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MSPACE는 국내 최고의 건축 포털 매거진입니다. 회원가입을 하시면 보다 편리하게 정보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Login 회원가입
Naver 로그인


  • close
    Image

문화의 집적: 2018 아시아도시문화포럼

이성제
자료제공
서울문화재단
background

​​타이베이의 문화집적 사례

타이베이의 다퉁(Datong) 지역은 타이완에서도 가장 오래된 주거지로 청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건축유산이 풍부한 곳이다. 단수이 강에서 올라온 물자가 활발하게 거래되며 1900년대 상업 중심지로 번성했지만, 도시가 팽창하고 산업이 빠져나가면서 점차 활기를 잃었다.

타이베이 시 정부는 이곳을 문화 클러스터로 육성하며 지역 활성화에 나섰다. 개발 압력 속에서도 잘 보존된 근현대 문화유산과 도시 조직, 수변 공간 특유의 정취 등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문화 클러스터의 거점으로서 타이베이 현대미술관이 도입됐고, 구체적인 실천 전략이 수립됐다. 우선 미술관 주변 공공 공지가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났다. 지하철 노선을 따라 형성된 선형의 공원에는 공공 예술 작품이 전시되고 다양한 공연이 상연됐다. 지하철 역과 연결된 지하 보행로에는 팝업스토어를 유치하고, 통로 한편에 스트리트 댄서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연습 공간도 마련해 20~30대 젊은 세대의 유입을 꾀했다.

시 정부는 하드웨어 정비만큼이나 소프트웨어 확충에도 힘썼다. 예술가들을 초청해 학교 교사들과 공동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편, 2012년부터 지역 페스티벌, 예술 축제를 열어 지역 커뮤니티의 활성화를 촉진했다. 지앙 멩 팡(타이베이 시 문화창조개발국 부부장)은 사례 발표 ‘타이베이의 예술기관과 영화산업으로 살펴본 문화집적 사례’에서 이를 소개하며 “예술가와 지역 주민 간의 협력, 예술행사 개최 등 여러 방법을 통해 타이베이 구도심에서 예술적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문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라이프 스타일과 도시 공간

이처럼 문화・예술로 지역이 활성화되는 모습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역의 자생적인 활동에서 비롯되거나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연출되기도 하는데, ‘성공 스토리’는 전반적으로 닮은 모양새다. 문화 자원이 풍부하지만 쇠락한 도시, 정부의 시설 확충과 예술가들의 활동, 대형 문화・예술 이벤트 개최 등 몇 가지 요소로 도식화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곳곳의 문화집적 현상을 연구하고 도시 컨설팅을 해온 루시 민요(BOP 컨설팅 컨설턴트)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지적한다. “문화와 창조성이 문화집적 과정의 촉매제가 될 수 있겠지만, 이 과정에 여러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데다 지역별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특정 요소를 성공 요인으로 지목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례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요소가 있는데, 문화・예술을 적극 향유하려는 사람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한정희(대림미술관 실장)는 사례 발표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 맞춘 문화기획이 도시 공간에 미치는 영향’에서 이들의 존재를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줬다. 그에 따르면 대림미술관은 2002년만 해도 지금과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대중과 함께하는 미술관’을 목표로 여러 시도를 하다가 2010년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의 소장품전 <인사이드 폴 스미스>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일상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 주목했다. 이후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을 모토로 라이프 스타일과 관련한 기획전을 선보이며 대림미술관의 관람객 수는 급증했다. 연간 관람객 수가 2008년 1만 3천 명 수준에서 2012년 24만 7천, 2014년 40만 명 선까지 올라선 것이다. 한정희는 “관람객을 분석한 결과 여성 관람객 비율이 77%에 이르고, 세대를 기준으로 20~30대 비율이 84%에 달한다”면서 “이러한 성장세는 라이프 스타일과 문화・예술에 대한 20~30대의 관심과 욕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조사 대상 중 대림미술관에 처음 방문한 사람이 40% 정도였는데, 경복궁역 일대의 유동인구와 소셜 네트워크 검색 수치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들이 문화적 자원이 풍부한 서촌지역을 함께 둘러볼 목적으로 대림미술관을 방문한 것으로 결론내렸다”고 말했다.

서촌은 도심에서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자, 조선시대부터 당대 예술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친 장소다. 동네 곳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운영하는 공방과 오래된 빵집, 통인시장 등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문화적 요소가 가득하다. 대중의 요구를 읽어낸 대림미술관의 기획에 이러한 장소적 특성이 더해지면서 서촌을 찾는 발길이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문화집적 현상을 소비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모종린(연세대학교 교수)은 기조 강연 ‘라이프 스타일과 도시 공간의 미래’에서 “독창성, 개성, 특별함 등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에겐 단일화된 첨단 도시보다 개성 있는 건물과 오래된 골목길로 구성된 포스트모던한 도시가 매력적이다”라며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는 작고 매력적인 카페, 상점, 맛집 등으로 형성된 골목 상권으로 이들이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트렌드는 상권 성장률, 임대료 상승률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는데, 골목 상권의 형성엔 문화, 예술의 역할보다 상인들이 더 큰 역할을 한다”고도 주장했다.

  

타이베이 현대미술관 주변의 공공 공지에서 열린 예술 공연

 

거리로, 지역사회로 나온 예술

문화・예술이 지역 재생 또는 활성화를 위한 매개로 이용되는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창의성과 자율성, 비판 정신을 간직해야 할 문화・예술 활동이 지역 재생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듯해서다. 더구나 문화・예술로 활기를 되찾은 지역에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해 가난한 예술가들을 도리어 몰아내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아이비 린(오이! 큐레이터)의 사례 발표 ‘지역으로 간 예술: 예술적 실천의 장으로서의 장소성’은 문화・예술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그는 현재 도시 공간에 필요한 프로그램으로서 문화・예술이 지닌 잠재력을 이야기한다. “현대미술은 사회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교란함으로써 공공의 이슈를 논의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원과 자극을 제공한다. 예술 작업에 대중이 참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들 간의 연결도 가능하게 한다.”

그가 소개한 홍콩의 아트 스페이스 오이!는 큐레이터십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전통적인 큐레이션은 미술관 등 기관에 소속되거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큐레이터가 예술 전문가들과 함께 주제를 정하고 작품을 고르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오이!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큐레이터,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에도 참여한다. 이른바 커뮤니티 중심의 큐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소셜 가스트로노미>는 인근 시장에서 수집한, 남은 음식과 재료로 요리를 만드는 ‘열린 주방’ 프로젝트다. 업사이클링과 같은 사회 이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프로젝트가 진행되려면 관람객 참여가 필수적이다. 관람객들은 몸소 요리를 만들고 즐기는 ‘예술 활동’에 참여하면서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지역과 사회 이슈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아이비 린은 “이외에도 지역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하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며 “예술적 실천은 의사소통, 협력, 소속감 형성 등의 과정일 수 있으며 새로운 공동체의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문화적 집적을 이루는 방법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이!와 같이 미술관이 ‘화이트 박스’에서 나와 커뮤니티로 향하는 모습은 문화・예술이 수용되는 양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서현(한양대학교 교수)은 기조 강연 ‘문화, 음모와 질문’에서 “과거 향유의 대상으로 지탱되던 문화는 가치차별적인 것으로, 교육을 통해 넘어야 할 문턱이 존재하는 예술이었다”며 “대중문화, 하위문화 등으로 지칭되는 것들이 산업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문화의 의미와 개념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문화는 생활의 방식으로서, 정체성을 보여주는 사회적 도구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화가 공공 공간에서 모두에게 개방된 접속의 형식을 띠어야 하는 이 시대에, 문화 공간을 만든다고 하면 오페라하우스, 미술관은 아닐 것 같다”고 덧붙였다.

 

도시 관리자로서 정부의 역할

달라진 환경은 도시를 설계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이들에게 보다 세심한 전략을 요구한다. 비어 있는 대지에 마을과 도시를 조성했던 과거와 달리, 도시계획가와 도시 정책 전문가들이 마주하는 대상은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와 밀접한 문화・예술이 경제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유지하는 일이 정책의 우선순위에 올라가게 됐다. 이날 공개 정책 세미나의 토론에서 발표자들이 도시 공간의 관리자로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 내놓은 견해에도 이러한 현실 인식이 반영돼 있다.

루시 민요는 “콜롬비아 메데진과 같이 사회적 교류 공간이 미비한 지역에서는 문화시설을 마련하거나 교통 인프라를 확충하는 등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면서도 “정부가 주도권을 갖고 지속적으로 관여하기보다 지역 커뮤니티가 스스로의 목적에 따라 문화 시설과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개입을 줄이고 커뮤니티의 참여를 독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집적 현상에서 수반되는 젠트리피케이션 이슈도 쟁점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특정 지역의 활성화를 추진하는 경우 계획 초기부터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허재형(루트임팩트 대표)은 “성수동 소셜벤처 밸리의 경우 성수동에 소셜벤처와 관련된 새로운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초기부터 젠트리피케이션을 완화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며 “성동구청의 노력으로 서울의 다른 지역과 달리 변화의 속도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성동구에서는 주민 중심의 협의체 설립, 건물주・임차인・성동구 간 상생 협약 체결,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조례 제정 등 지역 안정화에 힘쓰는 한편, 임차료 안정과 소상공인 보호를 위해 성수동 내 일정 규모의 건물을 매입해 제공하는 등으로 성수동안심상가를 조성하기도 했다. 한정희는 “서촌에서도 대림미술관이 주목받을 때부터 이 이슈가 불거졌는데, 우리가 찾은 해답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며 “지역이 고유의 개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에서 살아가는 주민, 상인, 예술가 등 이용자와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건물주 사이에 중재자로서 정부의 역할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도시를 관리하기 위해 현재 운용되고 있는 용도계획, 지구단위계획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박은실(추계예술대학교 교수)은 “지역의 문화 자원과 문화적 요구를 종합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컬처럴 플래닝(cultural planning)으로 계획해야 한다”며 “문화집적을 이끄는 크리에이티브들을 위한 작업 공간 이외에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주거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2018 아시아도시문화포럼에서 진행된 공개 정책 세미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