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MSPACE는 국내 최고의 건축 포털 매거진입니다. 회원가입을 하시면 보다 편리하게 정보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Login 회원가입
Naver 로그인


[INTERVIEW] 고아한 힘이 무르익다: 차이와 반복으로 나아가다 | 정재헌

사진
박영채
진행
박지윤 기자

「SPACE(공간)」 2025년 4월호 (통권 689호)​

 



차이와 반복으로 나아가다​

인터뷰 정재헌 경희대학교 교수 × 박지윤 기자​

 

안팎의 언어

박지윤(박): 꾸준히 작업해온 주택은 물론, 오피스, 호텔 등을 설계할 때도 ‘다른 성격의 집을 설계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주택뿐 아니라 다른 용도도 오래 머무르는 공간임을 강조하며 자유롭고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한 건축을 하고자 했었다. 이번 카페 3제는 ‘하나의 마을과 같다’고 언급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정재헌(정): 일반적인 카페는 하나의 오브제처럼 자기 완결적이다. 이러한 건축은 보통 형태를 강조하지만 나는 그보다 편안함을 중점에 두었다. 마을은 계획된 영역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 단지와도 구분된다. 자연발생적이며 부분들의 집합이다. 입구가 명확하지 않고 경계가 모호하며 중심과 외곽의 구분이 흐리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중심이며, 관계성에 의해 포지션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마을의 공간적 특성은 특히 미네랄 하우스(2024)에서 잘 드러난다. 미네랄 하우스는 강변을 향해 경계 없이 열려 있다. 주변 논밭의 직조에 따라 적절히 조율된 건물과 담장으로 구획된 외부 공간은 다양한 영역으로 나뉘고 연결된다. 작은 마을처럼 수공간을 중심으로 군락이 놓여 있다. 그 사이 공간들은 안과 밖, 내부와 외부, 중심과 외곽의 구분 없이 연결되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전시된 작품은 없지만 미술관처럼 함께 걸으며 즐길 수 있는 길이 이어져 있고, 건축가가 연출한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잠시 멈춰 서서 변화하는 자연을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숨겨져 있다. 

 

박: 이번 작업들은 자연과의 관계성이 유독 두드러진다. 답사를 할 때 “자연에서 뒤로 물러난 건축을 하고 싶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과거 조남호(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 대표, 「공간(SPACE)」 614호 참고)의 말처럼 “풍경에 보탬”이 되는 건축에 더 가까워 보였다. 건축의 형상, 조망을 위한 내부의 프레임들이 주변의 자연을 다시 보게 만들고 더 아름답게 여기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뒤로 물러난 건축’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풍경에 보탬이 되는 건축’에 대한 의견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정: 자연 뒤로 물러나는 것은 태도이자 목표다. 여기서 건축은 자연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배경이 된다. 풍경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앞선 태도에 가닿기 위한 방법이다. 시간이 흐르니 설계를 할 때 내가 가장 행복했던 장소가 어디였는지 떠올려보게 되더라. 덴마크에 자리한 요르겐 보와 빌헬름 워럴트의 루이지애나 미술관(1958), 제프리 바와가 작업한 스리랑카의 헤리턴스 칸달라마 호텔(1994)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건축들은 자연 속에 자리하며 자연의 배경처럼 서 있다. 또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작업한 주택에 거주하는 건축주가 있다. 근래 그 주택에 방문하니 별생각 없이 심었던 나무들이 어마어마하게 자라 있었다. 저 나무를 제대로 심었다면 좋았을걸, 내가 평생 건축을 하면서 저 나무보다 더 멋들어진 건축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은 숙명적으로 시간의 반대편에 있다면 자연은 시간의 편에 서 있지 않나. 세월이 지날수록 그 진리를 체감하고 인정하며 작업하게 된다. 

 

정취의 계획

박: 호시담 카페(2018)에서 경사로를 꺾어 올라가 건축물 레벨에 서서 앞 전경의 산세를 바라봤을 때 한 폭의 회화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다른 작업에서도 바닥과 벽의 높낮이와 프레임을 섬세하게 조율해 주변의 풍광을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도록 작업했다. 어떠한 방법으로 조율된 것인가? 

 

정: ‘터를 잘 잡으면 설계의 절반이 끝난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자연은 평지가 아니고 기복이 있으면서 계곡물이 흐르는 등 다양한 레이어들이 겹쳐져 풍광이 수려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해 드라마틱하다. 좌향(坐向)과 안대(案對)를 계획할 때는 풍경이 바뀔 여지가 있는 곳과 아닌 곳을 구별하고, 이 대지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풍경이 무엇일지 고민한다. 호시담 카페 정면에 벽을 세운 이유는 앞에 새로운 건물이 세워져도 그 너머의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근경, 중경, 원경의 언어로 말하자면, 중경까지는 담장으로 가리고 새로운 근경을 만들며 그 너머의 원경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는 마당에 식재를 하지 않고 담장으로 가릴 곳은 가리면서 담장 밖의 풍경을 담는 한국 전통 마당과 유사하다. 

 

박: 한 폭의 풍광을 경험하는 일은 어떠한 건축적 가치를 가지는가?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정: 회화가 시각예술이라면 건축은 시간예술에 가깝다. 볼프강 폰 괴테는 건축을 ‘동결된 음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건축과 음악이 주는 감흥이 비슷하다는 뜻이기도, 다양한 음표가 모여 하나의 음악이 되는 것처럼 건축 또한 다양한 요소의 총합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공간의 리듬에 따라 동선은 움직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감흥이 일어난다. 한편, 내 작업을 회화에 비유하자면 추상 표현주의나 한국의 단색화에 가깝다. 관람자에 따라 해석의 여지와 개인적인 경험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박: 임기택(국립부경대학교 교수)은 이번 크리틱에서 조경을 포함한 건축에 말미암아 “모노크롬 회화”라 표현하기도 했다. 주로 채도가 낮은 재료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직접 조경을 담당한 미네랄 하우스와 운중동 카페(2023)의 식재 계획도 포함해 설명해 달라. 

 

정: 자연과 가까운 대지에서 무채색의 건축은 자연의 변화와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도심에서는 강하고 요란한 주변의 건축물을 받아줄 수 있다. 조경은 오랜 기간 함께 작업해온 김용택(KnL 환경디자인스튜디오 대표)과 사정상 함께하지 못하게 되면서 직접 진행하게 됐다. 이전에도 설계 초기 단계에서부터 지형 처리나 식재의 위치, 소재, 질감 등 조경 설계를 염두에 두며 작업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식재를 하나하나 고르는 디테일까지 작업하려니 힘들긴 하더라. 억새도 모닝 라이트, 그린 라이트, 핑크 뮬리 등 종류가 수십 가지다. 미네랄 하우스의 경우, 주변 대지에 이미 오래된 메타세쿼이아, 느티나무, 벚나무가 자리 잡고 있어 공간 내 식재를 추가하는 것은 최소화했다. 반면 외관 주변은 논, 밭, 강변 풍경에 조화되고,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며, 사계절의 변화를 드러낼 수 있는 그라스 종류를 사용했다. 그라스는 바람 소리를 듣고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형태보다는 질감에, 시각보다는 청각과 촉각에 신경을 썼으며, 건축의 각 요소과 주변 풍광이 합일될 수 있도록 교향악을 만드는 것 같은 마음가짐으로 작업했다. 

 

박: 미네랄 하우스에서 박공지붕을 가진 동은 V자로 꺾인 천장을 가진 동으로 이어진다. 박공지붕 동을 지붕의 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여 人자의 천장으로 마감했다면 이어지는 동의 V자로 꺾인 천장과 연결돼 조금 더 건축적 경험을 강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름의 텍스처를 가진 나무 평천장을 택했다. 이러한 결정들은 건축가가 고즈넉함, 편안함이라는 정서적 경험을 중시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정: V자 천장 동은 양면이 막혀 있기 때문에 하늘로 열리기를 바랐다. 박공지붕 동을 평천장으로 마감한 이유는 앞의 수공간으로 시야를 열기 위해서였다. 실내 공간 각각과 건축 자체만을 고려해 완결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관계로 그 공간의 성격을 규정한 것이다. 박: 건축가의 의도가 사용자에게 닿기 위해서는 건축물의 관리 또한 중요하다. 건축주에게 건축물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지침도 전한다고 들었다. 

 

정: 건축주들이 건축을 잘 관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재료 자체가 좋은데 양념을 친다. 대표적으로 외부에 사용하는 좋은 목재는 알아서 근사하게 회색으로 에이징이 되는데, 굳이 스테인을 칠해 인위적으로 나무 색을 유지하려 한다. 나무의 수형에 따라 어떻게 가지를 쳐야 하는지도 알려주는데, 결국 건축이 ‘시간의 멋’을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처음 건축 재료를 선택할 때도 이를 염두에 둔다. 징크, 스테인리스, 새시와 같은 2차 산업 재료를 피하고, 돌, 철, 벽돌, 나무 등 가공이 비교적 덜 들어간 재료를 선호한다. 이 재료들은 불변하는 재료가 아닌 나이를 먹을수록 고유한 분위기를 가질 수 있는 재료다. 

 

물성의 조율

박: 대부분의 주택, 오피스, 호텔의 외부를 벽돌로 마감한 반면, 이번 카페 3제의 주재료는 노출콘크리트다. 주택, 카페라는 용도와 벽돌, 노출콘크리트의 물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카페와 노출콘크리트는 어떻게 조화된다고 생각하는가? 

 

정: 벽돌은 픽셀 단위이기 때문에 점묘화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난다면, 콘크리트는 이음매가 없는 조형성이 강한 재료다. 주택에서 콘크리트를 잘 쓰진 않지만 내부에서는 가끔 사용하기도 한다. 목재 같은 따뜻한 재료만 있을 때 차가운 느낌을 더해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반면, 카페는 주택처럼 사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거칠고, 차가운 느낌의 콘크리트를 비교적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박: 운중동 카페의 경우, 층층의 테라스가 내부를 띠처럼 둘러싼 외벽을 마주 보고, 그 외벽의 사각 프레임을 통해 내외부가 시각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디파이 사옥(2020)의 번안 같기도 하다. 여기서 차이점은 디파이 사옥은 외벽의 양면 마감을 모두 벽돌로 한 반면, 운중동 카페 외벽의 외측은 벽돌로, 내측은 콘크리트로 마감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또한 피복과 물성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정: 둘 모두 주변이 산만한 대지에 방어막을 치고 나름의 경관 영역을 만들고자 한 작업이다. 일단 운중동 카페는 비교적 농촌에, 디파이 사옥은 도심에 위치했다는 차이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렇기에 운중동 카페에서는 조금 더 콘크리트 사용에 자유로웠다. 또 나의 작업은 ‘반복과 차이’로 나아간다. 어떤 깨달음이 생기면 앞선 작업에서 새로운 요소를 더해 완성도를 한 차례 더 높인다. 운중동 카페는 루이스 칸의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1974) 내 기도실에서 영감을 받았다. 구조를 공간화시킨 점, 무거운 벽이 가볍게 보인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운중동 카페는 디파이 사옥에서 새로운 구조적 실험을 더한 작업이라 말할 수 있으며, 모서리 부분에서 구조를 해결해 1층 벽 일부를 비워 2층 벽이 떠 있는 듯한 형상을 가진다. 피복과 물성에 관해 말하자면, 덧붙인 재료로도 물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재료가 가진 본성에 가깝게 구축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벽돌을 덧붙이더라도 쌓은 듯이 보이도록 하면서 구축법의 기운이 살아있도록 하고, 90cm 정도의 두께를 주어 돌이라는 무게감을 느낄 수 있도록 작업하는 것이다. 

 

박: 미네랄 하우스의 화장실 내부는 ‘금이 간’ 노출콘크리트로 마감했다.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의도적으로 금이 가도록 마감하는 것은 섬세한 조율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기에 카페 속 화장실에 대한 남다른 공간적 해석이 있었을 것이다. 

 

정: 멀리 풍경이 보일 때 마음은 풍경에 빼앗겨버리지만, 시선이 차단되면 공감각과 오감이 열린다. 그렇기에 금이 간 노출콘크리트, 직사광선이 아니라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들어오는 빛 등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작업했다. ‘모노크롬 건축’이 자연에 스미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화장실에서는 감각을 인식시키기 위해 ‘마이크로 건축’을 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박: 바닥은 다양한 텍스처를 가진 돌, 나무, 벽돌 그리고 물 등이 사용됐다. 벽을 단일한 마감의 노출콘크리트로 선택하게 되면서 재료를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었던 영역이 바닥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닥의 물성을 선택함에 있어 어떠한 고민이 자리했는가? 

 

정: 미네랄 하우스 각 동의 벽 높이는 3,200mm로 일정하다. 그 위에 박공지붕을 얹고, 그 주변에 목재 덩어리를 하나 더했다. 멀리 평화롭게 펼쳐진 논밭을 따라 느릿한 수평선을 그었고, 건축 안은 인지되지 않는 수직의 변화를 담으려 했다. 모든 영역에 사용된 물은 투영되고 반사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직적 요소다. 또한 서양과 달리 우리는 온돌에 맨발로 살았기 때문에 발의 감각에 굉장히 예민하다. 거친 돌과 매끈한 콘크리트 등의 재료로 변주를 주면서 일련의 시퀀스를 감각할 수 있도록 했다. 

 

박: 반면 각 동의 천장은 모두 나무로 마감하면서도 텍스처에 변주를 주었다. 이것은 일례로, 과거에 작업한 아치울 주택(2017), 판교 주택(2018) 등에 비해 이번 작업들은 재료의 수는 줄이면서도 다른 가공 방식을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방식은 카페라는 용도에 기인한 것인가 혹은 작업 경향이 변해가는 것인가? 

 

정: 작업 경향이 변하는 것이다. 경험이 없을 때는 모더니즘 건축처럼 흰색으로 마감하고 끝냈다면, 연륜을 쌓으며 벽 하나의 요소에도 다양한 재료, 텍스처, 질감, 색 등으로 대입해보았다. 지금은 하나의 재료에 텍스처의 변주를 주는 계획이 공간에 고유한 분위기를 더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작업의 발자국 

박: 디테일을 섬세하게 매만지는 건축가들은 보통 시공상의 오류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미네랄 하우스에서는 물이 고여서 생긴 바닥 파임, 콘크리트 벽의 어긋난 줄 맞춤을 수용했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건축으로 나아가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오류의 수용은 어떠한 의도를 갖고 있는가? 

 

정: 건축은 공산품이 아니다. 설계는 기준일 뿐이지 건축은 지어지는 과정에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오류들이 심각하게 건축과 조화되지 않는다면 수정을 수반하겠지만 때로는 관용도 필요하다. 젊을 때는 이러한 오류를 수용하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대세에 지장이 없으면 받아들인다. 오류들이 다른 표정을 지으며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 호시담 카페와 미네랄 하우스는 박공지붕이라는 조형, 지붕과 벽의 관계성, 건축의 디테일 등이 유사한, 연장선에 자리한 작업이다. 둘 모두 자연에 열린 대지로 호시담이 3분의 1 규모로 작지만 건축적 언어(플레이트 플레이)는 더 명확히 보였다. 반면, 앞서 말한 것처럼 디파이 사옥과 운중동 카페도 연장선상에 있는데 둘은 모두 비슷한 규모로 디파이 사옥은 도심에 있다. 그리고 모두 건축적 언어(덩어리를 띄워 안쪽을 비운)가 명확했다. 자연에 둘러싸인 대지를 선호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자연, 도심할 것 없이 외부 조건을 잘 조율한다고 느꼈고 그보다는 규모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어떤 대지를 작업하기 편하게 느끼고 또 선호하는가? 

 

정: 건축가가 작업하기 좋은 땅과 아름다운 땅은 다르다. 예전에는 문화재 옆에 멋들어진 건축을 하고 싶었는데 도천 라일락집(2015)에서 그 소원을 풀었다. 이것은 건축가에게 좋은 땅으로, 건축을 놓음으로써 그 장소가 좋은 터로 바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아름다운 땅은 간단히 말해 자연 속에 있는 것이다. 사실 운중동 카페가 단면의 기복이 심해 높이 변화에 따라 환경과 풍경이 급격하게 변한다는 점에서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이러한 지형적 약점에는 입체적으로 대응했는데 경사진 지형을 따라 연속되는 지면층은 바닥면의 높이를 조절하고 억새와 들풀로 가까운 풍경을 만들어 깊이를 더했다. 고속도로와 같은 높이의 2층은 단단한 벽을 만들어 속도와 소음으로부터 보호하면서 높은 벽으로 둘러쳐진 최상층은 하늘로 활짝 열었다. 그리고 어수선한 도시 풍경을 한발 물러서서 볼 수 있도록 사각 프레임으로 제한했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서 프레임도 이리저리 구상하고, 구조와 공간의 합일도 실험했다는 점에서 작업하기 좋은 땅이었다. 

 

박: 앙리 시리아니 아래에서 수학했고, 루이스 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제프리 바와의 건축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자신의 작업 경향이 어디에서부터 어디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시골에서 자란 삶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정: 마흔 살이 넘어가면 자연을 보기 시작하고 예순 살이 되면 자연을 좋아한다고 하더라. 나도 이 잠언을 따라가는 것 같다. 공간을 구성하는 면에서는 시리아니와 르 코르뷔지에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르 코르뷔지에처럼 모던한 형태의 건축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 풍토에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주는 감각과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는 칸의 태도 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근래에는 바와의 건축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평화로운 건축, 자연스러운 건축, 풍화되는 건축이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어릴 적 삶에 대한 회상을 일으키는 건축이었다.

 

 

월간 「SPACE(공간)」 689호(2025년 04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재헌
정재헌은 성균관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벨빌 국립건축학교에서 앙리 시리아니의 지도를 받았다. 미셸 카강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1998년 아틀리에를 열었다. 현재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다음 세대를 이끌 건축가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모노건축사사무소와 함께 삶을 짓는 건축가로 디자인 열정을 쏟고 있다. 도천 라일락집으로 서울시건축상 대상,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는 등 완성도 높은 작품들로 다수의 건축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양평 펼친집, 호시담, 판교 요철동, 오륙도 가원레스토랑, 동검리 주택단지, 두물머리 주택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