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5월호 (통권 702호)

대구은행 제2본점
DIALOGUE 이명진 정림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이하 정림건축) 첨단설계부문 대표이사, 기현철 정림건축 설계부문 디자인 기술 통합지원센터 SU(Strategy Unit) 디자인파트 파트장, 박재완 정림건축 설계부문 JDI(Junglim Design Innovation) BU(Business Unit) 리더, 안정택 정림건축 첨단설계부문 빅테크 BU 리더, 이호 정림건축 첨단설계부문 모빌리티 BU 소장 × 김정은 「SPACE(공간)」 편집장, 방유경 「SPACE」 기자
장소성과 공동체성: 대구은행 제2본점, 부산항 북항 마리나
SPACE: 지역성은 장소성을 기반으로 사용자, 즉 공동체와 물리적으로 연결될 때 현실에서 작동하는 것 같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대구은행 제2본점과 부산항 북항 마리나를 꼽았다. 먼저 대구은행 제2본점에서 이 주제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알려 달라.
이명진: 대구은행 제2본점은 대구은행 본점(1979) 설계를 수행하며 30년간 쌓아온 신뢰를 기반으로 시작됐다. 대구 북구 칠성동 일대는 해방 이후 1960~1970년대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견인한 섬유산업의 메카였고, 건물이 위치한 곳은 대한방직 공장 부지였다. IMF 이후 섬유산업이 쇠퇴하며 도시는 침체되었고, 대지는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 2000년대 이후 도시재생의 흐름 속에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본 사업은 도시의 역사와 장소성을 바탕으로 금융사옥 본연의 기능을 담으면서도 공공성의 극대화를 목표로 했다. 이에 효율과 보안이 중요한 금융시설임에도 법정 용적률의 3분의 2만 채우고, 연면적의 45%를 문화 공간에 할애했다. 저층부(문화시설)와 고층부(업무시설)로 영역을 구분하고, 저층부 매스를 휴먼스케일로 분절해 사방으로 열린 진입 동선을 확보함으로써 시민들이 라운지, 체육관, 북카페, 갤러리, 콘서트홀을 가깝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침체됐던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시민들과 소통하며 상생하는 공간이 되었으며,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구은행 제2본점

대구은행 제2본점
SPACE: 친환경 등급을 높이기 위해 과도한 기계장치를 도입하지 않고 적정선의 로테크를 통해 친환경 건축을 구현했다고 들었다.
이명진: 대구은행 제2본점은 정림건축에서 지속 가능한 건축을 위한 설계 프로세스(기획설계, 기본설계, 실시설계)를 최초로 정립한 프로젝트로, 내부에선 이를 ‘친환경 통합 디자인 프로세스’라고 부른다. 디자인을 완성한 이후 친환경 요소를 덧입히는 그린워싱(Greenwashing)을 경계하며 분석과 대안 작성, 의사결정 등 디자인 전 단계를 지속가능성에 근간을 두고 진행했다. 액티브 방식을 적용하면 LEED 플래티넘 등급에 맞출 수 있었지만, 가장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내는 패시브 방식으로 LEED 골드 등급을 획득했다. 대지 활용 방식과 밀도, 매스의 향과 형태, 구조의 형식과 모듈, 공간의 규모, 폭, 길이, 외피의 디자인과 디테일, 설비와 신재생에너지의 최적화 순서까지, 모든 의사결정은 환경적 근거에 기반한다. 시공과 운영에도 설계자가 깊이 관여했다. 시뮬레이션과 현장의 차이를 확인한 뒤 이를 측정, 분석 후 조정해 설계 단계에서 60% 에너지 비용 절감을 예측했는데, 준공 후 1년간 운영한 에너지 절감 데이터가 55%로 나와 초기 목표에 근접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SPACE: 장소성과 공동체성을 중시한 프로젝트로 부산항 북항 마리나도 언급됐다. ‘부산 유일의 해상공원’이라 소개했는데, 부산의 기존 워터프론트 시설들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가?
이명진: 부산항은 1876년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의 배경이자 무대가 된 장소다. 한 세기 넘게 수출 관문으로 국가 경제를 견인했던 항만의 물류 기능이 2020년 진해신항으로 이전되면서 북항 재개발이 추진됐다. 접근이 어려웠던 수변 공간을 부산 시민에게 돌려주는 ‘회복과 재생’의 의미가 주요한 특징이자 차별점이었다.
박재완: 부산의 해안선 총 연장이 150km 정도 되는데 물류항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사람이 접근할 수 없고, 접근 가능하더라도 해운대처럼 고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사유화된 성격이 강했다. 해안은 공공재인데도 해수욕장을 제외하면 시민에게 개방된 공공시설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부산 해안선의 1%, 즉 1.5km를 개방하는 워터프론트 시설을 제안한 것이다. 해안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가 건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각 층을 연결하는 테라스가 적층된 형상으로 제안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부산항 북항 마리나
SPACE: 항만시설인 마리나의 배치와 구성을 어떻게 결정했나? 여기에 지역성과 공동체성은 어떻게 반영되었나?
박재완: 설계공모 당시 발주처에서 작성한 공모요강에 ‘대중 마리나’에 대한 지향이 명확히 있었다. 일반적으로 마리나는 요트를 이용하는 일부 고객들이 이용하는 프라이빗 시설이다. 하지만 발주처는 고가의 요트 정박시설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공시설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지역사회와 연결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사업의 큰 전제였다. 생존수영장, 스킨스쿠버 풀 도입도 시설을 사계절 내내 운영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건물 배치와 디자인은 추후 완공될 부산오페라하우스의 강한 조형성을 고려해 시각적으로 두드러지지 않게 대지 형태를 따르는 매스, 정연한 입면으로 처리했다. 격식 없이 편안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층별 테라스를 두고 바다를 조망할 수 있게 했다.
SPACE: 호안선을 따라 뻗은 매스의 북쪽 끝에는 수평 루버가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입면의 특징적인 요소인데 어떤 목적으로 고안되었나?
박재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테라스가 있는 저층부에 상업시설을 배치하다 보니, 고층에 위치한 호텔 객실의 프라이버시에 문제가 있었다. 설계공모 때부터 시선을 가리기 위해 북동쪽에 수평 루버 설치를 제안했는데, 실제 시뮬레이션을 해보자 바람이 너무 세게 부딪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재료를 익스펜디드 메탈로 제작해 윈드 브레이커 역할을 하도록 했다. 처음부터 환경적 기능을 염두하고 만들지는 않았지만, 루버 덕분에 호텔 객실에서 테라스쪽 문을 수월하게 열 수 있게 됐다.

국립박물관단지 전경 ©Song Youngjoon
생태적 관계성: 국립박물관단지 마스터플랜
SPACE: 오피스 오유(Office OU)와 정림건축이 공동으로 설계한 국립박물관단지 마스터플랜 ‘세종 뮤지엄 가든스’는 신도시 녹지에 들어설 대규모 문화시설의 기본 계획을 수립한 프로젝트다. 세종시 안에 지어지는 마스터플랜으로서 도시적 관계, 생태적 태도를 어떻게 설정하고자 했나?
이호: 세종시는 환형 도시를 만들고 안을 비워 녹지로 채우는 방식으로 설계된 계획도시다. 하지만 세종 뮤지엄 가든스 마스터플랜은 반대로 작동한다. 바깥쪽을 열고 안쪽에 건축가가 최소한으로 관여해 결구하는 방식이다. 대지를 정하고 대지 안에 건축이 어떻게 자리 잡을지 오피스 오유와 논의하며 대지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흐리는 방식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하드한 경계를 치지 않고 교착 식물을 식재하는 등 물리적, 생태적으로 다양한 방식을 고려했다. 이는 ‘데툼(datum)’이라는 건축 기준면, 즉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제시됐는데 건축적으로는 작은 중앙 광장과 회랑으로 규정된다. 단지 안에 들어설 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에게 최소한의 강제성을 부여한 것이다. 당시 출품된 다른 경쟁작을 보면 큰 매스를 만들거나 부유하는 방식을 취하거나, 거대한 마운딩을 만드는 안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륨을 지우는 방식을 취했던 계획안의 유연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오히려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국립박물관단지 안에 처음으로 완공된 국립국립어린이박물관 ©Song Youngjoon

국립박물관단지 안에 처음으로 완공된 통합운영본부©Song Youngjoon
SPACE: 마스터플랜에 맞춰 국립어린이박물관을 설계했다. 생태적 마스터플랜의 개념은 이곳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나?
이호: 국립어린이박물관은 박물관단지에 완공된 첫 프로젝트로, 19만 7,000m2의 너른 부지에 들어설 여섯 개 박물관 중 하나다. 마스터플랜의 데툼 개념에 따라 조성한 회랑은 넓은 평지를 이동할 때 그늘을 제공하고 단지 전체의 시각적 풍경을 형성한다. 연속적인 캐노피 형태로 제안된 데툼은 하나의 조형, 하나의 건축적 언어를 통해 박물관단지를 하나로 엮어낸다. 수평선(캐노피)을 벗어난 각 박물관의 볼륨은 캐노피 위로 솟아나고, 그 사이사이에 영역별로 특화된 주변의 생태계를 관입해 박물관의 중정 생태계가 각 박물관의 정체정을 확립하는 요소로 확장된다. 과수원의 다채로운 색상을 반영해 국립어린이박물관의 디자인 정체성을 보여주듯, 각 박물관은 논, 하천, 습지, 숲 등 주변의 다양한 생태계를 담아 각각 차별화된 정체성을 갖도록 마스터플랜 위계에서 유도했다.

코엑스몰 리노베이션 후 정면

코엑스몰 리노베이션 후 진입 선큰
지하 도시 개발: 코엑스몰 리노베이션,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
SPACE: 서울의 대표적인 지하 상업시설인 코엑스몰은 2000년 잠실운동장역 지하와 연결해 아셈타워 및 컨벤션센터 지하에 개장했다. 이후 코엑스몰 리노베이션(2014)과 스타필드 별마당도서관(2017) 조성까지 지하 공간을 순차적으로 다루었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도시의 지하 공간이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이명진: 지하 공간은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의미와 성격이 다를 텐데,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유의미한 것은 서울과 같이 토지이용 밀도가 극적으로 높은 장소에 개발되는 경우다. 먼저 지하 개발을 통해 도시를 입체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면서 지상부를 공원이나 녹지로 전환해 공공성을 높일 수 있다. 다음으로 도보 이동성과 교통 이동성의 확보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 여름과 겨울에 지하를 통해 연속적으로 도보 이동이 가능하며, 전국의 교통망을 연결하는 TOD 사업도 지하 도시 개발을 통해 시작할 수 있다. 마지막은 도시 회복력이다. 지하 공간은 피난과 방재 목적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이러한 장점들을 결합시켜 지하 개발을 통해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려는 다양한 실천이 지구촌 곳곳에서 진행됐다. 1960년대에 개발된 캐나다 몬트리올의 지하도시 RESO는 오피스, 쇼핑몰, 주거시설과 지하철, 버스터미널 등 교통망을 지하로 연결해 겨울철 에너지 절감과 보행 네트워크를 극대화했다. 비슷한 시기에 개발을 시작해 현재도 진행 중인 헬싱키의 언더그라운드 마스터플랜(Underground Masterplan)은 데이터센터, 스포츠, 주차, 방공호, 재난시설 등 도시 인프라를 지하에 계획하고, 지상에 녹지와 공원, 주거를 두어 도시 회복력을 증진한 사례다.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 링크몰(Marina Bay Link Mall)은 여러 오피스와 두 개의 MRT역을 거대한 지하통로로 묶어 물류, 보행, 상업을 지하로 내리고 지상에 녹지와 광장을 확보해 토지이용을 극대화했다.
SPACE: 코엑스몰 리노베이션을 통해 도시의 대규모 지하 공간이 어떤 식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밀착해서 살폈을 것 같다. 당시 적용된 주요 설계 개념은 무엇인가?
이명진: 지하 공간은 점차 지상과 유사한 쾌적한 환경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리노베이션을 진행하면서 상부를 적극 개방해 빛과 공기, 자연에 노출되는 공간을 유도하고 외부와 연계된 상업 환경을 조성하는 데 공을 들였다. 몰 중심부에 25×50m 규모의 중앙광장을 스페이스 프레임 시스템으로 계획해 채광과 외기를 끌어들이고자 했는데, 이런 특징이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이 계획안을 기반으로 이후 별마당도서관을 조성하며 대규모 천창, 수직 코어와 설비와 구조가 어우러진 ‘항아리’ 공간, 에스컬레이터와 동선 체계를 도입해 넓고 쾌적한 공간을 구현할 수 있었다. 주 동선으로 쓰이는 공용부는 조명을 개선하고, 노출 기둥에는 미디어 파사드를 설치해 지하 공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길찾기(wayfinding) 기능 또한 강화했다.

코엑스몰 리노베이션 후 내부

2014년 코엑스몰 리노베이션 당시 중앙광장

2017년 중앙광장 자리에 들어선 별마당도서관
SPACE: 현재 도미니크 페로 아키텍처와 함께 진행 중인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 역시 서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대규모 지하 개발 프로젝트다. 도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보는가?
기현철: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는 궁극적으로 자동차 중심의 도시 구조를 보행과 대중교통으로 재편하고 지상부에 녹지를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다. 지상에 보행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지하에 GTX, 지하철과 같은 도시 철도를 수직적으로 적층하는 방식은 역세권 개발에서도 드문 사례다. 해당 사업이 완공되면 50만 명의 유동 인구가 발생하고, 지상에 센트럴 파크 같은 녹지가 생기면서 따라올 유익이 엄청날 것이라 본다.
SPACE: 설계팀은 지하 공간의 어떤 잠재성에 주목했는가? 또한 지하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설계 기법과 기술을 도입했나?
기현철: 지하 공간은 연중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지중(地中)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항온성은 지상 건축물 대비 냉난방 부하를 획기적으로 감소시켜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한다. 또한 태풍이나 폭우 등 지상에서 발생하는 급격한 기후변화와 자연재해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한 도심 피난처이자 활동 공간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지하 공간의 가장 큰 제약은 채광과 환기일 것이다.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라이트워크를 제안하면서 두 가지 설계 개념을 도입했다. 하나는 자연 채광 디자인이다. 선큰과 광덕트를 통해 지하 깊숙이 유입된 자연광은 쾌적함과 시간 변화를 느끼도록 한다. 다른 하나는 지하 통로를 활용한 열미로 시스템과 자연 환기다. 미로 같은 지하 구조물에 외부 공기가 통과하면 지중 온도와 열교환을 일으킨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공기가 실내로 유입되는 친환경 환기 방식을 채택했다.
SPACE: 한국종합전시장(KOEX, 1979)부터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까지 정림건축은 지상과 지하, 업무와 상업을 넘나들며 강남 도시 개발의 한 축을 맡아왔다. 이러한 연속성 안에서 도시의 대규모 지하시설이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기현철: 두 가지 정도를 제언하고 싶다. 지금까지 자동차에게 내주었던 지하 공간에서 사람이 거주하려면 먼저 이용자가 심리적, 물리적으로 안전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라이트빔을 통해 지하에 직접 자연 채광이 닿도록 하는 노력도 이러한 이유가 깔려 있다. 그다음으로 지하 공간에 들어서는 프로그램의 다양성이 확보돼야 한다. 일반적인 지하 아케이드처럼 상업시설이 연결되면 따분하고 지루한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 렌더링 이미지 ©Junglim Architecture + Dominique Perrault Architecture (DPA)
회복탄력성: 망상오토캠핑리조트, 해수면 상승 대응 프로젝트
SPACE: 개별 건축부터 대규모 시설과 도시적 스케일 작업까지 살펴봤다. 지속가능성의 화두 중 하나로 회복탄력성을 이야기했는데 최근 기후 위기에 직면해 건축과 도시가 지구적 차원에서 어떤 대비를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이명진: 회복탄력성이란 주제로 망상오토캠핑리조트 사례를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2019년 동해안에 발생한 큰 산불로 인해 동해 망상해변에 있던 캠핑장이 전소됐다. 인근 주택을 비롯해 각종 캠핑 기반시설이 사라졌는데, 동해시청에 재능 기부를 하는 형식으로 기본설계를 진행했다. 캠핑장을 다시 지으면서 화마에 취약했던 목재가 아닌 콘크리트를 사용했는데, 재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심리적 회복’의 의미가 담겨 있다. 동간 유격 거리도 넉넉히 확보하고, 설계 단계에서 화재 발생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안정택: 현재 해외 전문가들과 함께 해수면 상승에 대응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는데, 회복탄력성 개념에 가장 근접한 사례일 것 같다. 이 연구를 통해 지속가능성과 회복탄력성의 차이도 분명하게 깨닫게 됐다. 지속가능성은 대지와 같은 주어진 환경 조건이 바뀌지 않고 건축물이 유지되는 것을 생각하는 개념이라면, 회복탄력성은 환경이 바뀔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보다 총체적인 디자인이 필요하게 되더라. 예를 들어 지속가능성 디자인으로는 특정 건축물이 오래 유지되기 위한 방법을 제안할 수 있지만, 해수면 상승으로 건물이 물에 잠기는 상황에는 대응할 수 없다. 환경이 바뀔 수 있다는 전제 아래 50년 후, 100년 후를 예측하고 디자인하는 것이 회복탄력성 디자인이다. 해수면 상승에 대응하는 기본적인 개념은 ‘늦춰주고(delay), 가둬두고(store), 배출하고(discharge), 막아주고(protect)’로 정의되는데,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널리 알려진 내용이라고 들었다.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 렌더링 이미지 ©Junglim Architecture + DPA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 렌더링 이미지 ©Junglim Architecture + DPA
SPACE: 현재 기후 위기는 기존 건축과 도시에 다양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축가의 역할은 어떻게 확장될 것이라고 보는가?
안정택: 연구를 진행하면서 건축가의 업역이 계속 새롭게 정의되고 있음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건축가는 계약 관계로 볼 때 ‘대지 경계선 안’의 일만 책임지는 전문가다. 하지만 기후변화가 초래할 자연재해에 대비하려면 ‘대지 경계선 바깥’, 즉 마을이나 하천과 같은 도시적 차원의 접근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타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하되 이들이 지닌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퍼실리테이터의 역량이 더욱 요구되고 있다. 현장 리서치를 함께 진행했던 연구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위험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기업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역할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실제로 여러 차례 대홍수를 겪었고, 해수면 상승의 위협을 겪은 나라인 네덜란드 출신 연구진들은 “우리는 오래전부터 기후변화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니 물에 대항해 싸우기보다 물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이 널리 확산되기 위해 선도적으로 연구와 실천을 계속해나가는 것이 대형 설계사의 역할이라는 생각도 든다.

망상캠핑장의 화재 직후 모습 Images courtesy of Donghae City

현재 망상오토캠핑리조트 ©Kim Changmook
R&D의 역할과 협업, 조직설계의 힘
SPACE: 앞서 여러 프로젝트에서 회사 내부의 친환경팀인 그린테크(GT)팀이 언급됐는데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아가 정림건축이 수행한 이러한 경험들은 어떻게 축적되고 활용되고 있나?
이명진: 2009년 친환경팀에서 시작된 그린테크팀은 조직된 지 20년 가까이 됐다. 그동안 수행했던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지속가능성 혹은 친환경 건축 관련 데이터가 축적된 조직이다. 팀의 주된 업무는 설계팀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해당 데이터를 기반으로 건물의 지향점이나 요구 등급에 맞춰 지원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체적으로 연구하는 R&D다. 설계 지원 측면에서는 그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 차원의 프로젝트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다.
SPACE: 끝으로 정림건축의 시선이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어떻게 확장되고 심화되어 가고 있는지 비전과 방향성을 공유해 달라.
이명진: 최근 우리는 친환경 기술을 혁신 기술과 융합하는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인류가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을 활용하면서 환경을 파괴하는 역사를 밟아왔다면, 현재의 혁신 기술로 어떻게 환경을 구원할 수 있을지 모색하는 것이다. 데이터 주도(data-driven) 방식과, 근거 기반(evidence-based)의 자료 취합을 통해 친환경 기술의 활용 가능성도 높아졌고 설계 프로세스마다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예상한다. 구체적으로 정림건축이 현재 준비하고 있는 도전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올해부터 정림건축에서 수행하는 모든 대표 프로젝트에 친환경 통합 설계 프로세스를 의무 적용하는 것이다. 그린테크팀과 함께 기획설계부터 실시설계까지 설계사에서 진행하는 모든 프로세스를 환경적 관점에서 다시 재규정하는 가이드라인을 수립했다. 둘째, 이를 실행하기 위한 별도 매뉴얼을 개발하고, AI를 포함한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을 주도하는 디지털 전환팀(DT팀, Digital Transformation)과 협업해 실질적인 시뮬레이션 및 연구 툴까지 개발하고 있다. 대형 설계사의 조직설계가 이 지점에서 큰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전과정 평가(LCA, Lifecycle Assessment)다. 자재의 운송-설치-시공-철거에 이르는 전 공정의 탄소량을 측정하는 툴 개발을 최근 완료했다. 유럽의 경우 자재 회사들이 사회적 합의에 따라 공통된 방법으로 탄소량 계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설계에 활용하기가 쉽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토양이 미비한 상황이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탄소량 계측 기기를 실제 프로젝트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시범 프로젝트를 가동할 예정이다. 검증이 끝나면 이를 전체 프로젝트에 적용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대형사가 앞서서 순차적으로 지향점을 제시하고 테스트를 거쳐 시스템을 구축하면, 정림건축 내부의 건축가뿐 아니라 외부로도 지속가능성에 대한 태도와 방향을 발신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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