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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 물의 건축 : 스며드는 흐름과 회전하는 균형 |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

장용순
사진
김용관
자료제공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 이타미준 건축문화재단
진행
방유경 기자

「SPACE(공간)」 2024년 1월호 (통권 674호) 

 

유이화의 하늘소리(2023) 초기 스케치


대지, 자연, 존재론적 건축, 현상학적 건축

이타미 준(유동룡)의 딸로 잘 알려진 유이화. 그는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는 건축가다. 유이화는 자연과 대지를 존중하고 그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두 건축가는 지역성, 토착성, 재료에서 느껴지는 온기, 생명력을 중시하고 자연과 지역에 스며들면서 “맛이 우러나오는” 건축을 추구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건축은 (하이데거의 대지의 개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지의 본성을 통해서 존재와 진리를 드러내고, 오감을 깨어나게 하는 존재론적이고 현상학적 건축이다. 

 

이타미 준의 각인의 탑(1988) 드로잉 / Image courtesy of ITAMI JUN Architecture & Culture Foundation 

 

돌과 덩어리, 물과 선

이타미 준의 건축은 하나의 묵직한 돌덩어리가 좌우대칭으로 동심원처럼 뻗어나가는 구성을 추구한다. 온양민속미술관(현 구정아트센터, 1982), 각인의 탑(1988), 수, 풍, 석 미술관(2006) 등 그의 초기 작품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투박하고 거친 덩어리가 이타미 준의 특성이라면, 유이화의 건축은 물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물에는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면과 날카롭고 예리한 면이 공존한다. 유유히 흐르던 물은 회전하는 소용돌이가 되기도 하고 예리한 선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시호재(2023)의 평면은 공간을 감싸는 부드러운 흐름을 보이지만 지붕선은 예리하고 날카롭다. 합정동 이노이즈 사옥(2014, 「SPACE(공간)」 564호 참고)과 논현동 근린생활시설(2019)의 입면선 또한 흐르는 듯 날카롭다.   

이타미 준이 둔탁한 덩어리 건축이라면, 유이화는 예리한 선의 건축을 구사한다. 유이화 건축에는 서로 다른 물의 흐름이 소용돌이치면서 균형을 이루는 태극 문양과도 같은 구성이 평면과 단면에서 나타난다. 시호재에서는 물이 소용돌이 치는 흐름의 배치를, 하늘의 소리에서는 대각선 배치를, 신원동 근린생활시설 & 단독주택(2021)에서는 태극 문양처럼 마주 보는 곡선을 볼 수 있다. 합정동 이노이즈 사옥에서는 단면에서 서로 두 개의 층과 볼륨이 맞물린 구성을 만든다. 이런 구성 방식은 회전하는 흐름, 점대칭, 동적인 균형 등 다양한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이타미 준이 정적인 중심성을 추구했다면 유이화는 동적인 균형을 추구한다고 할까. 동적인 특성을 갖는 유이화 건축에서는 이타미 준의 건축보다 시퀀스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이타미 준은 정면을 대면하면서 접근하는 방식을, 유이화는 벽과 길을 따라서 굽이치는 시퀀스를 통해서 건물에 접근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타미 준의 어머니의 집(1971) 드로잉 / Image courtesy of ITAMI JUN Architecture & Culture Foundation


요소로부터 진동으로, 진동으로부터 흐름으로

이타미 준은 어머니의 집(1971)같이 요소가 많은 건축에서 시작해서 요소를 점점 줄여나가는 식으로 진화했고, 요소가 제거된 하나의 덩어리의 모습에서 종결됐다고 볼 수 있다. 이타미 준이 마지막에 도달한 한 덩어리 공간의 울림이나 진동으로부터 유이화는 진동을 흐름으로 변형시킨다. 유이화의 건축은 처음부터 요소들이 제거된 상태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평면과 단면에서 흐름이 변형되면서 다양한 건축이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타미 준이 끝난 지점에서 유이화가 시작한다고 볼 수도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건물에서는 그 중간 지점을 볼 수 있다. 유이화가 2001년 뉴욕에서 귀국해서 2011년 이타미 준이 작고할 때까지 10년은 둘의 건축이 서로 섞이는 시기다. 오펠 골프 클럽하우스(2008)와 서원골프 클럽하우스(2012)에는 이타미 준의 중심성과 유이화의 흐름이 공존한다. 방배동 사옥(2007)은 입방체 덩어리 위에 음양이 서로 회전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태극 모양을 직각의 입면으로 해석하여 덩어리와 흐름이 공존한다. “유이화를 억누르면서, 아버지의 언어로 설계”하려고 노력한 유동룡미술관(2022)은 덩어리 느낌이 나타나고, 유이화의 예리한 비례보다는 이타미 준의 둔탁하고 육중한 느낌이 강조되어 있다.

 

대지와 매스, 옷감과 선

유이화 건축의 선, 흐름, 균형의 특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대지에 대한 존중, 재료에 대한 감각이 아버지 이타미 준을 이어받았다면 선, 흐름, 균형의 특성은 어머니로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패션 디자이너였던 어머니가 유이화의 중학생 시절까지 부티크를 운영한 덕에 그는 옷감이나 패브릭에 대한 감각을 어려서부터 접하면서 섬유가 가진 선, 흐름, 유동성을 익혔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인테리어나 디테일의 감각 역시 어머니와 연관지을 수 있는데 유이화는 “같은 옷에서도 드러나는 실과 숨겨진 실의 차이, 단추 하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인테리어나 재료를 다루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초등학교 때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그림을 잘 그리던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 역시 물성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었는데, 오징어 껍질을 뒤집어 말려서 북을 만드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고 했다. 여성에게 건축은 힘들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대학에서 인테리어를 전공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옷감, 가구, 계단, 건축은 연속된 대상으로 받아들여졌고, 옷감의 유연한 선이 규모가 큰 건축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유이화는 무거운 오브제가 아니라 존재감을 덜어내고 스며드는 느낌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자연 속으로, 주변 속으로 녹아드는 흐름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타미 준의 수 미술관(2006) 드로잉 / Image courtesy of ITAMI JUN Architecture & Culture Foundation 

 

이타미 준의 풍 미술관(2006) 드로잉 / Image courtesy of ITAMI JUN Architecture & Culture Foundation 

 

이타미 준의 석 미술관(2006) 드로잉 / Image courtesy of ITAMI JUN Architecture & Culture Foundation 

 

환대하는 소용돌이의 흐름 

‘시간을 향해 쏘는 활’이라는 뜻의 시호재는 팔공산 자락으로 둘러싸인 대지 안에 위치한다. 긴 담을 따라서 진입 시퀀스를 따라 들어가면, 정원을 품은 두 개 동의 유연한 선이 우리를 감싸 안는다. 한쪽은 높고 두껍고, 다른 끝부분은 날카롭고 예리한 선으로 뻗은 두 개의 동이 태극 문양처럼 서로를 맞물고 있는 구조다. 정원은 원래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건축가는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시도했다. 하지만 토루(土楼)처럼 완결되고 정적인 원이 아니라 두 개의 동은 어긋나고 미끄러지고 흘러간다. 초기 스케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팔로 감싸는 듯한 두 개의 동은 소용돌이치는 물결처럼 넘실댄다. 하나의 선은 흘러나와서 건축주 주택으로 이어지면서 마무리된다. 

건축가는 산세의 흐름을 끌어들여 배치하며 날아가는 듯한 날렵한 지붕선을 통해 자연의 흐름에 (유이화의 표현을 옮기면) ‘추임새’를 넣는다. 자연이 주인이 되고 건축은 자연에 스며드는 조연이 되기 위해, 아연과 노출콘크리트에 검은 스테인을 칠해 먹색으로 물들였다. 시호재에서 담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담은 건물을 연장해서 흐름을 이어지게 하고, 외부 건물을 가리면서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담은 게스트하우스로 이뤄진 동측 동의 불규칙한 볼륨을 감싸 안는다. 삼나무 열로 만들어진 담의 높이는 주변 건물을 가리지만 담 위로 지붕들과 산세를 남겨두어 완전히 폐쇄적인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닫힌 듯 열린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동측 동의 삼나무 루버는 서향을 걸러주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한편 그림자를 드리워 시간성을 느끼게 한다. 

시호재의 배치는 건축주의 주택을 머리로 볼 때 두 개 동이 팔을 벌려 사람을 환대하는 형상이다. 이러한 배치가 암시하는 ‘환대’는 답사하며 공간을 소개해준 건축주의 품성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공예품과 현대회화를 직접 수집할 만큼 건축과 예술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가진 그는 건축가가 최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종일관 설계에 개입하지 않고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답사를 마치고 떠날 때 고향집을 떠나는 가족을 환송하듯 배웅 나온 건축주 부부의 모습에서 건축물과 건축주의 모습이 겹쳐 보일 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다.

 

콘크리트의 옷감으로 만든 성막

하늘소리(2023)의 대상지는 소나무로 둘러싸인 언덕에 위치한다. 소나무들 사이로 굽이치면서 휘어진 곡면의 노출콘크리트 벽은 옷감 같기도, 지형을 따라 흐르는 물 같기도 했다. 언뜻 성경에 나오는 성막이나 언덕 위의 무덤처럼 보일 만큼 벽면의 곡선과 직선은 대조와 균형을 이룬다. 작은 건물 안에서 다양한 장면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축가는 언덕을 오르는 묵상의 길을 따라 걷는 시퀀스를 만든다. 

대학교 이사장의 지명을 받아 기도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이화는 답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신의 계시를 받듯 단숨에 스케치를 그리고 설계를 마쳤다고 한다. 양의 형상을 닮은 대학 캠퍼스의 심장부에 십자가를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십자가의 배치는 흐름을 만드는 유연한 선들로 변형됐고, 십자가로 공간을 가르며 만들어진 두 공간은 기도실과 집회실이 된다. 회전하는 균형 잡힌 흐름이라는 유이화의 주제와 십자가가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초기 스케치에서 더 명확히 볼 수 있듯이 곡선의 벽면은 소용돌이처럼 말려들어가면서 십자가 형태 곡선과 하나되며 중심에 도달한다.

건축가는 건축이 대지 위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여러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십자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종교적 감흥을 주길 의도했다. 평면에 십자가를 새기기 위해 예배실 천창을 십자 형태로 만드는 일반적인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십자 형태의 천창 아래를 좁은 통로로 만든 것이다. 십자가의 빛을 따라서 고난과 묵상의 길을 체험한다는 의미다. 복도에 들어서면 저 멀리 계단이 보이고 그 위에 숨겨졌던 십자가가 보인다. 황동으로 만들어 빛을 받아 빛나는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 끝에 놓인 십자가를 떠올리게 한다. (넉넉하지 않은 공사비로 인해) 별도의 마감이 없는 노출콘크리트와 최소화된 디테일은 건물을 금욕적으로 만든다.

기도실은 모서리를 향하도록 배치되어 집중력을 높인다. 이 모서리에는 회중을 바라보는 십자가가 매달려 있다. 십자가를 지탱하는 캔틸레버 벽면 아래 수평창을 통해 중정의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기도실은 닫힌 듯 열려 있다. 완전히 폐쇄되지 않아 학생들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묵상과 기도에 집중할 수 있다. 답사 중에도 여러 학생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기도를 하고 빠져나갔다. 청년들의 자발적인 기도와 묵상이라니,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기도실에서 흘러나오던 복음성가 가사처럼 신의 꿈이 건축가의 비전을 통해서 건물로 실현된 느낌이었다. 유이화에게 대지와 자연에 대한 존중은 신에 대한 신앙과 다르지 않다. 자연과의 균형과 호흡은 신을 존중하는 것과 같다. 하늘소리는 인공과 자연, 직선과 곡선, 오목한 곡선과 볼록한 곡선, 개방과 폐쇄, 선과 면, 빛과 어둠의 뛰어난 균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유이화의 합정동 이노이즈 사옥(2014) 드로잉 

 

배려의 곡선과 대각선의 균형

이타미 준과 유이화는 공통적으로 대지와 지형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데 도심 안에서 설계할 때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을까? 유이화는 도시에서 건물을 설계할 때 오래전에 있었던 것처럼 주변 건물에 스며들어가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자연과 도시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건물을 단지 자연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신원동 근린생활시설 & 단독주택의 서측은 사옥으로, 동측은 주택으로 사용된다. 서로 마주 보는 두 건물은 배려의 표현으로 모서리를 곡선으로 처리했다. 점대칭, 회전, 대각선, 태극, 균형으로 말할 수 있는 반복되는 흐름의 주제다. 곡선은 북쪽 산으로 열린 사무실과 남향으로 열린 주인의 방으로 적절하게 분배된다. 대각선과 균형의 주제는 내부에서도 이어진다. 거실의 높은 공간과 계단실의 보이드는 대각선으로 배치된다. 단면에서 1, 2층이 연결되는 보이드가 있고, 그 대각선 방향에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다. 

 

존재의 건축에서 흐름의 건축으로

이타미 준으로부터 시작된 존재의 건축, 현상학적 건축은 그 그늘에서 벗어나 유이화에 의해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스며드는 건축은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유연하게, 때로는 날카롭고 예리하게, 때로는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회전하는 균형을 만든다. 유이화가 앞으로 펼쳐나갈 흐름의 건축이 어떤 모습일지 지켜볼 차례다.

 

 

유이화의 유동룡미술관(2022) 드로잉 

 

* 유이화의 어머니, 할머니와 관련된 일화는 프로젝트 답사 중 나눈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월간 「SPACE(공간)」 674호(2024년 01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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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순
장용순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파리 베르사유 건축대학교를 졸업한 뒤 자크 리포 설계 사무실에서 건축 실무를 익히고 프랑스 국가 공인건축사(DPLG) 자격을 취득했다. 파리 8대학 생드니 철학과에서 알랭 바디우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축사사무소 기오헌에서 실무를 쌓았고 현재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현대건축의 철학적 모험』 시리즈 1~4권(2010~2013)이 있다. 작품으로 세운상가 공공 공간 활성화 프로젝트와 KB 청춘마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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