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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함흥, 한반도에 새겨진 바우하우스의 흔적

임동우(홍익대학교 교수)
사진
아람 판 (별도표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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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올해 2019년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3·1운동 100주년 등으로 기념하고 있다. 책으로 접하던 근대사가 100주년이란 이름으로 재조명되면서 역사의 현재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 건축계에서는 모더니즘 운동과 관련해 여러 기념행사가 몇 년 전부터 이어졌다. 모더니즘운동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아돌프 로스의 슈타이너 하우스가 1910년 완공됐고 1917년에는 데 스틸이 결성됐으며 1919년에는 이 글에서 다루는 바우하우스가 설립됐다. 대략 10여 년 동안 모더니즘 운동의 주요 사건들을 재조명할 기회가 있었던 셈이다.

2014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는 ‘근대성의 흡수: 1914 - 2014’라는 주제로 르 코르뷔지에의 돔 이노 시스템 100주년을 기념했었다. 비엔날레 총감독인 렘 콜하스의 디렉팅 아래에 처음으로 모든 국가가 관련 주제를 다뤘다. 당시 한국관은 베니스건축비엔날레 역사상 처음으로 황금사자상을 받아 세계 건축계의 이목을 끌었다. 수상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세계가 한국 건축계의 역량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한국관 총감독인 조민석(매스스터디스 대표)이 언급했듯이, 한국의 근대를 남/북으로 나누기보다 ‘한반도’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 이 지면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자리한다. 한반도 건축의 근대화에서 근대건축을 전 세계로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던 바우하우스는 우리에게 어떠한 현재성을 던져줄 것인가?

 

북한의 도시 재건과 모더니즘

1950년 한국전쟁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이었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 도시 건설을 위한 일종의 리셋 과정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에만 63만 톤의 폭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투하된 물량(약 50만 톤)을 상회하는 수치다.▼1 북한의 도시들이 어느 정도로 ‘초기화’되었을지 충분히 가늠되며, 이는 조선 왕조의 잔여와 일본 제국의 지배 흔적이 지워져 새로운 사회주의 도시 건설이 가능해지는 기회였을 것이다. 북한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 등 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러시아와 중국이 경쟁적으로 원조에 나서며 각각 약 2.9억 루블과 2.6억 루블을 북한에 지원▼2 했고 그다음으로 동독과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헝가리 등에서도 지원이 이어졌다.▼3 지원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거대한 사회주의 블록 내의 기술・문화 등이 북한으로 함께 이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북한의 근대화가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탄압을 받으며 1930년대부터 독일 밖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에 둥지를 텄으며, 하네스 마이어는 러시아로 이주해 붉은 바우하우스 여단(Red Bauhaus Brigade)을 조직한다. 그리고 이는 극동 지역인 북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바우하우스가 주장하던 기능주의와 건설의 산업화 그리고 공업화는 바우하우스 1세대가 물러난 1940년대 후반 유럽 본토에서 재등장한다. 특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바우하우스의 이야기가 적극 회자되는데, 이는 사회주의 도시 건설이 1930년대부터 추진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 과정에서 이러한 노력들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북한도 이 물결에 편승해 사회주의 도시 건설에 힘을 쏟았다.

 

함흥 재건 프로젝트에 참여한 독일재건단과 그 가족들

ⓒ Professor Matthias Schubert D 23968 Wismar Muschelring 17 / Wikimedia Commons 

 

함흥의 재건,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흔적

북한의 전후 복구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움을 준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중 동독의 원조는 경제적인 것을 훌쩍 넘어섰다. 한반도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동독 총리 오토 그로테볼은 북한 재건을 언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일성이 그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그로테볼 총리가 제네바 회담에서 북한 대표단에게 한 재건 약속에 감사를 표하며 동독이 함흥 재건에 참여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나온다.▼4 동독의 함흥 재건 프로젝트는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함흥 재건 프로젝트는 독일작업단(DAG, Deutsche Arbeitsgruppe Hamhung)의 주도하에 진행됐다. 그로테볼 총리는 작업단 수장으로 본인의 아들인 한스 그로테볼을 임명하는데, 그가 이 프로젝트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5 독일작업단은 1955년 결성되어 1964년까지 10년간 함흥 재건을 담당하는 것으로 계획되지만 프로젝트는 실제 1962년에 종료됐다. 함흥의 도시계획 담당자로는 바우하우스에서 교육을 받은 콘라트 퓌셸이 선정돼 175명의 독일작업단원과 함께 1955년 북한에 입성했다. 이후 1959년까지 함흥과 흥남의 도시계획을 담당했고▼6 그 이후부터는 후임인 칼 좀머러가 프로젝트를 맡았다.▼7

독일작업단이 구상한 함흥의 도시 재건계획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퓌셸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함흥시 총건설계획도’를 보면, 퓌셸은 함흥 도시 개발의 축을 성천강과 수직 방향으로 설정한 뒤 함흥이 강 너머로 확장되는 안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평양에서 김일성 광장을 기준으로 대동강 맞은편에 동평양 지역을 설정하고 평양이 대동강을 중심으로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하는 계획과 유사하다. 다만 1960년대 전후 복구 과정에서 비교적 개발된 동평양과 달리 함흥의 성천강 너머 지역은 전후 복구 당시 개발되지 못했다. 지금도 함흥 중심부와의 연속성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퓌셸의 계획은 함흥의 대표 거리인 ‘정성거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정성거리는 계획 당시 동독 대통령의 이름을 따 빌헬름 피크 거리로 불렸으며 퓌셸 스스로 베를린 스탈린 거리와 닮았다고 했었다. 즉 주요 건물들과 주거 프로그램이 거리를 따라 선적으로 배치되고 이를 통해 도시가 확장되는 개념이 정성거리 계획에 반영돼 있다. 현재 이 거리에는 함경남도 문화회관(1960), 김일성 혁명사적관(1972), 동흥산 해방각 등 주요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도 자리 잡고 있다. 주요 건물 중 함경남도 문화회관은 독일작업단의 설계안으로 지어진 몇 안되는 문화시설로 알려져 있으며, 김일성 혁명사적관 역시 총건설계획도에 표시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다만 함흥시 총건설계획도에서는 이 거리가 성천강의 만세교 너머로 이어지며 함흥시를 확장하는 역할로 설정됐는데, 현재 만세교 너머로는 도시 조직이 사실상 개발되지 않았다. 

 

현재 함흥의 중심공간 

©PRAUD  

 

바우하우스, 함흥 중심광장을 계획하다

퓌셸의 계획에서 빌헬름 피크 거리가 베를린 스탈린 거리에 해당한다면, 함흥의 중심광장은 알렉산더플라츠에 대응한다. 퓌셸은 알렉산더플라츠를 염두에 두고 ‘함흥시 총건설계획도’에서 보다 명확한 형태의 중심광장을 계획했는데, 그의 후임으로 온 좀머러는 총건설계획도의 세부 계획을 작성하면서 중심광장에 주거와 문화시설, 상업이 함께 개발되어 사회주의의 위대함과 근대화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8

좀머러의 주장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독일작업단이 계획한 광장은 중심광장(Central Square)이지 상징광장(Symbolic Square)은 아니었다. 1959년 작성된 ‘함흥시 주요부분 해결시안도’를 보면 중심광장은 여러 건물들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도시 공간의 집합에 가까웠다. 이는 폴 주커가 주장한 광장 유형 중 그룹광장(Group Square)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9 좀머러는 기념비적 공간이나 건물에 집중하는 도시계획보다 거리 위주의 도시계획을 선호했는데, 이 때문인지 함흥의 중심광장과 이를 형성하는 건물들 역시 과하지 않은 스케일로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좀머러가 계획한 광장은 이전에 퓌셸이 계획한 것과 사뭇 다르다. 좀머러가 건설계획의 세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중심광장을 그룹광장형으로 계획된 연유가 궁금해지는데, 이 광장에서 어디가 전면이고 어디가 후면인지를 정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성천강과 수직 방향으로 설정된 함흥의 도시 축은 양방향성을 띤다. 한쪽 방향으로는 성천강 너머로 확장이 진행되고, 그 반대편 방향으로도 도시가 확장될 수 있다. 좀머러의 계획을 보면, 성천강 쪽으로의 방향을 강조하는 퓌셸의 안보다 광장의 북동쪽, 다시 말해 강 반대쪽 공간에 대한 고려가 더 깊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퓌셸과 좀머러 모두 중심광장을 도시의 중요 공간으로 설정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함흥 계획과 평양의 계획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평양의 경우 도시 내에 여러 위성 구역들을 배치한 뒤 광장들이 각 구역의 중심 공간이 되도록 했다. 그다음 광장들을 간선도로로 연결하고 구역과 구역 사이에 녹지대를 둬 도시의 확장을 억제하려고 했다. 이 방식은 1935년도에 작성된 모스크바 마스터플랜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함흥의 경우 도시가 선형으로 확장되도록 계획했기 때문에 광장을 기준으로 하는 방사형 구조보다 도로를 기준으로 하는 구조에 가깝다. 이는 계획도의 배치 방향에서도 짐작되는데, ‘함흥시 총건설계획도’는 도시의 축이 확장되는 방향, 즉 북동-남서 방향을 계획도의 좌・우로 배치하였다. 결국 함흥 재건에 직접 관여한 동독 건축가와 기술자들에게는 함흥의 중심 공간을 형태적으로 어떻게 계획할 것인가보다 도시를 어떤 방식으로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콘라트 퓌셸이 작성한 ‘함흥시중앙광장계획안’(1956)

Stiftung Bauhaus Dessau / ©​ (Püschel, Konrad)

(아래) 칼 좀머러가 작성한 ‘함흥시주요부분해결시안도’(1959)

©Bundesarchiv Berlin / Signiture: D20 

 

중심광장에서 상징 공간으로

그런데 현재 함흥 중심광장의 모습은 퓌셸의 계획안도, 좀머러의 안도 아닌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그룹형 광장보다는 함흥대극장(1984)이라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을 중심으로 거대한 상징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룹광장과 상징광장의 차이는 정면성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그룹광장은 방향성을 가질 수 있으나 어디가 정면이고 어디가 후면인지가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되어 있는데, 상징 건축물에 의해 구축되는 상징광장은 정면이 명확하다.

예를 들어 광화문 광장에서 정면은 광화문을 보는 방향이고, 김일성 광장에서는 인민대학습당에서 바라보는 쪽이 된다. 함흥대극장은 과연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사실 배치도나 위성사진을 봤을 때 함흥대극장의 전면을 단번에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건물의 형태적 특징도, 광장이 양쪽에 위치한다는 점도 그렇지만, 함흥의 도시 축이 성천강 방면으로 뻗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함흥대극장의 전면이 성천강을 향할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흥대극장의 전면은 그 반대편인 함흥청년공원 방향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함흥대극장을 마주보는 함흥청년공원 내 김일성 영생탑의 위치, 북한에서의 상징 공간 형성 방식에 있다. 함흥의 중심광장은 함흥대극장과 김일성 영생탑이 완공되던 1980년대에 완성됐다. 이와 관련해 평양의 상징 공간(중심 공간)을 살펴보면, 전후 복구계획에서 도시의 중심 공간으로 계획된 평양의 김일성 광장은 1980년대 인민대학습당과 그 맞은편에 주체탑이 건설되면서 ‘인민’과 ‘지도자’라는 상징성을 한번에 획득한다. 이러한 광장 구성 방식은 함흥에서도 발견되는데, ‘인민’을 위한 문화시설인 함흥대극장과 ‘지도자’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영생탑이 공간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즉 퓌셸과 좀머러가 계획한 중심광장이 상징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퓌셸과 좀머러가 현재의 함흥을 본다면 속에서 불이 끓을 것 같다. 함흥이 도시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고 근대적 모습을 갖추도록 도시 축을 설정한 뒤 그 축이 확장성을 갖도록 설계했는데, 현재의 함흥은 이들의 구상이 실현된 것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좀머러의 ‘함흥시 주요부분 해결시안도’를 보면 함흥역 앞에서 정성거리와 수직으로 만나는 도시의 축이 중요하게 설정돼 있고 이 축을 받기 위해 정성거리 쪽에 새 정부건물과 거리 중앙에는 녹지가 계획되어 있다. 현재의 함흥에서도 이 역전거리의 흔적은 발견되지만, 그 중요도는 함흥대극장 앞 광장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

이러한 변화는 복구 초반부터 있었던 독일작업단과 북한 기술자들 간의 의견 차이에서 예견됐었다. 퓌셸은 1958년에 쓴 편지에서 북한 기술자들이 도시계획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이 직주근접의 사회주의 도시보다 기념비적 건축물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10 도시 기능에 대한 상반된 이해와 관점은 결국 독일작업단이 철수한 1959년 이후 함흥의 공간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함흥 동흥산에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는 평양의 만수대에서처럼 지도자가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봐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반영된 결과다. 1960년 준공된 함경남도문화회관의 경우 독일작업단이 계획한 것으로 건축 양식 면에서 바우하우스의 언어를 따르는데, ‘함흥시 주요부분 해결시안도’에서 발견되는, 도시의 축을 받아주는 요소로 현재도 기능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바우하우스 여단의 종착역, 한반도

바우하우스 출신 건축가가 도시계획을 주도했지만, 현재의 함흥을 ‘바우하우스의 도시’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다만 바우하우스의 흔적들은 도시의 바탕에 남아서, 거리와 건물 또는 건물의 위치 등에서 읽어낼 것들이 존재한다. 함흥이 좀 더 완벽한 바우하우스의 도시로 남았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우리가 함흥에서 북한 사회의 단면을 읽어낼 수 있었을까? 도시라는 공간은 작은 물리적 실마리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고 사회를 읽어낼 여지를 가질 때 흥미로워진다. 우리가 함흥에서 느끼는 흥미로움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그중 <바우하우스 이매지니스타(Bauhaus Imaginista)>라는, 2016년부터 여러 큐레이터들과 연구자들이 모여 바우하우스의 흐름을 추적하는 전시가 세계 각지를 돌며 진행되고 있다. 함흥의 이야기는 여기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바우하우스를 쫓는 세계의 연구자들에게 한반도, 구체적으로 말해 함흥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바우하우스를 우리의 건축역사에 대입해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어찌 보면 유럽인들에게 극동으로 인식되는 한반도는 바우하우스 여단 여정의 종착역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의 건축가들에게는 어떻게 이 흐름을 우리의 역사로 이해하고 담론으로 확장시켜 나아갈 것인가 하는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1. Rosemary Foot, Substitute for Victory: The Politics of Peacemaking at the Korean Armistice Talk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0), pp. 207 – 208.

2. 1 Million Rubles at that time equals to approximately 2.6 million USD, 3 billion KRW

at today’s currency rates. (Based on Historicalstatistics.org)

3. SSSR i Koreia (Moscow: USSR Academy of Sciences, 1988), p. 256.

4. Cited in Rüdiger Frank, Die DDR und Nordkorea - Der Wiederaufbau der Stadt Hamhùng von 1954 – 1962 (Berichte aus der Politik)

5. Charles K. Armstrong, Tyranny of the Weak: North Korea and the World, 1950 – 1992 (Ithaca,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17), p. 74.

6. Konrad Püschel, Wege eines Bauhäuslers: Erinnerungen und Ansichten, (Dessau: Anhaltische Verlagsgesellschaft mbH)

7. Hideo Tomita, “Wohnkomplex in the 1930s USSR and 1950s North Korea by an East German Architect”, Proceedings of 11th International Symposium on Architectural Interchanges in Asia, September 2016, Tohoku University, pp. 2288 – 2292.

8. Charles K. Armstrong, Tyranny of the Weak: North Korea and the World, 1950 – 1992 (Ithaca,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17).

9. Paul Zucker, Town and Square: From the Agora to the Village Green Pp. Xxiii. 287. Pl. 96.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9).

10. Letter from Konrad Püschel, 30 June 1958. Bauhaus Archives, Dessau. 22/58/15. 


임동우
임동우는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도시설계 건축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교수이자 프라우드 대표다. 2013년 미국건축연맹 젊은건축가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한국관 참여 아티스트이다. 2017년 서울건축도시비엔날레에서 <평양살림>을 기획했으며 2019년 열릴 서울건축도시비엔날레에서는 도시전 큐레이터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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