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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욜로 시대의 서사적 건축

전영훈
사진
남궁선(별도표기 외)
background

불편한 천재

디자인에 대한 미학적 판단의 절대성이 의심되는 오늘날, 갈수록 건축 비평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있다. 겨우 몇 시간의 답사만으로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신작 비평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진짜 경험을 공유하고 싶지만 그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건축가의 내면과 그 결과물인 도면 역시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로빈 에반스는 ‘이상한 생각들로 가득한 바다를 외로이 여행하는 자’라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정의, 그리고 조세프 콘라드의 소설 『비밀 요원』에 등장하는 ‘정직하지만 정신이 유아기에 머문 스티비’가 그리는 ‘남들이 파악하기 힘든 무수한 원호와 선들이 포개진 그림’을 언급하면서 건축가와 도면의 본성을 우회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비유는 대다수 건축가에게 적용될 수 있겠지만 최문규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최문규의 작업 방식이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자동기술법 같은 것은 물론 아니다. 블랙박스와도 같은 뇌속에서 이루어진 결정들이 켜켜이 누적되는 작업 과정과 그 결과물의 바탕에서는 자동기술법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성적, 규범적 원칙과 개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최문규의 장점은 상반되어 보이는 두 극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숙련된 방식으로 이 둘을 조율해내는 능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동일한 건축가의 작업으로 묶기 어려운 건축물들이 생산된다. 이러한 다면성은 건축가의 사유와 그가 구사하는 언어 속에서도 비슷하게 감지된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비트루비우스의 규범적 고전성, 클로드 페로의 의심의 근대성, 로버트 벤츄리의 지루함을 거부하는 탈근대성을 동시에 접할 수 있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 2편에 등장하는, 액체금속으로 구성되어 수많은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T-1000형 사이보그와 같다. 원칙이 진부해 보이는 데 비해 구체적 방법론을 파악하거나 관통하는 스타일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작업 결과물의 다면성이 건축적 가치를 항상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주의와 무관하거나 협업의 결과로 양산되는 수많은 건축물들이 도시를 채우고 있지 않은가. 건축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질(質)’에 대한 논의가 동반되어야 하는 이유다. 최문규의 작업에는 다양성의 미덕을 넘어서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의 기본에 충실한 가운데 그가 생산해내는 유형들이 새로운 대안적 정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 미학보다 서사적 건축의 힘을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현대인의 실존적 공간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대안의 정형화

최문규로부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 건축 개념에 대한 설명을 들은 바 있다. 대지를 포함해 주어진 환경과 관련되는 다양한 조건 검토, 건물 프로그램에 대한 충실한 해석, 그리고 건축의 구축성에 대한 세밀한 탐구다. 세 개념은 별개로 보이지만 순차성과 연관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이 개념들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적의 결과물을 찾아내는 일련의 과정을 이룬다. 최문규는 이를 ‘솔루션 오브 원(Solution of One)이 아닌 원 오브 솔루션(One of Solution)’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자체로 새로운 개념은 아니며 케네스 프램튼이 말하는 ‘바탕 위의 형’에 관한 담론과도 유사하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그의 특별한 해법이 새로운 대안으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뒤 전형화되는 데 있다. 이는 주어진 대지와 조건들이 도시적 맥락과 밀접할수록 강하게 드러난다.

대다수 건축가들이 대지와 건물의 접점에 대해 고민을 한다. 하지만 최문규는 이러한 고민에서 특히 섬세하며 이는 작업 전반에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다. 초기 구상 단계에서 작업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인사동의 보행이 연장된 쌈지길, 대지 단차를 이용해 열린 외부 공간을 확보한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다양한 레벨에서 외부 공간으로 이어지는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실은 모든 작품이 해당되며 기법 또한 다양하다. 주어진 조건들을 검토하는 작업에서 시작해 도시를 대지에 잇고, 그 대지를 다시 건축에 연결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프로그램에 대한 적절한 안배가 이루어진다. 여기에 맞는 최적의 구법을 찾고자 다양한 대안들을 검토한다. 이러한 시도가 새롭지는 않으며 특히 유럽의 경우 제도적으로 강제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를 작업의 기초로 일관되게 삼거나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도쿄의 오모테산도 힐즈에서, 파리의 그랑 아르세에서 비슷한 공간감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들과 우리의 도시-건축 생산의 토대가 다른 현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몇 년 사이에 한국 건축의 다음 세대를 잇는 이들의 작업에서 최문규의 건축과 유사한 유형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도 그의 건축의 선취성을 인정할 수 있다.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건축의 서사성

‘그동안 자신이 지켜준 인간이 외부의 놀라운 광경을 보기 위해 개구부를 만드는 순간,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하는 벽과 그 순간 탄생하는 기둥’에 대한 이야기. 루이스 칸의 ‘벽의 동화’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건축십서』에 기술한 리네아멘툼(lineamentum)의 개념을 쉽게 풀어낸 이야기다. 그런데 이 동화에는 파사드 미학을 언급한 원전과는 다른 두 가지 포인트가 숨어 있다. 알베르티의 경우 입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향한다면 동화에서는 시선 방향이 내부에서 외부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디자인의 문제를 의인화된 벽과 인간 사이의 작용으로 확장했다는 점이다. 최문규의 건축에서 도시와 건축의 접점에 해당하는 표피가 결정되는 과정은 이 동화와 유사하다. 그의 작업에서는 외부에서 건물을 감상하는 목적의 입면 디자인이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실제로 본인도 파사드 디자인에 들이는 과잉 공력에 부정적 입장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때로 엉뚱하다 싶은 지점에서 재료 선택과 창호 결정의 이유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지혜관의 경우 “워낙 큰 빨간 벽돌건물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 벽돌을 그대로 가져다가 사용하고, 서울시립대학교 100주년 기념 시민문화교육관(이하 서울시립대 시민문화교육관)에서는 “다른 형태를 찾을 이유가 없어서” 평범한 정사각형 창문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거칠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디자인의 문제를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며, 작업 과정에서 힘을 쏟는 부분이 따로 있다고 본다. 최문규의 작업에서 파사드는 도시를 포함한 주변 환경과 건축, 그리고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사회적 관계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담고자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때로는 우발적으로 결정된다. 건축가의 작업을 몇 단어로 규정할 때 언급되는 선호 재료 혹은 조형 언어가 그에게는 보이지 않으며, 실제로도 매 작업마다 다른 디자인과 재료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대중들, 심지어 어린이들도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들이 생산되고 있다.

2000년 베니스비엔날레의 슬로건 ‘덜 미학적인, 더 윤리적인’을 언급하며 21세기 건축의 경향이 사회적 실천과 공공성의 책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경향에도 이러한 흐름이 반영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토 도요가 수행한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구호 활동이나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저소득층 임대주택 프로젝트들을 ‘윤리’라는 카테고리로 묶는 식이다.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역사를 살펴보면 건축 담론의 핵심은 ‘미’가 아니라 ‘서사’였다. 존 듀이가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설파했듯이 예술의 본질은 감상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며, 이러한 점에서 건축은 최상의 예술이다. 그런데 20세기를 지나면서 건축은 본질적 기능인 상징과 은유의 능력을 상실한 채 추상적 심미주의에 빠지거나 자본의 욕망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인간의 삶과 경험이 담긴 서사적 건축은 사라지고 건축은 형태의 유희에 몰두하는 ‘시’로 변질됐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리’는 상실한 서사성, 건축이 외부의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회복하기 위해 차용된 용어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건축의 윤리성이 표면이라면 서사성은 핵이다. 이러한 사실은 건축의 역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수명이 긴 건축들은 흥미진진하고 공감할 만한 서사를 품고 있으며 위대한 건축가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이야기꾼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한국 건축의 취약점이 바로 이 부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처마의 곡선’(형태)이 1970년대식 표현이라면 ‘비워진 마당’(공간)은 1980년대를 대변하고 ‘불확실성’(개념)은 세기말을 휩쓸었다. 건축가의 작품 설명은 몇 문장으로 마무리되고 대부분의 작품집은 내용상 사진집에 머문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서사적 건축이 있다. 세기가 바뀔 무렵에 나온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의 공공 프로젝트부터 근래 ‘마을이 된 도서관 이야기’까지 여기저기서 서사적 건축을 접할 수 있다. 최문규 또한 21세기 한국 건축에서 ‘이야기꾼 그룹’의 선두주자다. 질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헤겔식의 시대정신의 해석이라는 명제를 폐기한 뒤 철학이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내는 작업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하게 최문규 역시 체계화된 건축 문법을 따르기보다는 기존에 생각지 못한 건축의 가치와 가능성들을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대중 앞에 내놓고 있다.

 

公 vs 公共, 나의 건축

현대건축에서 서사성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용자’다. 에이드리언 포티가 지적했듯이 사용자는 건축주 혹은 소유자와 구별되는, 다시 말해 건축을 생산해내는 자본, 권력과 무관한 평범한 시민들을 대표하는 용어이다. 이것이 건축 분야에 들어온 시점은 1950년대 이후다. 이 시기는 서구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적 국가관을 바탕으로 공공복지제도가 강화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하지만 시민 개인의 마음속에는 실존주의가 점점 퍼져나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와 이념적 충돌은 최근 우리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 지면 관계상 길게 쓸 수 없지만 지난 10년간 한국 건축은 ‘공공 건축’의 시대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개인이 점점 강조되어 왔다. 혼밥, 욜로족, 소확행 같은 신조어들은 이러한 시대상을 대변한다. 그 결과 제도는 ‘공공(公共)’을 권하는데 시민은 ‘공(公)’만 원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됐다. ‘우리’의 이야기가 모범적이겠지만 내면은 ‘나’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가고, 열린 공간 속에서 ‘우리’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나’의 삶, ‘나’의 경험, ‘나’의 기쁨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최문규의 건축이 절묘하게 대응한다.

그의 건축의 열린 공간들, 그리고 부속된 건축적 장치들은 ‘공’만 원하는 개인의 욕망, 특히 혼밥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일상과 잘 어울린다. 그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공공 공간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 그의 건축들은 분할적이다. 매스를 절대 크게 쓰지 않는다. 큰 덩어리를 가급적 잘게 쪼개어낸다. 그리고 그 쪼개진 매스들을 주변 대지와 접지성이 극대화되도록 배치한 후, 그 사이에 천천히 이어지는 램프, 미세하게 경사진 바닥, 과도할 정도로 많은 개구부들을 설치해서 동선을 최대한 많이 형성한다. 사용자들은 그렇게 분할된 공간에서 자신의 시선을 자유롭게 누리며 건축을 경험한다. 이러한 공간은 극장의 오페라 석과 같아서 앞에 스펙터클한 풍경이 펼쳐지지만 이용 방식은 내밀하다. 최문규의 작업들은 유독 블로그 혹은 유튜브 영상에 자주 등장하는데, 쌈지길에서 데이트를,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식당에서 시험 준비를,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에서 혼자 헤드폰을 끼고 편안하게 음악을 감상하는 식이다. 한 블로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건축은 “즐기기에 딱 좋다.”

 


파리 한국관 ©Hervé Abbadie

 

캠퍼스 건축

총론에 해당하는 글이 길어졌다. ‘건축’에 대한 작가의 자세와 개념이 일관되지만 ‘건물’은 토포스의 차이에 따른 우연성과 개별성이 강해서, 디자인에 대한 구체적 비평이 무의미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가령 서울시립대 시민문화교육관의 전면 건물에 붉은 벽돌을 사용한 이유는 원래 그곳에 붉은 벽돌 건물이 있어서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대지가 가진 ‘이야기’들을 축적해서 작업을 한다. 그래서 작품론보다 작가론이 더 유효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실리는 세 작품들의 조건과 프로그램은 무척 상이하다. 좁은 의미에서 캠퍼스 건축이라 할 만한 작업은 서울시립대 시민문화교육관이 유일하다. 연세대학교 법인본부는 재단 사무실이라는 사적 성격이 강하고 파리 국제대학촌 한국관(이하 파리 한국관)은 대학 캠퍼스에서 멀리 떨어진 만국 기숙사 단지 안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대 시민문화교육관 역시 컨텍스트와 프로그램을 고려하는 가운데 분할의 기법이 적절히 이루어진 점이 돋보인다.

이 건물은 박물관, 강의동, 평생교육원, 체육관, 대형 강의실 및 컨벤션센터라는 복잡한 프로그램들을 포함한다. 건물이 대지와 만나는 지점을 경계 삼아 대형 공간을 지면 아래에 집적하고 나머지 프로그램들을 쪼개서 상부에 얹힌 구성이다. 상하부 경계에는 콘크리트 띠를 둘러서 지면 아래의 공간 단위들에 시각적 통일감을 부여했다. 그 결과 연면적 2만m2가 넘는 대형 건물임에도 무거워 보이지 않으며, 특히 상부 매스들이 주변 캠퍼스 건물들과 체급이 비슷해 위압적 인상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분절은 한적한 주택가가 인접한 상황을 고려할 때 적절한 선택이지만, 하부에 무주 대공간을 확보하기에는 구조상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중앙에 위치한 강의동의 경우 옥상정원의 동선을 고려해 전면부를 캔틸레버로 돌출시켰다는 점에서 구조적 과제가 더욱 커진다. 대학 부지가 비교적 평활한 반면 이 건축물의 대지에는 2개 층 정도 경사가 있다. 이는 주변과 세 레벨에서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대학교 정문으로 이어진 주 동선을 포함해 주변 주택가, 후면의 작은 공원, 저층에 면한 야외 운동장, 그리고 인접한 대학 건물로 이어지는 다양한 출입 동선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대학에 관계된 사람들만을 위한 동선이 아니다. 지역 주민들이 “저녁에 강아지와 함께 캠퍼스를 산책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건축가의 멘트는 이 건물이 최대한 개방되기를 원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기숙사인 파리 한국관은 입주자의 70%를 한국인, 30%를 외국인으로 수용하도록 돼 있다. 택배창고까지 갖춘 한국의 기숙사들과 비교했을 때 프로그램이 비교적 단순하다. 250개의 독실과 공용 식당, 입주자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 외부인까지 고려한 편의시설, 그리고 기본적인 서비스 영역이 전부다. 반면국외라는 점에서 부지를 둘러싼 환경과 관련 정보들은 낯설고 사용자들의 생활 방식도 달리 살펴봐야 한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상위 지구단위계획이 한국보다 훨씬 정교해서 건물의 틀이 디자인에 앞서 결정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는 파리 한국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를 제약이 아니라 조건으로 대하는 건축가라면 이러한 제약이 디자인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고속도로 소음의 차단, 건축한계선을 바탕으로 공간의 골격이 완성되었으며, 프로그램들은 그 안에 적절히 배분됐다. 입면의 금속 루버는 이 지역의 일사 조건에 대응하면서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장치다. 이처럼 파리 한국관의 디자인은 쉬워 보이지만 어려움은 따로 있었다. 프로그램의 규모에 비해 수용 가능한 대지의 체적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또한 외부의 도시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작업까지 병행해야 했다. 파리 한국관이 선택한 말발굽형 배치는 이러한 난제에 대한 대응책이다. 개별 실들은 고속도로의 소음, 인접 대지의 간섭, 중앙의 외부 공간을 피해야 한다. 그 결과 세장한 유닛이 연속한 중복도 형식을 취하면서 대지 서측에 최대한 밀착되었다. 동측에는 입주자들이 모일 수 있는 홀과 옥상정원이, 중앙에는 외부인들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광장과 지하 선큰가든으로 이어지는 계단식 스탠드가 위치한다. 입주자의 안전이 중시되는 기숙사의 특성상 개방적 동선을 다양하게 포갤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지면의 개방성은 다른 작업들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한편 개별 실들이 위치한 3층부터 두 층마다 공용 주방과 식사 공간을 하나씩 마련했는데, 이는 입주자들 간의 접촉을 늘리기 위한 배려다. 기숙사에서 전체 입주자가 모이는 일이 일상적이지 않음을, 그리고 개별 실이 협소해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식당에서 몇몇 친한 학생들끼리 모여서 식사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상상이 된다. 공공 공간의 내밀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전영훈
전영훈은 중앙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원에서 역사·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로재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건축과 사회」의 편집위원장이었고 ‘건축, 책을 묻다’ 포럼과 ‘공동건축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새건축사협의회 건축사회연구소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 서울시 건축정책위원회 위원이다. 장소론, 공공 건축, 근대건축에 관한 저술과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으며 대한건축학회 논문상(2014)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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