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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한반도의 바우하우스, 기원 없는 기원

박동민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강사)
사진
서울대학교 (별도표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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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바우하우스를 개인의 역사가 아닌 1920년대 전후 독일 사회의 역동성이 만든 시대적 산물로 본다. 바우하우스가 한반도에 전해진 구체적 경로를 밝히거나, 건축물 간의 양식적 유사성을 분석하기보다는, 바우하우스가 가졌던 새로운 건축을 향한 이상이 미국과 소련의 영향 아래 전후복구기 한반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었는지를 알아본다. 이 글은 유일한 원본으로서의 바우하우스가 아닌, 중요한 선례로서의 바우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다.

 

바이마르 독일과 전후복구기의 한반도

바우하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서 비롯된 절망감, 그리고 최초의 민주 공화정 출범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라는 두 가지 감정이 극에 달한 독일에서 탄생했다.▼1 바이마르 공화국 출범 초기, 지식인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자신들의 사회에 본질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2 이러한 분위기에서 바우하우스의 실험적 성향과 진보성, 개방성 등의 이상이 생겨났다. 바우하우스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는 다양한 사상과 예술사조가 존재했는데, 이는 냉전 시기 각 진영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바우하우스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처럼, 남북한은 3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파괴와 좌절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후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로부터 막대한 원조가 이어지면서 파괴된 국가를 새로운 근대국가로 재건할 수 있다는 시대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혼돈과 변화, 그리고 그 변화를 긍정하는 사회의 역동성은 근대적 건축 양식과 기술이 받아들여지는 토양이 되었다. 한반도 남쪽에 모더니즘이 유입된 주된 경로는 미국이었다. 전후 미국에서 바우하우스 건축은 국제주의라는 이름 아래 재해석되었다. 자유로운 평면과 투명한 입면, 현대적 재료와 구조의 사용은 미국 사회의 자유와 발전된 기술력을 상징했다. 바우하우스가 가진, 사회와 인간의 삶에 관한 관심보다는 형태적 결과가 주목받았다. 1948년 바우하우스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발터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많은 구성원들이 사회의 개선에 관심이 있었으나, 주된 성향은 매우 반-맑시즘적이었다”고 말했다.▼3 이는 미국으로 건너간 바우하우스의 유산에서 사회주의와의 관계가 의식적으로 단절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교사로 상징되는 1920년대 유럽의 기능주의 건축은 제한된 재료를 이용해 많은 건물을 빠르게 지어야 했던 전후 복구기에 남한의 건축가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다.

모더니즘 경향이 전후 재건 직후 나타난 남한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1950년대 말까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건축물들이 주로 지어졌다. 적어도 그 외관에서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부터 권력을 잡은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 시기에 건설된 고전주의 건축의 과도한 장식성을 비판하며 건설의 표준화와 산업화를 통해 더 많은 주택을 더 낮은 비용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에 따라 1950년대 중반부터 공장 생산된 콘크리트 블록을 사용한 대량생산 주택이 소련을 넘어 공산세계 전역에서 건설되기 시작했다. 표준화, 대량생산, 경제성의 고려, 근대적 재료의 사용이라는, 1920년대 말 바우하우스의 생각이 공산세계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0년대 말부터 경제적이며 대량생산에 적합한 재료와 구법, 형태의 고안 등이 건축계의 최우선 고려 사항이 되었다. 경제적 건설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대량생산되는 주택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기념비적 건축물의 외관에서도 표준화와 기계화의 이상을 반영한 기능주의 미학이 드러난다. 1960년 전후로 건설된 남북한 최고 대학교의 건물들에서도 전후 복구기에 남북한이 지향한 건축이 확인된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신관과 강당, 1959

서울대학교는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에 근거해 경성대학,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10개의 학교가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통합되면서 출범했다. 그로부터 불과 4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해 인력과 시설 측면에서 큰 피해를 보는데, 이 중 공과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은 1954년에서 1962년까지 미국 원조기관인 FOA(이후 ICA)의 지원으로 복구된다. 이 기간에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들이 수리되고 새 건물들이 건설됐다. 수원에 있던 농과대학에도 미국 원조자금으로 건물들이 지어졌는데, 이 중 실험실과 강의실을 갖춘 3층 규모의 신관과 이와 연결된 강당이 김희춘의 설계로 1959년 완성된다.

농과대학 신관은 중정을 가진 ㅁ자형 단일 건물이다. 하지만 입면에 변화를 주어 서로 다른 매스가 결합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예를 들어 정면에서 봤을 때 입구에 해당하는 좌측이 매끈한 콘크리트 면으로 처리된 것과 달리, 우측에는 띠창이 길게 나 있다. 우측의 매스는 높이가 다소 낮으며 평면상에서도 뒤로 조금 물러나 있다. 또한 전면에는 수평 루버가 사용됐지만, 건물 측면에는 세로로 난 루버가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적용되었다. 건물은 평면상에서 완전한 ㅁ자형이 아닌, 일부 매스가 북동쪽으로 돌출된 모습이다. 예산과 건설 기술이 제약된 상황에서도 건축가가 형태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벽체 형성 방식도 눈길을 끈다. 석재가 사용된 1층 입구를 제외한 벽체에는 벽돌 위로 콘크리트를 덧입혔다. 김희춘의 건축적 지향이 기능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미적으로 양식화된’ 기능주의임을 보여준다.

신관과 통로로 연결된 강당은 더욱 흥미롭다. 강당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피터 베렌스가 설계한 AEG 터빈 공장(1909)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위로 갈수록 점차 넓어지는 형태는, AEG 터빈 공장에서 측면에 돌출된 강철 기둥을 콘크리트로 더욱 강조한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 더해, 신관과의 연결 통로가 강당 전면을 가로지르게 한 연출에서 건축가의 자유로운 조형 방식을 볼 수 있다. 형태적으로 대칭인 건물에서 개구부를 조절해 비대칭을 시도한 점도 그렇다. 강당 남측면의 경우 가운데와 좌측은 전면이 유리로 덮여 있는데, 우측은 일부만 유리창으로 되어 있다. 측면도 마찬가지다. 공간의 필요에 따라 콘크리트 벽면과 유리면을 자유롭게 배치해서 비대칭적 구성을 이뤘다. 농과대학 신관의 설계는 당시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였던 김희춘이 맡았다. 이 건물은 바우하우스 교사나 AEG 터빈 공장과의 유사성 외에도, 입구 부분에 강조된 원뿔형 기둥과 수직 차양은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 형태면에서 농과대학 신관은 유럽의 다양한 기능주의 건축물, 혹은 이것을 종합한 국제주의 건축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신관 및 강당 ©liukuns 

 

김희춘은 1956년 9월부터 1957년 1월까지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연수를 받았다. 당시 미네소타 대학은 1954년 학장으로 부임한 랠프 랩슨에 의해 근대적 건축교육이 확립되어 있었다.▼4 랠프 랩슨은 1942년에서 1946년까지 시카고의 디자인 인스티튜트에서 건축을 가르쳤는데, 시카고 디자인 인스티튜트는 바우하우스의 교사였던 라슬로 모호이-너지가 설립한 뉴바우하우스에 기원을 둔다. 또한 랩슨이 그 후 1954년까지 재직한 MIT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마르셀 브로이어 등이 자리 잡은 하버드 대학교와 함께 바우하우스의 새 거점이 된 캠브리지에 위치했다. 랠프 랩슨과 미네소타 대학, 그리고 김희춘이 1920년대 바우하우스와 1950년대 말의 서울대 농과대학 신관을 직접 연결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희미한 연결점들은 바우하우스가 1930년대 이후 독일에서 미국으로 거점을 옮기고 이곳을 통해 한국을 비롯한 자유세계 국가들에 국제주의 건축을 퍼트린 시대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서울대 농과대학의 신관 설계를 맡은 건축가가 예산과 기술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짓는’ 문제를 넘어서, 현대적 재료와 구조의 사용을 드러내고 자유로운 평면과 입면 구성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엄격하고 대칭적인 신고전주의 또는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공장 건물과 같은 기능적이고 비대칭적 형태의 건물이 새로운 시대의 대학 건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고 있던 것은 아닐까?

 

김일성종합대학교 1호 교사, 1965

김일성종합대학교는 서울대학교 설립 1년 후인 1946년 10월 1일 창립됐다. 2년 후인 1948년 본관이 완성되면서 대학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지만 한국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된다. 1954년 파괴된 본관을 복구하였으나, 시설 확장이 여전히 필요했다. 김일성종합대학교는 1960년대 들어 기존의 본관을 중심으로 156만m2의 넓은 부지에 현대적 건물을 갖춘 캠퍼스로 새롭게 계획되는데, 1호 교사는 이 계획에 따라 처음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1965년 완성된 1호 교사는 총면적이 4만 6,000m2에 달하는 대형 건축물로 지리학부, 지질학부, 생물학부 등 연관 학과가 함께 위치하고 있다. 서로 다른 높이의, 총 다섯 동의 건물들이 차례로 직교하며 ‘A-B-A-B-A식’으로 배치됐다.

이처럼 비대칭적 건물 형태는 서로 다른 기능이 요구되는, 각 학과의 실험실, 강의실, 연구실 등 프로그램을 조합하고 여기에 일조를 고려한 결과다. 1호 교사의 중심에 놓인 가장 높은 9층 건물과 양끝의 건물들은 모두 남북 방향으로 길게 놓였다. 한편 이들과 직교하며 동서로 길게 놓인 나머지 두 건물에는 연구실과 강의실이 주로 자리 잡았다. 남쪽에 면하도록 실을 배치해 일조를 최대한으로 확보하면서, 큰 가로에 인접해 소음에 노출되는 북쪽 면은 복도로 채웠다.

건물 내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자연과학 관련 학과들이 자리 잡은 1호 교사에서 중심에 놓인 건물 동에 실험실이 주로 배치됐는데 이러한 프로그램 배치로 인해 서로 다른 학부들이 실험실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5 또한 1호 교사는 평평하지 않은 구릉에 얹혀있다. 지상층에서 높이 차가 형성돼 입면에서 보다 다채로운 효과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건물 프로그램과 일조, 지형은 김일성종합대학교 1호 교사의 평면과 매스를 결정한 중요한 요소다. 물론 미적 요소도 설계에 반영되었다. 1호 교사는 원산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는 큰 도로와 직접 면하는데, 건물의 비대칭적 형태는 자동차로 오고 가면서 봤을 때 정적인 모습보다 동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도 선호되었다. 

 

 

(위) 김일성종합대학교 1호 교사 ©The Institute for Peace Affairs 

(아래) 김일성종합대학교 캠퍼스 계획, 「건축과 건설」, 1963년 12월호, p. 18

 

1호교사는 설계 초기에 평양시 도시 설계연구소에 마련된 김일성종합대학교 설계팀에서 담당했다. 그러나 이후 내각 설계총국 안에 독립적으로 마련된 김일성종합대학 설계연구소에서 설계를 맡았다. 1960년대 이후 다른 건물이 그렇듯이, 이 건물 역시 구체적으로 어떤 건축가들이 설계에 참여했는지를 알기는 어려우며 개별 인물의 행적을 토대로 바우하우스와의 연결점을 찾기도 어렵다. 다만, 당시 설계된 다른 건물들의 사례를 볼 때, 김일성종합대학교의 설계에도 소련에서 공부했거나 1950년대에 소련이나 동구권 건축가들과 함께 일한 건축가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는 추정일 뿐이다. 분명한 점은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들이,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교사의 매끄러운 흰색박스를 자신들의 지향으로 삼지않았다는 것이다. 그보다 하네스 마이어가 1930년 완성한 독일노동조합연맹학교(ADGB Trade Union School)의 단순하고 반복적인 입면과 ‘과학적인’ 설계 방법을 1호 교사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외부적으로 참조점이 될 수는 없었다. 북한에서는 해외에서 유래한 건축 양식을 따르는 행위가 ‘부르주아 형식주의’ 혹은 부정적 의미에서 ‘세계주의’ 등으로 비난 받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종합대학교 1호 교사는 중심의 9층 건물과 주변 건물의 계단부를 강조하는 수직 요소를 제외하면 장식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무한히 반복되는 듯한 창문 패턴이 건물 입면 전체를 덮고 있다. 표준화되고 대량생산된 블록으로 만들어졌음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지도자의 이름을 붙인 북한 최고 대학 건물의 입면을 장식 없이 최대한 경제적인 방식으로 처리했다는 점에서, 신고전주의로 건설된 본관 건물과 다른 1960년대 초반 북한 건축계의 지향이 잘 드러난다. ‘사치품의 필요가 아닌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하는 건축을 주창했던 하네스 마이어의 주장을 적어도 그 평면과 입면에서 볼 수 있다.

 

맺음말: 전후복구기 남북한의 건축과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우하우스가 오랜 기간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단체나 프로파간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생각(idea) 덕분에 그처럼 멀리 퍼져나갈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6 바우하우스의 가장 큰 유산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창의적 예술의 창조라는 ‘생각’에 있다. 그러한 생각 아래 바우하우스는 1920년대 다양한 예술사조를 종합했고, 결국 이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그 형태적 지향은 출범 직후부터 계속해서 바뀌었지만, 바우하우스가 가졌던 진보에 대한 열망과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정신은 한 세기 동안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이 글에서 살펴본 서울대 농과대학 건물과 김일성종합대학교 1호 교사는 분명 1920년대 바우하우스와 시간적·지리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으며 영향 관계 또한 분명하지 않다. 이 두 건물에 영향을 준 직접적 요소를 찾자면, 미국의 국제주의 양식과 소련의 대량생산된 주택 건설을 꼽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영향을 따라가다 보면 바우하우스가 가졌던 생각과 만나게 된다. 국가나 지역적 특징이 사라진 보편적 건축, 효율적이고 표준화된 생산을 반영한 건축, 권위적이고 대칭적 구성이 아닌 역동적이고 비대칭적 구성의 추구는 바우하우스가 남긴 중요한 유산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산은 1920년대 바이마르 독일을 넘어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던 남북한에서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1. William H. Jordy, “The Aftermath of the Bauhaus in America: Gropius, Mies, and Breuer,” in William H. Jordy, ed., “Symbolic Essence” and Other Writings on Modern Architecture and American Cultur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5), p. 202.
2. Justus H. Ulbricht, “The Bauhaus and the Weimar Republic – Struggles for Political and Cultural Hegemony,” in Jeannine Fiedler & Peter Feierabend, eds., BAUHAUS (Cologne: Könemann, 2000), p. 30.
3. Greg Castillo, “The Bauhaus in Cold War Germany,” in Kathleen James-Chakraborty, ed., Bauhaus Culture: from Weimar to the Cold War (Minneapolis, M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6), p. 181.
4. Dongmin Park, “The Minnesota Project: Rebuilding Seoul National University’s Architectural Engineering Department and the Formation of U.S.-Oriented Architectural Academia, 1954-1962,” Journal of the Architectural Institute of Korea Planning & Design, 34: 9 (2018), p. 120.
5. Kim Il-sung University Design Research Institute, Cabinet Office of Design, ‘Architectural Planning of the Kim Il-sung University Building No. 1’, Architecture and Construction, No. 1 (1966), pp. 17-19.

6. Paul Heyer, Architects on Architecture: New Directions in America (New York: Walker, 1978), p. 202. 


박동민
박동민은 UC 버클리 대학교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와 한국 근대 건축의 기원(2016)’으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관심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남북한의 재건 사업과 여기에 참여한 건축가들의 활동이다. 구체적으로, 냉전의 맥락에서 건축 양식과 기술 그리고 도시계획이 권력의 수단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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