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2월호 (통권 687호)
지금부터는 제주의 입장▼1, 건축가 김석윤의 50년

김건축 사옥(1992) Image courtesy of Mokchon Architecture Archive / ©Kim Seokyoun
인터뷰 김석윤 건축사사무소 김건축 대표,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김정은 편집장
2024년 11월 29일, 서울 내자동에 있는 목천문화재단에서는 제주에서 50년간 건축을 해온 김석윤의 구술집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제주도의 “토속건축이 내 건축의 스승”이라며 제주의 지역성을 탐구해온 김석윤은 목천건축아카이브 구술집 시리즈에서 서울 외의 지역을 기반으로 작업했던 첫 번째 건축가이기도 하다. 제주의 건축계뿐만 아니라 문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어른’인 그의 면모는 제주문화포럼 세미나실에서 열린 두 번째 출판기념회에 운집한 제주와 서울의 동료, 후배, 시민단체 인사들이 만드는 축하의 공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를 만나 ‘제주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들어보았다.
김정은: 11월 발간된 『김석윤 구술집』(마티, 2024)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 건축가의 생애사가 곧 제주 건축의 역사와 다름없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최근 몇 년간 「SPACE(공간)」 편집부에는 제주의 작업들이 많이 투고되고 있어요. 주로 서울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가들의 작업인데요, 스테이나 카페, 주택이 많습니다. 제주에서 작업하는 건축가들은 재료나 배치, 기후 등 지역성에 대해 고민하곤 하는데, 이 구술집을 읽으면서 그러한 고민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그 연원을 찾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동선: 제주도는 우리 국민 대부분이 좋아하는 곳입니다. 생각해보면 제주도에 대한 시각은 상당수가 서울에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제주’라는 지명 자체에 이미 ‘물 건너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구술집의 서문에서도 적었지만, 이 밖에도 상경, 낙향, 귀양, 연북정과 같이 서울을 의식한 표현이 많습니다. 제주도에서는 태생적으로 서울의 시선이 중요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역성을 비롯해서 제주를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 서울이나 육지 중심인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요? 제주도의 내재적인 관점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대표적 인물로서 자연스럽게 김석윤 선생님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을 통해서 제주도의 정체성이 어떻게 파악되었고, 또 어떻게 건축으로 표현되는지를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김정은: 김석윤 선생님, 목천건축아카이브 구술집 시리즈 11번째 건축가로 이 구술채록을 제안받으셨을 때 어떤 바람으로 수락하셨는지요?
김석윤: 처음에는 상당히 주저했어요. 그간 목천건축아카이브에서 구술채록을 해온 선배님들은 우리 건축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분들이라는 점이 염려스러웠고, 제 흔적을 남기는 데 평소에도 큰 집착이나 가치를 두지 않았거든요. 그런 생각은 저의 선친(청탄 김광추, 1905~1983)에게서 비롯됐어요. 구술집에도 나오듯이 선친이 예술 활동도 하시고 주변 작가들 후원도 많이 하셨지만, 명예에는 욕심이 없으셔서 일생 동안 전시회를 한 번도 안 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하자는 제안이 왔는데, 그것도 거절하셨어요. 그런데 한참 지나고 보니 가슴에 응어리가 남아요. 그 생각이 떠오르는데, 누이뻘인 김용미(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가 당시 제주 총괄건축가로 한참을 왔다갔다 하면서 적극적으로 권했죠. 곰곰 생각해보니 저 개인을 조명한다기보다 이 기회가 역사학자들이 제주도의 건축을 보는 상당히 가치 있는 작업이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나는 제주 건축가다』라는 책이 얼마 전에 나왔는데, 요새 활동하는 건축가들이 쓴 책인데. 거기에 한 10명 정도 인터뷰 내용들을 쭉 보면요, ‘제주 건축이 육지의 건축하고 달라야 된다’라는 그런 자의식이 굉장히 강해요. 그게 이제 김석윤 선생님 때, 그 시대에 뿌려진 것 같아요. … 거의 대부분이 제주대 출신들이거든요. 그런데 제주도에 초기 선생님으로 유일하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그러니까 많이 주신 분이죠, 김석윤 선생님이.”
_ 김용미, 『김석윤 구술집』, 마티, 2024, 323쪽

김석윤 가옥(1913) Image courtesy of Mokchon Architecture Archive
김정은: 숙부이신 김한섭(1920~1990, 전 금성종합설계공사 대표) 선생님의 권유로 대학 지원 때 처음 제주를 벗어나 전남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셨다가 2학년 때 서울의 홍익대학교 건축미술학과로 편입하십니다. 그곳에서 정인국, 강명구, 엄덕문, 김수근 선생님을 사제지간으로 만나시기도 하시는데, 구술집에서 당시 김수근 선생님이 수업에는 잘 안 나오셨다는 에피소드도 재밌습니다. (웃음) 더불어 김수근 선생님을 롤모델로 삼아 제주도에서 활동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어떤 모습을 닮고 싶으셨나요?
김석윤: 김수근 선생님이 그때 서울에서 하시던 모습대로였죠. 공간사옥의 공간사랑을 구심점으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여들었죠. 당시 제주도의 형편으로는 가장 목마른 것이 그런 문화적 활동이었어요. 아무래도 변방이다 보니 모든 게 좀 늦는다는 느낌이 있었죠. 그 가운데 저희 선친이 그림, 서예, 원예 등 여러 활동을 하시면서 관련 협회들에 관여하시며 후배들도 도왔죠. 딜레탕트(dilettante)였어요. 크게는 못하셨지만 당신 혼자서 할 만큼은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더 김수근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건축은 저런 것들을 해야 되지’라고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건축을 공부하면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접하게 되고 웬만큼 하면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화젯거리가 풍부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이잖아요.
김정은: 그래서 직접 설계하신 김건축 사옥(1992)의 윗층에 거주하시고, 지하를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시는군요. 최근에는 어떤 행사가 있었나요?
김석윤: 지금은 사옥 지하에 사회 문화 운동하는 제주문화포럼이라는 단체가 들어와 있죠. 거기서 전시도 하고 시민들을 상대로 다양한 문화 학습과 향유 활동을 합니다. 일례로 도시・건축 특강도 했는데, 서울시립대학교 정석, 송인호 교수나 서울시청에 있었던 윤혁경, 공간문화센터의 최정한 등도 왔었죠. 제주 시민들에게 도시 공간 개선 등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강의를 했어요. 제주의 시민단체가 참 열심히 해요.

제주 시립 탐라도서관(1989) Image courtesy of Mokchon Architecture Archive / ©Kim Seokyoun
김정은: 서울에서 쭉 교육과 실무(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를 하시고 1972년에 제주로 돌아오십니다. 그러한 결정을 하시는 데 계기가 있으셨나요? 서울에서 계속 건축 생활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제주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김석윤: 무슨 멋진 생각을 해가지고 간 건 아니고요, 결혼을 하게 되니 설계사무소 보수로는 생활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주에서 건설회사(세기건설)를 2년 정도 다니고 건축사를 따고 1974년에 건축사사무소 김건축을 개소했죠.
김정은: 1970~1980년대는 경주 보문단지가 마무리되면서 중앙정부에서 제주도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는 시기였습니다. 선생님은 1975년 용두암 휴게소로 대한건축사협회상 작품부문 입선을 하셨어요.
김석윤: 그때 제주에서 소문이 났어요. 와, 이제 건축도 예술이다. 건축설계 집장사들만 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요.
김정은: 제가 구술집을 읽으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가 선생님 생가입니다. (웃음) 선생님은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주택의 의장적 특성에 관한 연구: 조선 후기 와가를 중심으로」(1986)나 박사학위 논문 「19세기 제주도 민가의 변용과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1997) 등에서 김석윤 가옥(1913)을 비롯한 민가 연구를 통해 제주도의 모체 건축을 ‘안팎거리 집’이라고 규정하기도 하셨죠. 1980년대 들어서는 주택 설계를 많이 하셨습니다. 현 씨 주택(1980), 고 씨 주택(1982), 김한주 씨 주택(1983), 김승택 씨 주택(1984), 그리고 제주도지사 공관(1985) 등. 바람과 같은 제주의 기후와 땅에 대한 이해와 전통 가옥에 대한 연구를 결합한 설계 작업인 것 같습니다.
김석윤: 어린 시절의 공간 체험이 작가의 건축관 형성에 상당히 큰 비중으로 자리하는 것 같아요. 물론 집의 풍경이나 짜임새의 원리에 대해 터득한 것은 한참 후예요. 지금 김석윤 가옥은 지역 문화재로 지정됐어요. 민가 연구를 하게 된 것은 동생뻘인 김홍식(명지대학교 명예교수)의 영향이 큰데, 나는 설계를 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건축의 형상보다는 공간구성 방법에서 색다름에 관심이 있었지요.
김정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가 되면, 공공 건축의 설계를 하십니다. 제주 시립 탐라도서관(1989), 제주 노인복지회관(1991), 제주 지방공무원 교육원(1993) 등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제주 시립 탐라도서관에는 민가의 안거리 밖거리, 마당과 올레 개념을 적용하셨어요. 지금도 젊은 건축가들이 제주에서 작업할 때 안거리, 밖거리 개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주 민가의 구성 원리를 선생님께서 이미 예전에 규정하고 설계를 고민하셨다는 게 흥미롭기도 하면서, 이제는 후배 건축가들이 그 토대에서 다양하게 진화된 작업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 제주 지역 재료에 대한 탐색도 중요한데요, 제주도지사 공관에는 현무암을 쓰셨죠? 당시 제주도민에게는 현무암이 가난의 상징이었는데, 오히려 서울에서 좋아하다 보니 다시 제주에서 쓰이게 된 이야기가 흥미로웠어요. 요즘은 제주 건축 하면, 현무암부터 떠올리잖아요.
김석윤: 제가 원래 대담하지는 못해서 실험을 잘 못해요. (웃음) 처음 제주도 돌을 건축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도 서울 건축가들이었어요. 승효상은 현무암으로 개성 있는 디테일을 만들기는 했지만 한참 뒤고요. 1980년대 초반, 아마 안병의 선생 작업으로 짐작되는데, 조경재로 썼어요. 니켄세케이가 설계한 제주 그랜드 호텔(현 메종 글래드 제주)이었는데, 안병의 선생이 로컬로 현장을 총괄했거든요. 현무암은 김홍식의 제주 민속자연사박물관(1984)에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지요.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1923~1996)가 쓴 『탐라기행』(1986)에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의 지붕(에 쓰인 현무암)을 ‘요염하다’라고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이후 건축가들이 여기저기 쓰면서 제주도 돌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해갔어요. 로컬리티 표현의 제일조가 현지산 재료를 쓰는 것 아닙니까?

제주현대미술관(2007) Image courtesy of Mokchon Architecture Archive / ©Kim Seokyoun
김정은: 1998년 여름 서울건축학교(sa)가 제주에서 워크숍을 개최했는데, 그 행사를 계기로 서울을 중심에 두고 활동하는 건축가들과 교류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한편 구술집에서 전봉희 교수님은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의 작업, sa를 만나기 전의 것들이 좀 더 인상적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셨어요.
김석윤: 그때 김봉렬 교수가 ‘우리가 모더니즘에 충실해본 경험이 있었는가? 그러고 나서 전통이고, 한국성이고가 논의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요지의 주장을 했었지요. 당시 우리 전통의 기본적인 코드였던 지붕에 대한 고민이 컸는데,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제주현대미술관(2006)은 지붕 없이 박스로 종결하기도 했죠.
우동선: 유명한 시의 제목처럼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항상 아쉬움이 남습니다. 만약에 선생님께서 모더니즘의 영향을 덜 받으면서 더욱 독자적인 길을 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랬더라면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루이스 바라간의 그것들처럼 지역성이 더욱 두드러지지 않았을까요? (웃음)
김정은: 제주에서 활동하는 많은 젊은 건축가들이 제주대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운 제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김석윤: 후배들은 우리 시대에 비해 처한 환경이 많이 어려우니 송구스럽죠. 힘을 내서 이 시기를 잘 넘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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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계영의 시집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아침달, 2021)의 제목을 변용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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