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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바우하우스 운동과 남북한 건축

정인하
사진
Bauhaus 100 (별도표기 외)
background

2019년은 바우하우스 건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이를 기념해서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한국의 현대건축 역시 이 학교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바우하우스에 관한 열기는 그다지 뜨겁지 않다. 바우하우스와의 관계가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이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12일,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와 예술학교가 통합되어 새로운 학교로 조직될 무렵, 한국은 일제 식민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1916년 설립된 경성공업학교에서 이제 막 한국인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활약상은 주로 일본 잡지를 통해 흘러들고 있었다. 1930년대 박길룡과 김해경(이상) 등이 바우하우스를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지만, 그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이후 바우하우스가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면서 한국 건축과의 직접적 교류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살아남아 1950년대 이후 남한과 북한의 건축과 조우하게 된다. 이 글은 바우하우스의 정치 이념, 동아시아로의 확산, 그리고 한반도의 유입 등에 대해 살펴보고, 한국에서의 바우하우스 유산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정치적 이슈들

바우하우스의 성립과 전개에서 정치적 이슈들은 민감한 주제로 항상 따라 다녔다. 1919년 개교해서 1933년 폐교할 때까지 바우하우스의 활동 기간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존속 기간(1918~1933)과 거의 일치한다. 그만큼 이 학교가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바우하우스는 공립학교로 출발했기 때문에 학교운영을 위해 지방정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이 필수였다. 그렇지만 지방의회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지원을 달리했다.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그리고 베를린으로 옮기게 된 것도 주민 여론과 지방정부 사이의 정치적 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에서 설립된 지 몇 달 되지 않아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비판자들은 주로 바우하우스 교육의 국제주의적 태도에 반기를 들었다. 교육이 전통적이지도 않고 더욱이 독일적이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반대자들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1 이러한 비판과 반발에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훈련받은 예술가들도 가세했다. 이렇게 바우하우스의 활동은 정치적 이슈를 지속적으로 발생시켰다. 여기에는 바우하우스 교수진과 학생들의 개인적 성향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바우하우스가 설립될 무렵 유럽의 아방가르드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적 성향을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이런 경향이 있었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은 더욱 짙어졌다. 당시 독일의 주요 아방가르드 운동인 예술노동평의회, 글래스 체인, 데어 링 등을 관통한 아이디어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사회주의 사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건축을 통한 여러 예술 분야의 통합이다. 브루노 타우트와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적으로 창립한 예술노동평의회는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예술은 더 이상 소수의 사치품이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에 의해 향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운동의 선언문에는 “모든 인민의 일이 될 사회주의 예술을 찬양하자”라고 적혀 있었다. 그로피우스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급진적 사회개혁을 추구하여 바우하우스를 가장 진보적인 학교로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도 1926년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기념탑을 설계하면서 사회주의자로 오인받았다. 기념탑의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급진적 지도자인 데다가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킨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교수진들은 개인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만큼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자 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당국의 폐교 조치 이후,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를 찾아가서 “바우하우스는 어떤 이념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이념이 정치와는 상관없다”▼2고 설득했는데 외부에서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특히 하네스 마이어가 교장으로 재직한 1928년부터 1930년 동안 바우하우스는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했다. 미술평론가인 프랭크 휘트포드에 따르면, 마이어는 “근대 세계의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독트린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았다. 이런 신념 아래 바우하우스에 정치학 강좌가 개설되었고, 정치적 토론이 장려되었다. 공산당 세포조직이 형성되어 전교생의 10%에 해당하는 열다섯 명의 학생들이 여기에 가담했다. 이로 인해 바우하우스의 적대자들은 계속해서 이 학교가 볼셰비키의 온상이라는 소문을 언론에 퍼트렸다.”▼3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박해로 결국 1933년 폐교됐다. 교수진과 학생들은 해외로 뿔뿔이 망명을 떠났다. 초대 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영국을 거쳐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정착했다. 여기에 바우하우스 1기 졸업생인 마르셀 브로이어가 합류했다. 3대 교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교(IIT) 교수로 임명되었고,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루트비히 힐베르자이머와 발터 페터한스도 이 대학의 교수진으로 합류했다. 미스는 1938년 교육 프로그램을 개편하면서 IIT에 바우하우스 이념을 반영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 역시 1937년 시카고로 이주하여 뉴바우하우스를 세우고 교장이 되었다. 이렇게 주요 교수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교육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게 되면서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로 거듭나면서 바우하우스 이념은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바우하우스의 역사가 미국으로 망명한 교수진들을 중심으로 기술되어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우하우스 바이마르 교사 ⓒT.Franzen 

 

사회주의 건축가들

그렇지만 이 같은 역사에서 가려진 인물들이 존재한다. 나치 독일에서 탈출해 소련으로 이주한 이들이다. 대표적으로 바우하우스 2대 교장인 하네스 마이어를 들 수 있다. 브루노 타우트와 에른스트 마이 등 독일 건축가들도 소련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했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들의 생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 점은 1930년 바우하우스 교장직에서 쫓겨난 직후 마이어가 한 인터뷰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나는 소련에 일하러 갈 것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거기에서 사회주의가 생겨났고, 여기 자본주의 아래서 우리가 싸워서 만들려는 사회가 존재한다.”▼4

그렇지만 이들의 선택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소련에서의 활동 역시 역사에서 가려져 있다. 특히 스탈린 집권 이후 대부분은 소련을 떠나 제3국으로 행선지를 정하게 된다. 브루노 타우트는 1933년의 혹독한 정치적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소련을 빠져 나온 뒤 일본에 머물다가 최종적으로 터키에 정착했다. 에른스트 마이는 1933년에 아프리카 케냐로 건너갔다. 하네스 마이어는 다른 건축가들에 비해 보다 오래 소련에 머물렀다. 그는 소련 정착 초기에 VOPRA라는 단체에 가입해 건축을 마르크스주의로 해석하는 방법에 매달렸고, 마르크스주의 건축 원칙들을 13개로 정립했다. 하지만 1932년 소련 정부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주된 원칙으로 채택하면서, 더 이상 건축 작업을 하지 않고 도시계획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 분야에도 전통적인 바로크 방식이 재도입되면서 더 이상 본인의 생각을 펼쳐나가기가 힘들어졌다. 여기에 주변 동료들이 체포되고 추방되면서, 마이어는 1936년 스위스로 귀국했다가 멕시코로 건너가 오래 머물렀다.

바우하우스가 해체된 후 소련으로 향한 독일 건축가들의 전후 영향력은 그로피우스나 미스와 비교해서 미미한 수준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미국을 포함해 자유주의 국가들은 냉전체제 속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정보 교환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에서 이들이 펼친 활동들을 파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데사우와 바이마르가 동독 지역에 속하면서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서방에서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로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고, 이전까지 접근이 어려웠던 소위 ‘바우하우스 좌파’들에 대한 자료들이 풀려나면서 이들의 활동에 대한 재평가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의 확산

바우하우스는 비록 1933년 8월 10일 공식적으로 폐교되었지만, 그 이념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동아시아에서 바우하우스와의 채널이 가장 먼저 열린 곳은 일본이었다. 특히 일본 분리파운동의 주요 건축가들은 대학 졸업 후 독일로 건너가서 바우하우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 분리파운동은 1920년 도쿄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6명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일본 최초의 근대건축 운동이었다. 주요 멤버인 이시모토 기쿠지는 1922년에 그로피우스로부터 배운 최초의 일본인 건축가였다. 또 다른 멤버인 호리구치 수테미는 1924년부터 2년 동안 유럽에 머물며 독일 건축가들과 교류했고 1923년에 직접 바우하우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야마다 마모루는 1920년대 후반에 그로피우스를 만나기 위해 독일로 갔으며, 192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된 제2차 CIAM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렇게 일본의 젊은 건축가들이 근대건축과의 접촉면을 넓혀가면서 바우하우스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당시 일본의 건축 잡지들도 바우하우스를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신건축」은 1927년 8월과 1928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발터 그로피우스와 하네스 마이어의 건축을 소개했고, 이런 분위기는 일본의 학생들을 독일로 향하도록 이끌었다.▼5 일본 건축가들과 바우하우스 사이의 접촉은 193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야마와키 이와오는 도쿄미술대학교에서 건축을 배우고 한동안 실무에 종사하다가, 독일로 건너가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하면서 발터 페터한스로부터 사진을 배웠다. 그가 1932년에 제작한 ‘바우하우스에 대한 치명적 일격(Der Schlag gegen das Bauhaus)’이라는 포토몽타주는 당시 바우하우스가 처한 정치적 곤경을 잘 전달해주는 작품으로 여러 책에서 인용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 건축가들을 통해 바우하우스의 이념이 당시 식민지 조선에도 흘러 들어왔다는 점이다. 일본 분리파운동의 멤버였던 쿠라타 치가타다는 1928년에 도쿄고등공예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케이지코보(型而工房)를 결성하여 새로운 공예운동을 펼쳤다. 이 그룹은 “초창기에는 종합건축(Gesamtkunstwerk)에 대한 지향을 갖고 실내 전반을 대상으로 디자인 활동을 실시했으나, 쿠라타가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유럽에 건너가서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인 그로피우스로부터 근대건축을 배우고 귀국한 후에는, 생산성과 경제성 등의 합리화를 강하게 의식하고 실내공예의 표준화와 대량생산의 구현을 목표로 삼게 된다.”▼6 

 

박길룡이 설계한 보화각 ⓒJung Inha

  

1930년대 한국 건축계를 대변하는 건축가 박길룡은 1936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현대와 건축-전문화하는 건축과학’에서 쿠라타를 인용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건축론은 건축의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고, 가치의 표준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현대의 건축론이 선험적인 법칙을 견지하는 연역적 접근이 아니라, 개개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거기에 담겨 있는 본질과 미를 추구하는 귀납적이고 경험적 접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현대건축이 과거와는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즉 “과거 건축은 조형미술의 영역에서 취급되었으나, 현대의 건축은 공학적 산물로서 의의가 깊다”고 보았다. 이어 박길룡은 이런 생각이 쿠라타 치가타다▼7의 건축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며 그것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박길룡이 보기에 “쿠라타의 건축론은 그가 생각하는 바와 다소 거리는 있으나 현대건축 사조의 주류”라고 인식했다. 여기서 박길룡이 가리킨 현대건축 사조의 주류는 바로 바우하우스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보화각을 설계하는데, 그것은 바우하우스의 건축 형태를 모방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영향은 김해경(이상)의 시에서도 발견된다. 그가 쓴 <慼寬, 娤飾, 藝術>에는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모호이-너지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시의 내용은 모호이-너지가 「M」이라는 잡지에 발표한 ‘구성주의와 프롤레타리아(Konstruktivismus und Proletariat)’를 이상이 일어로 읽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모호리-, 나기이……/감각적 훈련, 감각연습/재료의 경험, 구조, 조직, 조성, 집합체/창작활동의 방법으로서의 생물공학, 원칙……책임……형식자의 자유

장식/고대에 있어서는 오나멘트란 이따금 기능/과 융합해 있었다./평면편성, 콤포지션, 콘스트락션, 전설./고전미의 공리/아카데미 교육/예술은 상부구축을 한다.

 

한국과 일본 외에도 바우하우스는 중국의 근대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우하우스의 이념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채널은, 1879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상하이 세인트존스 대학교를 통해서였다. 중국 건축가 황주오센은 영국 AA스쿨을 졸업하고서 그로피우스가 교장으로 있었던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한 다음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1942년 그는 세인트존스 대학교에 건축과를 개설하는 임무를 떠안는데, 그때 리하르트 파울릭을 교수로 초빙하며 바우하우스식 교육 방식을 도입했다. 파울릭은 데사우 바우하우스에서 6개월 수학한 이후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한스 포엘지히로부터 건축을 배운 독일 건축가였다. 그는 1927년 졸업 후 그로피우스 사무실에 들어가서 데사우 주택의 설계에 참여하기도 했다. 파울릭은 자신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치의 집권 이후 돌격대로부터 공격을 받고서 독일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그의 행선지는 소련이 아닌, 그의 대학 친구가 있던 중국 상하이였다. 1933년 상하이에 도착했던 그는, 그의 동생과 함께 모던 홈즈라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건축과 실내장식, 그리고 무대 디자인을 다루었다. 바우하우스 이념은 이들 작품들을 관통하며 등장하고 있다.▼8 그리고 세인트존스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서도, 주로 바우하우스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훗날 이 대학은 동지대학교로 흡수되어 중국 현대건축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한반도에 남긴 흔적들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에 돌입한 후, 바우하우스는 한반도에 다시 찾아왔다. 바우하우스와의 접촉은 두 방향으로 진행됐다. 첫 번째 접점은 김종성이 1956년 IIT에 입학하면서 만들어졌다. 당시 이 대학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힐베르자이머가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들이 이 대학에서 세운 교과 과정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는데, 김종성은 그것에 따라 건축가로 성장했다. 그는 1972년까지 미스의 사무실에서 일했고, 그 후로 IIT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78년에 한국에 귀국하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남겼다.

두 번째는 북한의 전후 재건을 위해 동독의 건축가들이 함흥을 방문하면서였다. 1954년 동독 정부는 188명의 동독 기술전문가를 북한에 파견하여 전쟁 중에 파괴된 함흥을 복구하는 것을 도왔다. 이들 전문가 사이에는 여러 명의 건축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네스 마이어의 제자였던 콘라트 퓌셸도 그중 한 사람으로, 그는 함흥 도시계획과 단지계획의 책임자였다. 현재 함흥에는 동독 출신 건축가들이 설계한 바우하우스식 주거단지와 건축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퓌셸이 바우하우스 아카이브에 남긴 함흥 도시계획 관련 도면들은, 바우하우스 이념이 사회주의 도시계획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 중반 김정일의 등장 이후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북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남한의 경우 1970년대 이후에도 바우하우스의 영향은 지속되어, 그때는 주로 미국 대학에서 교육받은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들은 귀국 후 군사정권의 경제개발에 발맞추며 건설 정책을 주도했고, 바우하우스 이념은 대규모 건설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으로 채택되었다.

 

 

1. Justus H. Ulbricht, ‘Un-German activities, attacks from the right, 1919 – 1933’ in Bauhaus conflicts, 1919 – 2009, ed. Philipp Oswalt (Hatje Cantz, 2009), p. 18.

2. Tom Dyckhoff, ‘Mies and the Nazis’, in the Guardian, 30 Nov. 2002.

3. Frank Whitford, Bauhaus, trans. Dae-il Lee (Seoul: Sigongsa, 2000), pp. 190-191.

4. In Sovremennaia architektura, no. 5 (1930), Moscow, (Russian). As cited in Claude Schnaidt, ‘Hannes Meyer, Marxist and modernist (1889-1954)’, in The Charnel-House, https://thecharnelhouse.org/2013/08/10/hannes-meyer

5. Enrique Rojo, Transnational Connections for Architectural Design between Germany and Japan on the Eve of World War II, The ACDHT Journal , No. 2 (2017), p. 23.

6. アンヌ·ゴッソ、敷田弘子, 型而工房の方法論, フランス外務省·国立科学研究センター在外共同研究所 2009, p. 4

7. 박길룡의 글에는 ‘蔵田忠周’로 쓰여 있으나 ‘蔵田周忠’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8. 侯丽 · 王宜兵, 『鲍立克在上海: 近代中国大都市的战后规划与重建』 (上海:同济大学出版社, 2016) p. 55.


정인하
정인하는 건축비평가, 역사가, 그리고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이다. 주요 저서로는 『김수근 건축론』(1996), 『김중업 건축론』(1998), 『현대건축과 비표상』(2006), 『Exploring Tectonic Space』(2008), 『Architecture and Urbanism in Modern Korea』(201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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