은유로 작동했다는 점에 착안했다”며 “이러한 생각들을 발전시켜 오늘날 전 지구적 문제로 떠오른 기후변화에 대한 화두를 던지려고 했다”고 밝혔다.

태양광 패널, 배기 송풍기, 알루미늄 호일 커튼, 온돌 시스템 등이 결합된 ‘영원한 봄’은 한겨울에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실내 공간을 제공한다. 관람객은 이곳을 친목 공간, 회의실 등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대한연향’​, OBBA 

‘미래의 고고학자’​, 뷰로 스펙타큘러 

영원한 봄, 오브라 아키텍츠

 

현재를 진단하는 도구로서의 유산

9월 5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세미나실에서는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건축가와의 만남’이 진행됐다. 이날 첫 번째 만남에서는 스페이스 파퓰러(라라 레스메스, 프레드리크 헬베리)와 씨엘쓰리(윌리엄 림), 전시 도록의 비평문을 작성한 가브리엘 마스트리글리(카메리노 대학교 교수)가 참여해 작업과 작업의 밑바탕에 깔린 ‘유산’ 개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먼저 스페이스 파퓰러가 ‘밝은 빛들의 문’에 대해 설명했다. 이 작업은 덕수궁 광명문의 출입구에 대형 LED 스크린을 세운 것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키운 듯한 결과물은 단순해 보이지만 면밀한 탐구가 뒷받침되어 있다. 스페이스 파퓰러는 우선 ‘우리는 무엇을 유산으로 선택하는가?’라고 질문한 뒤 “한국의 고건축에서 단청이 건축적 요소로 인식되듯, 현 세기에 건축물을 뒤덮고 있는 LED 패널들은 미래의 시점에서 유산으로 인식되지 않을까 싶다”고 답했다. 이어서 “LED 패널의 주요 제조국으로 꼽히는 한국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방법으로 광명문에 가상의 포토월을 세우는 작업을 제안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스페이스 파퓰러는 건축과 가상공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들에 따르면, 현재 우리를 중요 공간으로 안내하는 문들은 대부분 스마트폰 스크린과 같이 가상적이며,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를 쉼 없이 들락거리지만 이러한 경험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가상공간은 건축과 유사하게 통합적 ‘경험’을 제공하고, 때때로 우리의 정체성을 변화시킨다. 스페이스 파퓰러는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상황에 대한 질문은 존재론적인 것이자 건축이 제기해야 할 중요 물음”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권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매체’ 역할을 하던 건축이 디지털 시대에 그 기능을 여러 기기들(미디어)에 내주고 있는데, 이러한 시대의 건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이번 작업에서 탐구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씨엘쓰리는 그동안 진행해온 건축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덕수궁 함녕전에 설치한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를 소개했다.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는 가구 형태의 구조물로 하단에 바퀴가 부착돼 관람객이 이동시킬 수 있다. 그는 새로운 공간을 기존 도시 환경에 삽입하고 이용자의 행동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진행해온 건축 프로젝트들과 접근 방식을 공유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씨엘쓰리는 함녕전의 기능이 국정 논의 공간에서 침소로 변경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우리는 도시, 제국 등을 안정되고 영속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도시들은 이동, 이주, 전환 등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며 “함녕전의 역사와 공간 이용에서도 이러한 개념을 도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기록과 사진 자료를 통해 대한제국의 황실 가구를 파악하고, 20세기 근대 가구들을 조사해 이 둘을 조합시켰다. 씨엘쓰리는 “관람객들이 가구에 앉아보며 동서양이 만나던 당시의 황제의 일상을 상상해보길 바랐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건축평론가인 가브리엘 마스트리글리는 이번 전시의 핵심 키워드인 ‘유산’에 대해 논했다. 그에 따르면 서구적 관점에서 유산과 현대화는 대립 개념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서울을 보면 두 개념이 연관됐음을 알 수 있다. 마스트리글리는 “발굴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다른 것을 파괴하는 근대적 개념으로, 발굴의 결과물인 유산은 항상 선별과 제거를 수반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의 ‘부아쟁 계획안(Plan Voisin)’과 스케치, 사진들을 보여주며 논의를 이어갔다. 마스트리글리는 “르 코르뷔지에의 제안은 기존 도시 구조를 백지화하는 것이기보다 과거의 기념비들을 선별하고 남겨서 새로 건설된 도시와 관계 맺도록 하는 것이었다”며 “남겨진 기념비들은 새 건축물을 만들기 위한 문법을 제공하는 ‘기계’이자, 지속적으로 재해석되는 대상이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이 구조물들은 단순한 아이콘이 아니라, 도시라는 ‘기계’ 내에서 특정한 안무를 유도하고 그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 중 하나로, 르 코르뷔지에가 사람 크기 만한 카메라로 그리스 신전을 촬영하던 사진들을 보여줬다. 그가 현대인들처럼 건축물을 분석적으로 바라본 최초의 건축가라는 설명이었다.

마지막으로 마스트리글리는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과거의 유산을 단순하게 다루기보다 특정 개념을 밀어붙이고 있는데, 여기서 유산은 미래를 들여다보는, 강력한 비판적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며 “그런 작업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공간을 바라보고 이해할지를 저마다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 씨엘쓰리 

‘밝은 빛들의 문’​, ​스페이스 파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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