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1월호 (통권 698호)

144(세 가지 체계의 집)
DIALOGUE 필리프 마갈량이스, 아나 루이사 소아레스, 아흐메드 벨호자, 레라 사모비치 팔라 공동대표 × 서재원 에이오에이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
‘어려운 통합’
서재원(서): 먼저 2023년, 「a+u」 팔라 특집호에 내가 기고했던 ‘사랑의 기술(Art of Love)’이라는 에세이를 언급하고 싶다. 팔라는 2013년 당시 스물다섯 살이던 필리프 마갈량이스, 루이사 소아레스에 의해 설립됐고, 직후 아흐메드 벨호자, 레라 사모비치가 합류했다. 그때는 젊은 건축가이기도 했지만 특히 유럽 재정 위기의 여파가 이어지던 때라서 실무를 지속하는 데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10년 전 프로젝트 대부분은 작은 인테리어거나 소규모 주택 리노베이션이었다. 그래서 나는 에세이에서 팔라의 실무 조건과 상황의 저변에 있는 어떤 슬픔에 주목했다. 많은 건축가들은 팔라를 굉장히 유희적이고 다채롭고 재미를 추구하는, 일종의 나이브한 태도를 갖고 있다고 보지만, 초기 작업 속에서 나는 좌절감을 보았다.
팔라: 경제 위기 이전 공부를 할 때,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박물관, 공공건물, 혹은 큰 규모의 건축을 설계하게 될 것처럼 가르쳤다. 그러나 졸업 후 유럽은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부분의 사무소들이 직원 수를 감축했고, 건설 산업도 위축됐다. 처음 3년 동안 우리는 서재원이 말한 것처럼, 인테리어 위주로 작업했다. 예산은 적고, 디자인적 수단은 거의 없고, ‘보통’ 건축가라면 프로젝트라고 부르지 않을, ‘의미 있는 건축’이라고 부르기에는 턱없이 작은 규모였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또한 좌절했다. 젊었고, 세상을 바꿀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에서는 아주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만 할 수 있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한 규모의 프로젝트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 또한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어떤 건축가들은 박물관, 학교 등의 수려한 걸작들을 설계하지만,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온 ‘진정한 건축’을 설계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몇몇의 건축가들은 아주 작고 아름다운 프로젝트들을 설계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도하는 일이다.
3년 전, 운 좋게 세 건의 공공 집합주택 설계공모에 당선됐다. 우리가 했던 모든 프로젝트를 열 배로 곱한 것보다 더 큰 규모로, 말 그대로 도시 스케일의 프로젝트다. 우리에게 낯선 스케일의 작업이었는데, 이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그간 해왔던 작은 규모의 작업이 지금 공공 집합주택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당선 후 공공 집합주택에 집착하듯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다시 ‘보통’의 프로젝트로 돌아가는 법과 이를 새롭게 보는 법을 배웠다. 스케일이나 공법 등 공공 집합주택은 과거의 작은 프로젝트들과 굉장히 다르지만, 결국에는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프로젝트를 쌓아갈수록, 각 프로젝트 간의
거리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규모가 아주 크든, 아주 작든 간에 결국 중심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 하나의 중심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서로 다른 조각들이 모여 이룬 응집된 전체, 그것은 바로 ‘어려운 통합(difficult whole)’이다.
서: 당선 이후, 사무소의 사정은 좀 나아진 건가? (웃음)
팔라: 당연하다.

144(세 가지 체계의 집)
사진과 허구 그리고 1:1 스케일 모형으로서의 건물
서: 오늘 대화에서는 이론적인 이야기보다 개별 프로젝트들에 더 집중해서 말하려고 한다. 이 특집에서 다루는 네 개의 작업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가 사진에서 드러나는 건축가의 태도다. 보통의 건축가들은 수평, 수직을 정확히 교정하고, 플래시 없는 사진을 선호한다. 그러나 팔라는 사진에서 렌즈 보정은 하지 않고, 플래시는 적극적으로 사용하더라. 현대건축 사진의 흐름 속에서 이는 흔한 선택이 아니다. 이러한 사진들은 공간을 자연스럽게 ‘경험’하도록 유도하기보다, 건축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지목’하는 데 관심이 있어 보인다.
팔라: 매우 고마운 질문이다. 우리에게 사진은 점점 더 중요한 주제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시노하라 가즈오, 하세가와 이츠코, 이토 도요와 같은, 1965년경부터 1985년까지 활동한 일본 건축가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을 실제로 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많은 건물들이 이미 사라졌고, 지난 20년 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건축에 매료된 것은 전부 그들이 남긴 ‘허구’, 즉 사진, 도면, 텍스트, 출판을 통해서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이론의 힘이었다. 물리적 건축을 넘어서 작업의 ‘허구적 구성’, ‘무대처럼 연출된 허구’가 건축 그 자체보다 더 오래 남는다는 점 말이다. 우리 또한 허구와 관련한 논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단지 세대나 거리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허구적 작업, 즉 이미지, 드로잉, 내러티브가 우리가 실제로 짓는 집보다 더 중요하다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클라이언트를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클라이언트는 자신들이 요청한 집을 얻게 되고, 우리는 그 ‘좋은 집’으로부터 수많은 허구와 연출, 수사, 내러티브를 추출해내는 것이다.
촬영을 할 때 우리는 보통 두 명, 세 명, 많게는 네 명이 함께 움직인다. 프란시스코 아센사오, 줄리에타 마고는 거의 모든 프로젝트를 촬영하는데, 둘 모두 아날로그로 작업하지만, 한 명은 훨씬 신중하고 세심하며, 다른 한 명은 더 즉흥적이고 강압적이다. 파트너인 사모비치 그리고 로리 가디너, 막심 들보, 이보 타라베스와도 종종 촬영하는데, 유럽의 좋은 사진가들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하려고 한다. 이 여러 명의 ‘행위자들’은 비판적인 시선으로 프로젝트를 바라보고, 건물을 방문하는 것만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진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짓말이기도 하다. 특정한 프레임, 하나의 각도, 정밀하게 선택된 재현이지 않나. 우리는 점차 각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재현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 명확하게 이해하게 됐다. 이러한 다른 시선들이 함께 놓이면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훨씬 더 풍부한 ‘어려운 통합’이 만들어진다.
또 하나, 사진은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다. 나는 서재원의 작업을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이미지, 도면, 텍스트를 너무 많이 들여다보아서 그 건물들을 알고 있다고 느낀다. 아마 서재원도 우리 작업에 대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무엇이 ‘현실’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진과 내러티브가 현실인지, 혹은 건물 자체가 현실인지 말이다. 우리는 건물이 1:1 스케일의 모형이라고 믿는 편이다. 누군가가 그 안에 살도록 만들어지는 거대한 모형인 것이다. 우리는 건물을 지은 다음 사진을 찍고, 이론적으로는 버릴 수도 있다.
서: 작업에서 일본 포스트모던 건축가들, 특히 시노하라와 사카모토 가즈나리의 영향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년 전, 『사카모토 가즈나리: 강연』(2015)을 읽었는데 책에 실린 공간 사진들이 굉장히 스냅샷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팔라의 사진과 촬영 태도도 엄격한 직교 투시보다는 스냅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요즘 많은 젊은 건축가들은 토마스 데만트나 토마스 스트루스와 같은, 독일어권 사진가를 선호한다. 미술관을 찍을 때도 일종의 종교적 공간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페터 춤토르나 아담 카루소의 작업처럼, 사진 속에서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팔라의 사진들은 굉장히 대중적이고, 키치하다고 느껴질 만큼 컬러풀하다.

079(매달린 집) ©Filipe Magalhães

085(박스 속 변주)
거울과 표면 그리고 초현실
서: 이 이야기를 확장해 거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작은 타일, 대리석, 페인트 등 다양한 마감 재료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거울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143(기둥을 둘러싼 집)과 171(코멘트로 이뤄진 집)에서 반달 모양, 완벽한 원형 등의 거울뿐 아니라 어떤 때는 창문 아래 쪽에 거울이 배치돼 공간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책상 위에 항상 거울을 두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즉시 떠오르게 했다. 팔라에게는 ‘거울’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팔라: 우리는 실시 도면을 ‘기념’하지 않는다. 우리의 도면은 보통 시공이나 텍토닉이 아닌 공간을 조직하는 것을 다루는, 얇은 단일 선들로 이루어진다. 기둥을 기념할 경우, 그것은 대부분 구조 기둥이 아니라 내러티브를 위한 기둥이다. 이는 우리가 시공에 열정을 특별히 들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건과 예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작업에서 가장 기념하고 싶은 것은 표면이다. 매우 작은 규모의 작업에서는 때로 이미 완결된 박스가 주어지며, 그 박스의 표면에만 개입할 수 있다. 그렇기에 프로젝트는 표면의 질적인 작동에 대한 작업이 되며, 여기서 거울은 매우 합당하고 가치 있는 요소가 된다. 거울은 페인트와 같다. 얇고, 저렴하고, 간단히 붙일 수 있다. 그리고 대상을 복제하고 공간적, 건축적으로 풍부함을 준다. 또한 벽을 감춘다. 예를 들어, 여러 레이어의 시공이 필요한 벽인 경우, 입면에 거울을 붙이면 벽은 사라지게 된다. 즉 소투 드 모라의 작업 등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구축적 기념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한 거울은 형태를 갖고 있다. 마치 칩 묘기(chip trick) 혹은 저렴한 꼼수(cheap trick)처럼, 점을 찍어 ‘표시’를 남긴다. 반달 또는 원 모양의 거울은 반사나 깊이를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특정 건축적 요소와 그 지점을 짚는다. 결국 우리 작업에서 거울은 비구조적인 기둥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공간을 조직하고, 분배하며,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 흥미롭다. 한국에서도 시공의 질이 잘 보장되지 않기에, 나 또한 구축 자체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다른 지점을 강조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과장된 마감재 혹은 문 손잡이 같은 것들로 말이다. 시공이 보장해주지 못하는 부분까지 고려해 생각과 공간을 확장하는 것인데, 팔라가 거울을 쓰는 이유도 비슷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학적으로도, 거울은 ‘기묘한(uncanny)한 감각’을 만든다. 일종의 데칼코마니 효과를 만들고, 방향성과 고정된 투시를 지운다. 그래서 내게는 초현실적인 설치 작업이나 회화처럼 느껴진다.
팔라: 171의 경우, 초현실주의적인 감각이 많다. 특히 1층 계단 옆에는 외벽 전체를 거울로 마감한 욕실이 있고, 그 때문에 계단이 두 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부분이 반사된 것이고, 실제 계단인지 알아채기 힘들어 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사실 건축주가 작은 규모의 로비 중앙에 욕실이 있기를 원했다. 거울을 통해 로비의 답답함을 완화한 것이다.
또 1층 사진에서는 색채의 조합 또한 볼 수 있다. 계단의 아래면은 밝고, 측면은 어둡다. 구조 기둥은 파랗고 빨갛다. 여기에 거울이 더해져 모든 요소들이 혼합된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어떤 면에서는 해체주의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초현실주의적이다.

171(코멘트로 이뤄진 집)
평면성
서: 특정 사진들은 러시아 구성주의 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굉장히 ‘평면적’이다. 내게 평면적이라는 감각은 15~16세기의 중세 회화들, 특히 종교화를 연상시킨다. 소실점이나 고정된 소점 없이 사물들을 나란히 병치해 깊이감을 지운 그림 말이다. 팔라의 사진과 공간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많은 근대 건축가들이 ‘볼륨’을 만드는 데 집중해왔지만, 팔라는 그림자 없는 사진이 암시하듯, 기둥, 난간, 바닥재 등 근대건축에서 종종 억압되거나 주변화된 요소들을 해방시키고, 각 건축 요소들 간의 조합과 구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면에서 팔라의 평면성은 비판적으로 보인다.
팔라: 사무소 설립 후 첫 5년 동안 평면적인 콜라주와 도면을 많이 만들어내긴 했지만 의식적으로 ‘평면적 건축’이나 ‘평면적 표현’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무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사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에 대한 논의가 다양해진 동시에, 우리가 만드는 도면의 종류도 달라져 사진 작업에 영향을 미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진의 두 가지 재현 방식이 극단으로 밀려나게 됐다. 하나는 그림자가 없는 사진이고, 하나는 플래시를 노골적으로 사용한 사진이다.
이것은 두 가지 생각과 연관되어 있다. 우선, 작업의 모든 재현은 결국 평면적이라는 사실이다. 작업은 궁극적으로 픽셀, 색, 선, 사물로 환원되고, 사물들은 실용적 가치보다는 추상적 장치, 추상적 구성으로 변한다. 또, 사진과 도면의 표현 방식이 더 선명하게 분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단일 선으로 이루어진 평면도와 단면도, 혹은 와이어 프레임을 그릴때 우리의 관심은 공간에 있다. 공간을 조직하는 것, 평면도와 단면도의 관계, 볼륨, 그리고 네거티브 공간의 형태를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노하라의 미완성 주택(1970), 이토 도요의 화이트 U 주택(1976)과 가미와다 주택(1976) 같은 작업들에서 비롯된 특정한 일본적인 공간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노하라가 그렸던 것과 같은 엑소노메트릭 이미지를 만들고, 하세가와 이츠코의 언어로 사고하고자 한다. 이러한 형태, 볼륨과 연관한 일본성은 우리가 초창기부터 천착해온 주제다. 시간이 흐르며, 이미 평면적이었던 것은 더욱 평면적으로, 이미 볼륨에 대한 것은 더욱 더 볼륨에 대한 것이 되었다. 우리가 제작하는 도면과 사진들이 더 첨예하게 양극화된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작업을 일종의 영화적 또는 사진적 관점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볼륨이 우리의 감각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지다. 포르투갈에서 마무리 중인 공공 집합주택 085(박스 속 변주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는 15개 유닛으로 이뤄져 있는데, 모든 유닛은 2×3의 비율을 갖고 있으며, 각 공간에는 하얗고 긴 벽과 검고 짧은 벽이 배치돼 있다. 결국, 여기서는 입방체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리고 오직 ‘벽’만 인지하게 된다. 순간적으로 건축은 더 이상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맞닿아 모서리들을 만드는, 표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도 큰 흥미를 느끼고 있다. 공간, 형태, 네거티브 공간, 그리고 시노하라가 이론화한 ‘의미 공간’을 해체하고, 이를 ‘의미 표면’, 즉 각각의 형태를 이루는 해체된 표면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특집에서 소개된 네 개의 프로젝트 또한 바닥과 천장의 표면이 벽과 다르게 구성됐다. 초기 작업들에서는 바닥은 하나의 요소였고, 벽과 천장은 연속적으로 처리되어 일종의 통합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수직적 요소와 수평적 요소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작업이 일련의 ‘해체’로 이뤄져 있어야 하다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작업을 기록할 때는, 이 해체된 요소들을 다시 하나의 평면 위에 모아놓는 작업을 한다.

171(코멘트로 이뤄진 집)
엄밀한 형식과 바로크
서: 프로젝트 네 개는 거의 하나의 거대한 콜라주처럼 보인다. 전부 상당히 평면적이다. 이제 156(쿠키 커터 리트리트)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나는 이 작업을 특히 좋아하는데 기본적으로 주변 맥락과 구조, 최종 평면 구성까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지점에서는 내 프로젝트인 호지(2022, 「SPACE(공간)」 661호 참고)와 닮아 있다고도 느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평면 구성과 구축된 현실 사이의 긴장이다. 특히 평면에서 알바로 시자, 이토 도요, 프랭크 게리와 같은 여러 거장들의 평면을 콜라주했다. 그들의 평면을 오려서 156의 평면 안으로 들여오는 방식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어떤 기준으로 각 평면의 어떤 부분을 이 작업 속으로 들고 왔는지, 또 어떤 조각이 ‘스몰’, ‘미디움’, ‘라지’가 된 건지 궁금했다.
모든 프로젝트의 화장실 평면 또한 흥미롭다. 때로는 샤워 부스가 자리한 찌그러진 사각 공간이 등장하고, 때로는 소변기, 양변기, 세면대를 각각 독립된 요소처럼 조합하더라. 파편적인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구성이 되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반원 형태들은 일종의 기하학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대화의 제목을 ‘생일 빌라의 수학(The Mathematics of the Birthday Villa)’으로 칭하고 싶다. 언젠가 팔라는 패리스 힐튼을 언급하며 ‘생일’이 과장된 표현의 제스처를 뜻한다고 언급했다. 팔라의 작업을 얼핏 보면 다채롭고 파편화된 구성들만 보이지만, 사실 그 아래에는 평면도를 기하학적으로 배치하기 위한 엄격한 체계가 있다. 다른 건축가들의 평면도들을 툭 오려 붙이는 듯한 매우 유희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굉장히 완고하고 철저하게 건축 내적으로 세운 원칙을 고수한다. 이 두 태도가 한 프로젝트에 공존한다.
팔라: 도면은 어떤 프로젝트에서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도면을 어떻게 그리고, 공간을 어떻게 조직하고, 이를 하나의 얇은 선으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우리의 전체 프로젝트를 규정짓는다. 이것은 단지 스타일이 아니라 사고방식 그 자체다. 156에서는 건축주 덕분에 많은 아이디어를 시도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과 공간은 세 개 블록으로 나눠졌고, 각 블록은 매우 정교하게 규정된 규모의 공용 공간과 사적 공간을 갖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수학적 패턴’을 발견했다는 느낌을 받았고 패턴을 그리기 위한 수학적 방정식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건물들을 땅에 숨겨 한 면의 파사드만을 드러나게 하자는 생각이 더해져, 각각 스몰, 미디움, 라지라는 세 개의 다른 크기를 가진 반원형 형태가 나왔다. 이 시점까지는 모든 것이 수학적이고,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었다.
하지만 사적이고, ‘바로크적’인 것을 추구하는 공간에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 까다로웠다. 아주 추상적인 패턴을 만들 것인지, 혹은 우리만의 구성을 발명해 볼 것인지와 같은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틀을 찍어내듯 여러 형태를 대입해보는 전략(cookie cutter strategy)을 고안해냈고, 아마 50가지 정도의 집들을 조합해본 것 같다. 도면을 돌려보고, 뒤집어보기도 하면서 개념적인 논쟁도 떠올랐다. 기존 평면도의 크기를 우리 프로그램에 맞게 조정해도 되는지의 문제였다. 우리가 복제하려던 것은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간들의 선 혹은 돌출부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참조는 형태를 위한 핑계를 찾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많은 옵션들을 시도해보다가 우리가 살피는 대부분의 주택들이 대략 같은 시기에 지어졌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더 엄격한 기준을 세웠다. 같은 해, 서로 다른 대륙, 존경하는 건축가들의 작업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일종의 비선형 방정식과 같은 일련의 규칙들을 만들었고, 점차 사례를 줄이면서 최종적인 형태에 도달하게 됐다.
중요한 것은 이 건물이 블록 세 개, 그리고 프로그램 세 개라는 수학적 연산의 결과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각 공간은 기둥이 없는 것, 한 개 있는 것, 두 개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네 번째 유형이 있다면, 기둥은 세 개였을 것이다. 모든 사선은 또한 서로 다른 각도로 공간을 분할한다. 그 사선은 각기 다른 도면들을 품고 있지만, 모두 동일한 구축적 단면을 갖는다. 동일한 창문, 동일한 차양, 동일한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세 공간의 원칙은 동일하지만, 스케일은 아주 다르다. 각 공간들은 가득 찬 것과 빈 것, 사회적인 것과 비사회적인 것의 대비로 이뤄진다. 하세가와 이츠코가 ‘주 공간’과 ‘부차적 공간’이라고 일컬었던 것처럼 말이다. 대비되는 공간을 강조하기 위해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벽을 검은색으로 칠하기도 했다.

143(기둥을 둘러싼 집) ©Giulietta Margot
참조적 큐레이션
서: 156 속 사다리의 디테일이 시노하라의 다니카와 주택(1972)의 것과 너무 비슷해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조금은 식상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하려고 한다. 팔라에게 참조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노하라뿐 아니라, 로버트 벤투리, 미스 반 데어 로에, 그리고 ADVVT와 같은 현대의 건축가들에 더해 마르셸 뒤샹과 같은 예술가들도 언급하고 있다.
팔라: 우리가 하는 모든 건축은 선례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건축이 여전히 도면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믿는데, 이는 기둥, 문, 창문, 지붕, 목재, 석재 등과 같은 건축 요소들로 이뤄진다. 그렇기에 이미 거의 모든 것이 발명됐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례들을 큐레이팅하는 것이다. 즉,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가져온 것들을 한 프로젝트 안에 공존시키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 영역은 아주 넓고, 그 많은 것들을 전부 같은 위계에서 다루려고 하고 있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거장들의 작업들, 포르투의 길가에 있는 평범한 건물, 앞 세대의 건축가들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우리가 존경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헌사는 그들을 베끼고,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에는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각자 인상만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를 가장 자극하는 지점이다. 요즘은 건축 비평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논쟁도 없고, 진정한 의미의 교류도 없다. 모든 것은 이미 정의되어 있고, 규범적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일본의 이전 세대가 누렸던 비평과 공유, 동료들 간의 대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이러한 대화를 시뮬레이션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서재원의 작업을 갖고 이야기를 하다가, 학생 프로젝트를 섞고, 어느 작은 예배당을 가져오고, 길 건너 건물을 넣고, 몇 년 전 우리 자신의 작업을 ‘카피캣’처럼 끌고 와서 함께 놓는 것이다. 세잔의 사다리를 특정하게 전유했던 그 사례를 복제해 만들고, 촬영한 것 또한 이와 연관한다.
서: 이러한 참조에 대한 사고방식은 포르투갈 내 팔라와 유사한 세대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는 것인가? 혹은 독자적인 철학인가?
팔라: 전혀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개소했을 때는 특별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젊은 세대 사이에서 우리는 가장 오래된 사무소다. 앞서 말했듯 졸업 이후 국내에서는 일을 찾을 수 없었고, 다른 나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새로운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자기만의 사고와 건축 방식을 구축하려는 ‘첫 번째 물결’이었던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포르투 건축은 시자와 같은 건축을 계속 추구해왔다. 이러한 방식은 한동안 합당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 적합한 해답은 아니다.
2024년 우리는 아틀리에 로컬, 프란시스쿠 아센상과 함께 ‘새로운 물결(nouvelle vague)’에 대한 책을 만들었다. 거기서 포르투갈의 젊은 건축가들 간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열악한 예산, 까다로운 건축주, 질 낮은 시공, 희소 경제 속에서도 건축적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5년 혹은 10년 후 지금을 되돌아본다면, 유럽 전역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보일 거라 믿는다. 그때는 이 집단적 에너지가 훨씬 더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143(기둥을 둘러싼 집) ©Giulietta Mar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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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제목은 콜린 로우의 『The Mathematics of the Ideal Villa and Other Essays』(1976)를 차용한 것이다.
2 로버트 벤투리는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1966) 에서 “전체 안에 존재하는 비일관성의 관계”를 “어려운 통합”의 한 양상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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