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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콘라트 퓌셸의 건축과 도시

김영철(배재대학교 교수)
사진
바우하우스 데사우 아카이브 (별도표기 외)
background

바우하우스에서의 학습

콘라트 퓌셸은 데사우 교사가 완성되던 1926년, 발터 그로피우스로부터 입학 허가서를 받아 이듬해부터 바우하우스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그는 하네스 마이어를 거쳐 1930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교장으로 취임한 시점까지 교육을 받는데, 그에게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건축과 예술 정신의 무대이자 도처에 젊음의 환희가 넘치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경건한 정신에 활력이 넘치는 교수들이 있었다. 리오넬 파이닝어, 라슬로 모호이-너지,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오스카 슐레머가 바이마르에서 옮겨왔고, 이들의 제자인 조셉 알버스와 마르셀 브로이어 등이 젊은 마이스터로 발탁돼 예술과 시대의 조형에 헌신하고 있었다. 퓌셸은 바우하우스 교사를 ‘바우하우스 경당’ 이라고 불렀다.▼1

그런데 건축 분과는 1927년이 되어야 바우하우스의 교육 과정에 정착한다. 이전까지는 그로피우스가 건축 분야를 주도하고 있었지만, 다른 분야와 달리 교육 원칙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퓌셸이 판단하기에도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내세운 ‘젊은이들을 건축을 위해, 주거건축을 위해, 주거시설을 위해 교육’한다는 프로그램도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었다.▼2 그로피우스는 결국 그의 사무실 인력을 구조역학, 재료학, 설비 분야의 교수진으로 임명하고, 건축 분과를 강화하기 위해 하네스 마이어와 한스 비트베어도 임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신임 교수들에겐 교육에 전념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퓌셸은 다른 학우들과 외부 공모전과 실무에 참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정부 기관에 교과과정 개선과 교수진 확장 등도 요구하였다. 결국 그로피우스는 1928년 2월 “스위스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를 후임으로 임명한다”는 짧은 성명문을 남기고 갑자기 교장직에서 물러나기에 이른다.▼3

바우하우스는 하네스 마이어 시기에 들어 퓌셸이 새로운 건축가로 성장해갈 요람으로 거듭났다. 건축 교육이 중심에 섰으며, 설계·시공·감리 분야도 교육 과정에 포함됐다. 건축론 또한 실제 ‘대중의 삶과 기능의 순환 구조‘에 맞춰졌다. 퓌셸은 조형론 학습을 마친 후 3학기부터 마이어의 지도 아래 새로운 주거 유형, 일조 등의 기능, 그리고 정원을 주거 공간과 연계하는 방식 등을 탐구했다. 주거시설뿐만 아니라 교육시설, 교통·노동의 공간 등 도시계획상의 문제들도 새롭게 분석해갔다.

마이어의 바우하우스는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건축물의 기능과 경제성을 근본 개념으로 가르쳤다. 전임 교장인 그로피우스가 건축은 “새로운 인간을 위해 이들이 새로운 의상을 걸치고, 일상의 요구를 새롭게 충족하는 도구들과 함께 자신의 시대에 걸맞는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창했을 때, 마이어는 여기서 간과된 사회적 측면, 곧 ‘사치의 요구 대신 대중의 요구’에 부합할 것을 강조했다. 그에게 건축은 기능과 경제의 산물이었고 단순히 ‘조직’의 일에 머물러야 했다. “건축은 조직의 일이며, 미학을 다루는 영역이 아니다.”▼4 마이어의 과격한 주장은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건축론이 되었다.

퓌셸은 이러한 사상적 기반을 수용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그로피우스가 제시했던 새로운 재료, 새로운 구조, 새로운 형식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네스 마이어를 통해서 건축을 사회적 내용으로 채우는 방식을 터득했다.▼5 또한 그는 학습 과정에서 마이어가 주도했던 데사우 주거단지의 건설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이 경험은 분명히 퓌셸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건축가로 성장하는 동력이 되었다. 1930년 졸업 당시 교장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서명한 졸업 증서에도 그의 주된 관심과 성취는 ‘주거단지 계획과 특히 이를 위한 사회적 측면’이라고 명시돼 있었다.▼6

 

 

하네스 마이어와 붉은 바우하우스 여단 (이미지에서 가운데 사진이 콘라트 퓌셸) 

출처: Wissenschaftliches Kolloquium vom 27. bis 29. (Okt. 1976) in Weimar an der Hochschule für Architektur und Bauwesen zum Thema: 50 Jahre Bauhaus Dessau, p. 469. ​

 

소비에트 연방으로의 이주와 활동

“나는 이제 소비에트로 가서 일하려고 한다. 그곳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단련되고 있으며, 우리가 현재 이곳 자본주의 치하에서 투쟁하며 쟁취하려는 사회가 존재하며, 또한 사회주의가 형성되고 있는 곳이다.”▼7

공산주의자이자 스탈린 추종자였던 하네스 마이어는 독일에서 자신의 이념을 실현할 토양을 더 이상 찾지 못하자 1930년 말 퓌셸을 비롯한 다른 여섯 제자들과 함께 ‘붉은 바우하우스 여단’이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모스크바로 향한다.▼8 소비에트 연방에서 건축가들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전선에 선 건설자들이었다. 마이어는 이 노동의 전선에서 제자들과 함께 건설자이자 교육자로서, 또한 기술단의 장교처럼 활동했다. 모스크바 소재 건축 토목 소비에트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맡았고, 기프로고르 러시아 도시 및 투자 개발 연구소에서 프로젝트 개발에 참여했으며, 대학교 등 교육시설의 설계와 모스크바 확장, 동아시아 주거단지 계획 등의 도시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모스크바 활동 초기에 퓌셸을 비롯한 바우하우스 여단 구성원들은 기술교육시설 건설을 담당하는 신탁기관 기프로투스(GIPROWTUS)에 소속되었다. 이로 인해 활동 공간과 범위가 제약됐는데, 이 상황은 그들의 작업이나 생활의 측면에서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프로젝트에 앞서 사회를 깊이 이해하려고 했다. 경제 조건과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 그들의 건축과 도시 계획에서 중요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 여단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에 소비에트 측 운영 주체(기프로투스)에게 사회주의 건설의 공동 목표를 명분으로 자신들을 다른 소비에트 여단들에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결과 서로 효율적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작업은 더 큰 결실을 거두었다. 바우하우스 여단이 참여한 기프로투스의 프로젝트는 산업화 과정에서 필요한 교육시설을 짓는 사업이었다. 산업 분야의 개별 사업체가 기능, 대지 및 자연 조건, 사회적 요구 사항 등을 제시하면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소비에트 전역에 적용 가능한 교육시설의 일반 유형을 발전시켰다. 퓌셸은 그중에서 유치원, 탁아소 등을 개발하는 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하네스 마이어가 강조했듯이, 현지에서 생산되고 미숙련 노동자도 시공 가능한 재료를 선정하는 것을 계획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겼다. 건축의 조형과 관련해서는 당시 통용되던 건축물의 비례 논리와 장식 사용의 최소화 원칙보다는, 기능과 경제의 논리를 따르는 평면 구성을 더 중요한 원리로 여겼다. 그는 이 원리를 ‘건축적 질서원칙(Architektonisches Ordnungsprinzip)’이라고 불렀다.▼9

이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소비에트의 제2차 5개년 국민경제발전 계획이 시작되던 1933년 하네스 마이어의 붉은 바우하우스 여단은 해체된다. 마이어는 개인적으로 이 여단이 해체된 이후에도 여러 도시계획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1934년 창립된 건축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다른 동료들은 러시아 현지에서 교육과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또는 독일로 귀국하는데, 퓌셸은 티보 바이너, 필리프 톨치너와 함께 고르스트로이 프로젝트(Gorstroiprojekt)에 합류했다.▼10 이 무렵 소비에트 연방의 과제는 새로운 사회주의 산업도시의 건설이었다. 산업과 주거를 긴밀히 연계해서 기술과 경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사회주의 이념이 실현된 도시를 조직·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소비에트 측은 도시계획의 실무에서 고전의 전통과 국가적 건축 유산을 수용하려고 했고, 이 변화는 독일에서 온 건축가들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작용했다. ‘국가적 건축 형식’을 적용하라는 스탈린의 지침이 내려졌을 때 마르트 슈탐과 에른스트 마이 등의 독일 건축가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실망하고 결국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소비에트를 떠났다. 바우하우스의 후예들도 일부는 1937년까지 소비에트 측 동료들과의 친분, 또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면서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동안 퓌셸은 무엇보다도 “국가적 사회주의의 건설에 기여할 소명”으로 그곳 지리와 역사의 요소들을 수용하기에 이른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측의 공개적 비판이 이어지면서 이들의 건축은 가차 없이 내몰렸고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계약이 파기돼 결국 이들 건축가들은 추방되기에 이른다. 하네스 마이어는 1936년 스위스로 돌아갔고 퓌셸은 이듬해 초 모스크바를 떠나야 했다.▼12

 

콘라트 퓌셸이 속한 함흥재건단과 북한 동료들

Stiftung Bauhaus Dessau / ©​ (Püschel, Konrad)  

 

함흥 재건에 나선 도시계획가

하네스 마이어는 멕시코에서 사회주의 도시건설을 위한 토양을 새롭게 찾지만 정부와의 의견 충돌로 별다른 성과 없이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1954년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 퓌셸은 함흥에서 자신의 건축과 도시를 구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당시 구 동독의 바이마르 건축대학교에서 교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함흥을 재건하는 사업의 도시계획 팀장으로 파견돼 1955년부터 1959년까지 함흥 재건에 종사했다.

1950년대 초부터 구 동독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조직은 공산권 국가의 단결을 위해 북한 원조운동을 벌였다. 1954년 북한 외무부장관이 구 동독을 방문했을 때 오토 그로테볼 총리는 북한 지원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즉각 함흥 재건의 원조를 제의했고, 동독 정부는 1955년부터 1964년까지의 북한 함흥 재건을 위한 결의안을 통과시켜서 실행기구인 동독함흥재건단(DAG, Deutsche Arbeitsgruppe Hamhung)을 구성한다. 도시 계획가인 콘라트 퓌셸과 건축가 한스 그로테볼▼13 등 첫 해 188인의 기술단을 시작으로 1962년 조기 철수 시점까지 모두 500여 명의 실무진이 파견됐다.▼14 함흥 재건에서 도시계획을 주도한 퓌셸은 1950년 채택된 동독의 ‘도시개발 16개 기본원칙’▼15이 함흥에 적용되도록 힘썼다. 아테네 헌장의 기조를 발전시킨 이 원칙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동독 도시들을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재건하기 위한 실천 사항들이 반영돼 있었다. 아테네 헌장이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동독의 원칙은 사회주의 이념의 실현을 주안점으로 두었다. 

퓌셸을 중심으로 한 재건단은 함흥의 주거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했다. 재건단은 과거 일제 식민지기의 주거 형식과 전쟁 직후 단층의 목조 주택 등은 불합리한 것으로 판단해 철거하기로 했다. 퓌셸은 한국 전통의 도시 형식, 서울과 목포 등의 사례를 연구하여 함흥 재건 계획에 반영했다.▼16 퓌셸에게 건물의 건축적 가치는, 앞서 언급한 16개 원칙의 작성에 참여한 쿠르트 립크네히트가 내세운 주제어 ‘내적으로는 사회주의적이며 외형은 국가적’이어야 했다.▼17 그런데 이에 앞서 함흥 재건을 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작성된 계획안이 존재했다. 이 계획안은 북한의 전통과 상관 없이 작성됐으며 당시 모스크바에서 유행했던 네오바로크 도시계획 방법을 따랐다. 퓌셸은 함흥을 새로 계획하면서 기존 안을 따르는 대신, 함흥의 자연과 지형, 토질 등을 새로 조사했다. ‘민족의 과거 역사에서 진보적 전통을 찾을 것’▼18이라는 모토 아래 역사적 주거의 유형과 그 변천, 도시의 구조를 연구하며 함흥에 고유한 형식의 문제를 해결해갔다.

주거단지 계획의 요소들에는 바우하우스에서 습득한 조향, 일조, 환기, 소음, 시선의 축, 근린 등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계획에서 주거 영역의 구성으로 ‘주택소구역(Wohnkomplex)’▼19 방식을 채택했고, 이 소구역 5-6개를 바탕으로 구역을 구성했다.▼20 도시 계획의 기본 조직체로서 시위 및 퍼레이드를 열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의 중심’으로서의 광장도 각 구역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계획 방식은 16개의 기본원칙의 내용을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는 함흥 중심부에 중앙광장뿐만 아니라 주거용 고층 건축물을 도입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함흥시중앙광장 계획안’, 1959년 11월 15일 콘라트 퓌셸 작성

Stiftung Bauhaus Dessau / ©​ (Püschel, Konrad) 

 

함흥의 중심 광장에는 함경남도 도청 소재지로서의 국가기관, 시민을 위한 문화시설도 함께 배치되어야 했다. 정치를 주도하는 국가기관의 건축과 일상 인민을 위한 문화시설의 건축은 퓌셸이 함흥 도시설계를 주관하던 1959년까지 서로 다른 주제였다. 퓌셸에게는 국가와 문화 개념 가운데 국가 개념이 우선했다. 퓌셸이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룬 문제는 “도대체 도시계획에서 공산주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 공산주의가 중심부의 조형에 어떻게 결정적으로 작용하는지”였다. 그에게 “삶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문화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장치가 소멸된다면 삶이 문화로만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21 따라서 퓌셸은 국가 권력을 표상하는 정부기관은 도시의 중심에서 고층 건축의 형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그러나 1959년 말, 그의 후임인 칼 좀머러는 도시계획은 보다 민주적이어야 하고, 이러한 맥락에서 인민의 생활상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이에 따라 퓌셸이 중앙광장에 계획했던 행정건물, 즉 도위원회, 도당위원회가 중앙광장에 위치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22 또한 그는 중앙광장을 문화시설을 중심으로 계획하며, 국가기관도 저층 형식이 더 타당하고, 건축물의 구성은 퓌셸의 안과는 달리 더 개방되어 자연과의 관계를 더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퓌셸에게 후임자의 계획안은 사회주의 이념을 표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퓌셸은 이미 바이마르로 귀국한 상태였다. 좀머러의 안에 반대해 자신의 의도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함흥시 중앙광장의 건축을 사회주의적 성격의 상징 형식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과 소련의 분쟁이 있었던 1962년 함흥재건단은 급작스럽게 철수해야 했고, 이후 북한 정부는 1984년에 이르러 이곳 중앙광장에 두 건축가의 제안과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함흥대극장만을 건축하게 된다. 

 

바우하우스 유산의 복원과 기념

냉전시대의 분단은 퓌셸이 이룬 건축과 도시계획의 성과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이었던 하네스 마이어의 성과를 평가하는 데도 시선을 차단한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건축과 도시는 바우하우스 역사의 한 부분이었지만, 건축 역사학자들은 이를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 의미와 가치도 함께 묻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내용을 피하고 역사를 서술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마이어의 건축적 가치도 함께 잊혀져갔다. 아돌프 마이어는 건축가로서 그리고 바우하우스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역사가인 레오나르도 베네볼로는 그의 이름을 하네스 마이어와 혼동했고,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의 역사를 서술한 줄리오 카를로 아르간도 하네스 마이어의 이름을 ‘Mayer’로 잘못 기록했으며, 지그프리드 기디온은 그나마 둘을 혼동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저서에서 이들을 위한 지면을 거의 할애하지 않았다.▼23 공산주의자였던 하네스 마이어가 바우하우스 임용 당시 그로피우스에게 바우하우스를 정치로부터 분리하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역사가들이 단죄하려는 의도에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피우스 자신도 정치적 이유로 인해 교사를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옮겼으며, 하네스 마이어의 정치적 성향과 좌익의 성격을 모르지 않았다.

마이어와 함께 퓌셸의 건축과 도시도 잊혀져갔다. 데사우 소재 바우하우스 교사도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 상태로 한동안 잊혀진 듯했다. 그러나 퓌셸은 동독으로 돌아온 이후 1976년 바우하우스 교사의 복원 사업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를 주관하고 자문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공사감독을 맡았다. 바우하우스는 이렇게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였다. 그리고 1981년 바우하우스는 퓌셸의 개인 건축전시회를 개최하여 그가 바우하우스인으로서 건축과 도시를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1. Konrad Püschel, Wege eines Bauhäuslers. Erinnerungen und Ansichten (Dessau: Anhaltische Verlagsgesellschaft, 1997), p. 22.

2. Ibid., p. 40.

3. Ibid., p. 41.

4. Hannes Meyer, ‘Bauen’, in bauhaus, 2. (1928). H.4, p. 12f.

5. Püschel, p. 55.

6. Ibid., p. 54.

7. Hermann Funke, ‘Wer hat Angst vor Hannes Meyer?’, in Zeit., no.8 (1967), p. 5.

8. 이 단체에는 콘라트 퓌셸 이외에 필리프 톨치너, 르네 멘쉬, 티보 바이너, 클라우스 모이만, 벨라 쉐플러, 안톤 우르반이 속했다.

9. Konrad Püschel, Die Tätigkeit der Gruppe Hannes Meyer in der UdSSR in den Jahren 1930 bis 1931, in Wissenschaftliches Kolloquium vom 27. bis 29. (Okt. 1976) in Weimar an der Hochschule für Architektur und Bauwesen zum Thema: 50 Jahre Bauhaus Dessau, p. 470.

10. Ibid., p. 470.

11. Winfried Nerdinger, Philipp Tolziner. ‘Lebenswege eines Münchener Bauhäusler’, in Münchener Beiträge zur jüdischen Geschichte und Kultur, H. 2 (2012), p. 59.

12. Püschel, Die Tätigkeit, p. 472.

13. 그는 그로테볼 총리의 아들이었고, 그의 부인도 함께 재건단에 참여하였다.

14. Reference: Bundes-Archiv Berlin, DC20-630 (Bereich Außenpolitik 1950-1959).

15. 동독 정부는 1950년 9월 6일자로 이 법령을 발표하였다. 베를린을 비롯하여 2차대전으로 파괴된 여러 동독 도시의 재건을 위해 퓌셸의 동료인 에드문트 콜라인, 동독 재건부 도시계획국장인 쿠르트 립크네히트 등이 작성하였다. 이 법안은 아테네 헌장의 연장 선상에서 ‘정치적 중심 광장(politischer Mittelpunkt)‘이나 기념비적 성격의 건축물(monumentale Bauten), 시위 기능을 강조하는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도시 이념도 반영하고 있다.

16. Konrad Püschel, ‘Ein Überblick über die Entwicklung und Gestaltung koreanischer Siedlungslagen’, in Wissenschaftliche Zeitschrift der Hochschule für Architektur und Bauwesen Weimar, IV. Jg. (1958/59), H.5, 1959, pp. 459-477.

17. Lars Grummich, Der sozialistische Städtebau und sein Erbe (Hamburg: Diplomica, 2012), p. 19.

18. ’도시 개발의 16개 기본원칙’의 두 번째 항으로, 퓌셸은 함흥의 반룡산과 성천강의 지형을 고려하였고, 도시의 축 구성에서 중앙광장과 성천강에 이르는 시야의 축을 제시하는 한편, 주거 평면의 형식에서는 온돌 방식과 좌식 생활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19. 이 방식은 동독에서 사회주의 생활상에 부합하는 도시조직의 단위이며, 주택과 생필품 판매 시설, 탁아소와 유치원, 초 중등학교 등의 교육시설, 의료 시설을 갖추고, 도시 교통 체계가 외곽으로 형성되도록 한 주거 영역이다. (참고: 김민아, 북한의 주택소구역 계획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8.)

20. 중심구(Bezirk Zentrum), 회상구, 반룡구, 사포리구, 함주구 등은 6-11개의 소구역으로 구성

21. Püschel’s letter to Sommerer on November 18, 1959 [Source: Bauhaus-Archiv Dessau, Püschel, Korea, I_010202_D. p. 1.].

22. Sommerer’s letter to Püschel on March 21, 1960 [Source: Bauhaus-Archiv Dessau, Püschel, Korea, I_010202_D. p. 2.].

23. Hermann Funke, ‘Wer hat Angst vor Hannes Meyer?’ In Zeit. No. 08, 1967, p. 5. 


김영철
김영철은 고려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였고, 베를린 공과대학교 건축학과 건축이론연구소에서 예술학과 독일철학에 근거한 슈마르조의 건축이론을 연구하였다. 현재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양교육부 교수이자 토요건축강독 진행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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