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3월호 (통권 688호)
DIALOGUE
김동진 홍익대학교 교수 × 이성용 실 건축사사무소 대표 × 조항만 서울대학교 교수
있는 것 : 없는 것
이름
김동진(김): 오래전부터 내 안에 맴도는 질문이 있다. 건축의 주인은 누구인가? 근린생활시설(이하 근생)로 범위를 좁혀본다면, 근생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이런 의문이 들 때 바티 리을(2008, 「SPACE(공간)」 490호 참고)을 꺼내본다. 개소하고 지은 첫 작품이자 근생이다. 짓고 난 다음 언젠가 그 근처에 산다는 부부를 만난 적 있는데, 설계자가 나인 걸 알고는 반색하더라. 그 건물이 지어진 이후 사는 동네 주변 환경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때 느낀 건 근생의 진정한 주인은 주민이라는 사실이다.
이성용(이): 말 그대로 ‘근린’, 주거지 내에서 일상적인 주거 생활을 뒷받침하는 시설이 근생이다. 주민을 위한 배려가 필요한 시설이면서 건축주의 요구가 존재한다. 둘은 늘 상충한다. 건축가의 의도는 그다음이다.
김: 그 지점이 내게 중요하다. 건축가는 건축의 주인이 아니다. 건물이 서기까지 물리적 구조뿐 아니라 정신적 구조까지 정성스레 쌓아가지만, 준공을 내리는 순간 열쇠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후 건축이 장소로서 살아남는 일에 대한 몫은 건축가에게 없다. 다 키운 자식을 결혼해 내보내는 것 같달까? 그래서 나는 이름이 있는 건축을 한다. 이름은 이야기의 씨앗이다. 부모가 자식이 살았으면 하는 인생의 방향을 그리며 덕담처럼 이름을 지어주듯, 건물이 나아가길 바라는 방향의 씨앗을 던져주는 거다. 그런데 이름이 정말로 그렇지 않나? 이름대로 살게 된다. 내 이름은 동녘 동(東)에 나아갈 진(進)을 쓰는데 인생을 돌아보면 계속 동쪽이 의미하는 새롭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찾아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웃음) 한편 이름에는 의미뿐 아니라 감정과 형식이 담긴다. 내가 중히 여기는 건 형식이다. 작명소에서 이름 짓는 걸 보면 음양오행의 과학적인 논리가 있다. 오행의 관계를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취하냐에 따라 이른바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고 생각하는 거다. 나의 건축 과정도 그렇다. 처음부터 형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다이어그래밍을 통해 정신적 구조가 형식화되어 나타난다.
의도
조항만(조): 건축을 하나의 주인 없는 플랫폼 혹은 토대로 만든다면 이름은 김동진+로디자인(이하 김동진)이 건축에 부여하는 최소한의 의도라는 건가? 이름이 가리키는 형태나 원리, 혹은 그 이름이 내재한 시대의 요구에 따라 건축이 구체화되어 간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나는 반대로 이름을 처음부터 짓지 않았으리라고 봤다. 사유의 흐름이 구조화돼 만들어진 결과물을 보고 나서, 영향을 준 생각과 어휘들을 반추해 결과론적으로 이름을 짓는 것 아닌가? 이름이 먼저 붙으면 그것이 되려 생각을 가두는 틀이 되어버릴 수 있다.
김: 이름으로 초기 콘셉트를 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형태(form)보다 형식(figure), 개념(concept)보다 방향(direction)을 이야기한다. 개념과 방향은 명확히 다르다. 방향만을 설정하는 태도는 스스로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풀어져가게 돕는다. 여기에 특정한 의도가 개입해 이야기를 규정해버리지 않도록 노력한다. 결과를 예상하기보다 과정 자체에 몰입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영도』에서 롤랑 바르트가 완벽히 중립적인 텍스트는 없다고 말했듯 건축에서도 의도를 지운다고 해서 완전히 지우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내 개인적인 감성이나 이성, 선입견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에 이름을 붙여 던져놓는다. 김춘수의 ‘꽃’처럼 이름으로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담론을 제시하고 소통의 물꼬를 트는 것과 같다. 그런 다음 이 존재가 어떻게 변하고 성장하는지 지켜본다. 가끔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후회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이전에 쌓아둔 이야기가 다층적으로 중첩되며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도 의도가 굳어져 결과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다. 준공을 마친 건축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미완의 공간이다. 텅 빈 공간으로 태어나 사용자의 행위가 채워지며 새로운 의미를 가진 장소가 되어간다. 여기에 경직된 개념이 설정되면 이야기의 가능성이 닫혀버린다. 그래서 중성성의 건축을 하고자 하지만,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야기
조: 그렇다고 김동진이 흰 도화지를 만드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진이 쓰는 조형, 재료, 디테일이 어느 정도 규정된다.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김동진이 근생에서 벌어졌으면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김: 초창기에는 ‘여기는 1층에 카페를 놓아야 한다’는 식으로 단정 지어 설계를 하고 건축주에게도 그게 유일한 정답처럼 말했다. 그런데 뜻대로 움직이지 않더라. 특히 저층부 상가는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스스로 적응하도록 두는 것이 맞다는 걸 알게 됐다. 상가의 ‘가’는 거리의 ‘가’ 아닌가. 그러니까 애초에 거리의 몫인 거다. 건축주는 명확하게 기능이 정해진 공간을 원하지만, 근생의 기능은 계속 바뀌고 있다. 근생처럼 본래 의도를 벗어나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건축 유형도 드물다. 근생은 여러 사회적 욕망이 충돌하는 공간이고, 그 속에서 다양한 관계와 사건이 끊임없이 얽히면서도 주거의 편의를 돕는 필드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 건축이 유연하게 작동할 방법은 무엇일까? 예기치 못한 많은 이야기를 수용하는 잠재적인 그릇이 되어, 시간이 지나며 계속 스스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조: 그러한 태도가 ‘맥락적(contextual)’ 건축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김: 그럴 수 있다. 다만 서사를 만드는 일에 집착이 있는 것 같다. 과정을 통해 이야기를 생성하고 구축해가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설계 방법론을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비눗방울 놀이’라 부른다(「SPACE」 626호 참고). 일상에서 불어내는 수많은 이야기가 비눗방울처럼 다양한 의미를 형성하며 서사화되는 설계 과정이다. 그렇게 지어진 건축은 생성과 소멸의 순환 속에서 시대적 담론을 형성하고 삶을 담아내며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간다. 따라서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공간적 형식’을 제안하는 일이 건축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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