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MSPACE는 국내 최고의 건축 포털 매거진입니다. 회원가입을 하시면 보다 편리하게 정보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Login 회원가입
Naver 로그인


[60주년 기념호] 형태적 표상과 체험적 성찰: 한국 현대 기념비성의 전개

글
최원준

「SPACE(공간)」 2026년 11월호 (통권 708호) 

 

 

 

 

기념비성(monumentality)은 사회적 산물로서의 건축이 지닌 주요한 속성이다. 그것은 사회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공적으로 드러내며, 이를 통해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도록 한다.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추모하는 시설을 넘어 청사나 문화시설 등 공공 건축 전반에서 발현될 수 있는 기념비성에서, 중요한 것은 기념의 의미가 오늘날의 삶 속에서 현재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루이스 멈포드는 1937년 ‘기념비의 죽음’에서 불변성과 영속성을 추구하는 기념비의 관념이 삶의 변화와 쇄신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1 진정한 기념비는 기억과 가치를 확정하기보다는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가 그 의미를 함께 해석하고 갱신할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이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경험과 미래의 지향으로 연결한다.

 

해방 후 재건과 개발의 시대에 우리 현대건축의 흐름에서 나타난 주요한 특징은 기념비성이 한국성, 특히 그 형태적 구현과 견고하게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문화의 고유성, 국가기관의 권위, 독립의 숭고한 의미, 그리고 종교적 추모까지 다양한 가치가 전통 건축의 형태적 해석을 통해 표현되었다. 전통유산의 형상을 조합한 강봉진의 국립종합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1966~1972),▼2 한옥 지붕의 아름다움을 철근콘크리트의 매끈한 곡면으로 추상하여 구현한 김중업의 주한 프랑스대사관(1959~1962), 기와지붕의 공포와 서까래를 번안한 김수근의 몬트리올 캐나다 ’67 세계박람회 한국관(1965~1967), 누각 형식의 본체에 초가집 형태의 지붕을 얹은 이희태의 절두산 순교기념관(복자순교성당, 1966~1967) 등 1960년대의 사례들은 전통 지붕의 형태나 구성 요소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적 조형으로 기념적 가치를 담고자 했다. 오히려 1970년대의 기념비 건축은, 부여박물관 왜색 시비(1967)로 건축계가 크게 홍역을 치른 여파도 있겠지만, 이희태의 국립경주박물관(1968~1975)이나 엄덕문의 세종문화회관(1973~1978)에서 보듯 기와지붕의 상투적 변주에 머물렀다.

기념비의 근본 목적이 대중적 소통에 있기에 역사 양식에의 의존은 비단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100여 년 전 서구의 주요 기념비 설계경기에서 나타났던 근대주의자와 (신)전통주의자의 경쟁에서 권력은 종종 공동체가 쉽게 읽을 수 있는 표현의 연속성을 갖춘 후자를 선택했다. 다만 1940년대에 새 시대의 기념비성을 두고 제기된 지그프리드 기디언과 루이스 칸 등의 활발한 논의와 더불어 다각의 대안이 모색된 반면, 우리의 시간적 전개는 달랐다. 20세기 전반기에 역사 양식을 스스로의 동력으로 극복하고 근대의 새로운 형식 체계를 확립했던 유럽과, 외세에 의한 전통의 억압과 신양식의 유입을 경험한 우리의 출발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해방 후 민족적 정체성을 재확립해야 하는 당위적 과제와 더불어, 분단의 현실에서 독재체제의 정당화와 산업화의 추진을 위해 집단적 결속을 강화해야 했던 정권의 필요 앞에, 즉각적인 수용이 가능한 전통 형태,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지붕과 처마를 통한 권위적 선언 외의 새로운 형식이 국가 기념비에서 채택될 여지는 제한적이었다. 전통 형태의 모방을 지시한 국립종합박물관 설계공모에 대한 반대나 이후 건축저널의 다양한 한국성 논의에서 보듯 많은 건축인들은 보다 진취적인 전통 해석을 도모했고, 민간 영역에서는 형태적 접근에서 벗어나 공간 구조를 통해 전통성을 구현한 김수근의 공간사옥(1971~1977)과 같은 사례가 이미 있었지만, 이러한 시각과 실재적 성취가 주요 기념비의 결정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군부독재가 이어진 1980년대에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맞아 해외의 시선까지 의식하면서 한국적 형태성에 기반한 기념적 표현은 계속되었다. 김석철의 예술의 전당(1984~1993), 김기웅의 독립기념관(1983~1987)은 이전보다 복합적인 공간구성을 선보이면서도 여전히 전통 지붕의 수사에 의지했으며, 당시 국가 기념비로서는 예외적으로 전통 형태에서 벗어난 재미건축가 김태수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1982~1986)도 공사 과정에서 수차례 기와를 추가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때마침 양식 건축의 가치에 다시 주목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돌연 국제 추세에 발맞춘 듯 보이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내내 우리의 기념적 표현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였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국제 교류의 확대, 생활양식과 가치관의 다변화가 맞물리며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전환을 맞이한 시기였다. 건축계에서는 국가 주도 프로젝트의 시대를 지나 민간시장의 규모가 커진 가운데 전통 건축의 주요 공간인 마당, 그리고 이로부터 확장된 비움에 ...

 
*기사 원문은 월간 「SPACE(공간)」 708호(2026년 11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와 함께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정기구독자는 E-매거진으로 바로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E-매거진 보러가기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원준
최원준은 숭실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건축역사, 이론,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이로재에서 실무를 익혔으며,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를 진행했다. 최근 공저로 『우리가 그려온 미래』(2022), 『김중업, 그 유산과 미래』(2025) 등이 있고, 목천건축아카이브 운영위원으로 원정수, 지순, 김종성, 유걸, 조성룡 등 건축가의 구술사업을 진행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