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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부터 1까지, 건축은 과정이다-2

조재원
사진
진효숙
자료제공
공일스튜디오
진행
박지윤 기자
background

​​「SPACE(공간)」 2023년 10월호 (통권 671호)

 

가치의 지도와 내비게이터로서의 건축가 

 

레퍼런스는 이미 구현된 장소이기에 논의를 열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지만, 아무런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회의 가속화된 변화로 인해 과거의 경험만으로는 미래를 위한 건축의 유효한 비전을 찾기 어렵다. 가치 지도는 과정형, 즉 만들어가는 지도다. 지도는 프로젝트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의 지표들과 지표들 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계획 과정의 선택은 기술적, 미학적으로 검토되는 동시에 가치의 지도 위에서 길을 찾고, 이어간다.  

 

샘터사에서 관리해오던 자료들을 넘겨받아 1979년 준공 이후부터 리노베이션 계획 시작 시점까지 건물 변경과 그 원인들을 추적해 변화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지도를 작성했다. 단면조닝과 1층 배치도는 그 흐름을 가시화시켜 주었다. 단면조닝의 변화 과정은 건축이 주변 도시 조직의 변화에 유기적으로 대응해왔던 역동성을 잘 드러낸다. 1층 배치도는 다변화되는 복합용 도로의 진출입구가 광장 중심에서 모든 도로에 접한 면으로 확대 변화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연속성과 고유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원형의 힘에 주목했다. 개방성을 유지하고 접근이 용이한 위치에 문화예술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규범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신이 발달장애인을 만났다면, 단지 한 사람의 발달장애인을 만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화하기 어렵고 스스로 요구 사항을 전하기 어려운 사용자이기에 더더욱 ‘듣는’ 노력이 필요했다. 운영 중인 공간을 찾아 사용 패턴을 관찰하고, 발달장애인과 집에서, 일터에서, 돌봄의 공간에서, 함께 거주했던 보호자, 시설의 운영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논문 등 자료를 찾고, 같은 고민을 했던 사례들을 학습했다. 학습한 모든 자료들을 종합해 ‘발달장애인 우호적 공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계획의 지도로 삼았다.  

 

대우재단은 사옥을 이전 조성하면서 공간의 일부를 열어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간을 조성하고자 했다. 전용부와 공용부라는 이분화된 공간을 넘어 특정한 목적과 방식으로 개방하는 공간이 도시에 공급되고 있고, 이는 공유부 혹은 공유플랫폼 등으로 불린다. 조성한 목적에 따라 이 공간의 성격과 운영 시스템은 다양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사례들을 리서치해 현 시점 공유플랫폼의 지형도를 작성했다. 이 지형도 위에서 대우재단의 목적과 부합하는 공간의 정의를 찾고 계획의 지표를 탐색했다. 

 

 

감각자극을 지표로 한 강동그린나래 공간배치 다이어그램 

 

 

강동그린나래의 ‘발달장애인 우호적 공간 가이드라인’

 


샘터사옥의 수직조닝 변동역사와 공공일호의 새로운 방향탐색 자료

 

도시 안의 도시, 수직의 시나리오와 공공성​


수직조닝과 동선 시스템은 부지에 새롭게 설정된 가치와 장소의 공공성을 구현하는 데 장기적인 시나리오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샘터사옥의 건축가 김수근이 1층을 필로티로 만들어 도시에 내어줬던 광장과 길이 40년 동안 도시와 유기적으로 호흡하는 허파가 되어주었듯이 말이다. 가로에서 연결되는 접지층이나 루프탑과 연결된 최상층 등 플랫폼 공간으로의 개방성, 접근성의 정도는 건축에 상주하는 거주자 외의 사용자 범위를 어떻게 확대하는가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플랫폼 공간과 프로그램이 만나는 창의적인 시나리오, 다양한 사용자들이 상호소통하는 경험을 허용하는 구조 계획은 건물이 만들어가고자 하는 가치를 문화의 영역까지 확장시킨다.

 

원형이 가진 복합연결과 구획의 가능성을 다원화된 입주사, 개방 공유플랫폼의 유기적 조직에 활용해 혁신을 실험하고 소통하는 장소로 전환했다. 3, 4층의 기존 업무영역은 혁신을 실험하고 소통하는 생산기지로, 고유한 역사를 가진 지하 1, 2층의 공연장은 강연과 공연을 위한 장소로, 5층의 옥상 라운지는 네트워킹 공유플랫폼으로 계획하고 개방성을 강화했다. 도시 복합 건축으로서의 서사와 공공성의 맥을 이으면서 오랜 건축의 힘이 미래를 상상하는 토양이 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강동그린나래는 근로자인 발달장애인에게 일터인 동시에 사회와의 유일한 접점이기에, 이 공간의 새로운 규범은 일과 삶의 균형과 안정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이 됐다. 수직조닝은 발달장애인의 공간인지를 고려해 일터와 사회적 거실을 안배해 재배치할 수 있는 선택지를 탐색했다. 보호 작업장을 3층으로 옮겨 안정을 도모하고 지역민과의 공유를 고려해 1층에는 식당과 사무실을, 2층에는 열린 체육 공간과 심리 안정실을 함께 배치했다. 발달장애인 근로자의 근로와 근로 외 운동시간의 안배, 인근 지역주민이 함께 사용할 1, 2층을 채울 프로그램 운영의 방향성도 함께 논의됐다.

 

오르비스의 수직조닝은 대지의 입지를 살려 풍경 길을 열고, 이 경로를 통해 공간을 플랫폼으로 재구조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 건축주는 바닥을 덜어내 층간의 연결 공간을 얻는 방식의 도전적인 공간 이용과 운영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공간을 통해 사회와 재단의 비전을 공유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한 것이다. 보행자가 드나들 수 있는 접지 층인 1, 2층, 업무 존과 내부 계단으로 연결해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5층을 각각 개방의 정도를 달리 조정할 수 있는 공유플랫폼으로 배치하고 단면을 재구성했다.​

 

 

공공일호 수직 시나리오

 

오르비스 기획과 수직조닝 자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물성의 조직

 

혁신을 실험하고 소통하는 다원적인 플랫폼으로서 외부 그리고 내부 간의 경계가 한층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었다. 변화의 필요가 가장 크게 대두된 공간 요소는 공용부와 전용부를 이분해 구획했던 벽돌벽이었다. 건물 전면과 중앙의 두 계단실에서 공용 수직통로와 전용 공간 사이의 벽돌벽을 철거해 공간의 다양한 사용자들 사이의 직간접 커뮤니케이션을 허용하는 투명한 벽체로 변경했다. 건물이 거쳐온 변화를 가치의 지도로 삼지 않았다면 원형을 변경하는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붉은 벽돌, 콘크리트 노출로 된 벽과 천장의 원형 마감은 유지하고, 새로운 구획 벽들은 목재, 유리를 사용해 원형과 구분했다.

 

발달장애인 우호적 공간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고 실행했다. 내부 공간 구조는 일시에 시각적으로 개방되는 오픈 랜드스케이프를 지양하고 순차적인 소공간의 연결 구조로 만들었다. 돌봄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되, 심리적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노출이 덜한 공간을 선택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발달장애인 돌봄의 경험으로 검토된 내용들도 충실히 반영했다. 천장을 통한 소음전달을 방지하기 위해 구체에서 구체까지 세우는 칸막이벽, 흡음 기능이 있는 천장마감, 심리적 안정과 때로는 활기가 필요한 공간별 재료의 질감과 색상, 도색계획 등 감각에 미치는 공간 요소 또한 세심하게 고려했다. 

 

오르비스의 물리적 공간을 재구조화하고 세부적인 물성을 조직하는 데 있어 열쇠는 가로에서 옥상까지 대지에 고유한 풍경 길을 열어 도시와 공유하는 장소 경험을 만드는 것이었다. 평면과 입면 모두 정교하게 덜어내 재구축했다. 업무 공간으로 주 진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1층 식음 공간을 위한 별도의 출입구를 추가했다. 남측 한옥지구를 바라보는 1, 2층 사이와 3, 4, 5, 옥상층 사이의 바닥을 재구조화하고 두 수직 영역에 각각 계단을 추가했다. 바닥철거로 오픈된 공간은 각층의 허파 역할을 하게 된다. 추가된 내부 계단으로 층간을 복합하는 세부 조닝을 할 때는 미래의 변화에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염두에 두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오르비스 1층 남측면 단계별 철거와 풍경의 길 구축 과정

 

 

공공일호의 전면 계단실 활성화 계획

 

 

감각자극, 심리적 안정 간의 균형을 고려한 강동그린나래 마감재 계획과 완공 사진

 

나선형의 대화 

 

공간의 계획이 구체화될수록 공간의 핵심 가치를 구현하는 계획 요소들은 다양하게 확장된다. 운영관리자, 예비 입주사를 비롯 조경,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시공사 등으로 협의의 테이블은 확대된다. 세분화된 공간 요소들이 핵심 가치의 구심을 유지할 때 공간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서 힘을 갖게 된다. 그래서 건축가가 탐색하는 협력의 경로는 핵심 가치들을 다양한 공간 언어들로 확대, 구체화하는 나선형의 그것이다. 

 

공공일호의 입주사들은 여느 임대 공간 임대자와는 달리 임대 업무 공간의 사용자일 뿐 아니라 공간플랫폼의 주된 참여자였다. 2017년 리노베이션 당시에는 거꾸로캠퍼스, 혁신교육컨텐츠 아카이브인 온더레코드, 미디어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메디아티가 초기 입주사로서 공간 조성의 논의에 함께했다. 거꾸로캠퍼스 학생들이 현장에서 실험수업을 하고 계획에 피드백을 한 예는 대표적인 협력 사례다. 자기주도적 학습을 지향하는 거꾸로캠퍼스는 수업에서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하는지 탐색했고, 이를 토대로 평면을 세부적으로 계획하고 접거나 움직여 유연하게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협업책상 01테이블을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강동그린나래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한 카카오톡 방에는 리노베이션이 완공됐던 시점 기준으로 17명이 있었다. 발달장애인 근로자들이 공간의 정보를 이해하고, 스스로를 공간의 주체로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시점에 공간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협력할 롱잉디자인스튜디오의 박초롱, 발달장애인 당사자인 디자이너 박병준이 참여했다. 발달장애인 근로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면 방문자에게도 발달장애인 근로자들에게도 적정한 소통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디자이너는 브라보비버라는 캐릭터를 제안했다. 그리고 근로자들의 참여를 통해 ‘우리일터’, ’신나는 방’ 등 쉬운 실명이 정해졌다. 모든 공간 정보는 유사 시설 운영 경험자와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콘텐츠를 제작하는 피치마켓의 감수를 거쳤다. 

 

열린 공유플랫폼을 통해 대우재단의 역사와 현재, 추구해온 가치를 사회와 폭넓게 소통하는 것은 공간 계획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이를 구획된 공간에 전시하는 대신 공간 환경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제안했다. 필드워크가 합류해 기획하고 디자이너들과 협업해 공유플랫폼 1, 2층과 5층 그리고 이동 동선을 따라 대우재단의 히스토리-스케이프를 펼쳐 조성했다. 필드워크는 연혁과 소식을 알리는 주진입구의 LED 패널, 후원자의 벽, 주요 사업의 성과들을 인포그래픽월로 기획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브라보비버 캐릭터, 발달장애인 근로자의 작업장 작명 참여, 쉬운 공간정보, 쉬운 작업장 명 ©Park Byungjun 

 

강동그린나래의 사람들​ ©Park Byung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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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재단의 히스토리-스케이프 / Images courtesy of Daewoo Foundation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규범을 제안한다 

 

규범은 물리적 공간에 잠재된 시나리오를 사용자 스스로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스위치다. 공간의 전체와 부분의 변화를 이끌었던 가치의 지도가 수사로 남느냐, 작동하는 시스템이 되느냐는 이 과정에 달려 있다. 규범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정문을 항상 열어둘 것인지, 출입카드 없이는 통행을 불허할 것인지, 공간의 어떤 정보와 메시지를 우선하여 전달할 것인지, 동선과 접근성의 재고를 통해 사용자의 스펙트럼을 포용적으로 넓힐 것인지 등 공간을 조성할 때 설정된 가치를 실천하는 공간 사용법이다. 공간의 형식과 규범이 만나 장소의 메시지, 즉 장소의 이야기가 된다. 장소의 이야기는 건물 밖의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만들어지면 도시 전체의 서사와도 연결된다.

 

공공일호가 완공될 무렵 정림건축문화재단이 기획한 전시 <넥스토피아>(2017)에 발주처 공공그라운드와 함께 참여했다. 무엇을 보존할 것인지, 계획 과정의 질문과 답을 찾았던 여정을 공유했다. 전환의 시기에 건물에 거주했던 거주자와 새롭게 거주하게 될 거주자들의 인터뷰를 동영상으로 전시하고, 리노베이션 과정에서 아카이빙한 도면들을 전시했다. 도면 자료들은 실물과 함께 공공그라운드의 웹사이트 베타버전으로 디지털 아카이브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전시했다.   

 

‘도시는 열린책’ 웹페이지는 강동그린나래의 리뉴얼 백서이자 매뉴얼이 되길 바랐다. 위탁운영 사업을 맡은 한국자폐인사랑협회, 운영을 담당할 운영 실무자, 발달장애인 근로자와 부모님, 설계자와 디자이너까지 논의를 함께했던 구성원들의 목소리로 리노베이션의 의미를 담았다. 기획에서 시공까지 전 과정을 아카이빙했고, 발달장애인에 우호적인 공간 조성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비롯한 계획의 성과물들은 크리에티브 커먼즈로 다운받을 수 있도록 공유했다. 

 

공간을 플랫폼화한다는 것은 다양한 참여자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오르비스의 공간플랫폼은 다양한 속도와 콘텐츠의 궤도로 참여자를 초대한다. 5층의 대우학술총서 라이브러리는 800여 권의 학술서를 지원해 출판한 재단의 40년 역사의 핵심 사업을 공간 기반으로 확장한 것이다. 5층이 연구와 저술을 위한 멤버십 혹은 초대 기반의 플랫폼이라면, 오픈된 1, 2층 중 2층은 북저널리즘이라는 책과 뉴스 사이의 지식 생산과 유통을 기획하는 파트너, 1층은 식음 서비스를 제공하는 파트너와 함께 조성한 플랫폼이다.

 

공공그라운드 웹사이트 아카이빙 섹션 / Screenshot from 00 Ground website

 

 

<넥스토피아> 전시 전경 / Image courtesy of Junglim Foundation / ©Raya

 

 

강동그린나래 ‘도시는 열린책’ 웹페이지 이미지 / Screenshots from webpage ‘city is an open book’

 

좋은 건축은 만들어진다

 

이 글에서 다룬 세 리노베이션 작업은 건축가가 개입했던 시간을 지나 각각 다양한 행위자들에 의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건축가는 내비게이터로서 길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길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건축가가 아니다.

건축은 행위의 결과다. 좋은 건축은 지속적인 실천 속에 만들어진다. 건축가는 보이지 않는 필요와 가치들을 발굴해 자원과 연결하고 마침내 보이게 만드는 협력을 조직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작업실이 아닌 사회와 함께 구축한 원탁에서 좋은 건축은 만들어진다. (글 조재원 / 진행 박지윤 기자)

월간 「SPACE(공간)」 671호(2023년 10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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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원
조재원은 공일스튜디오 대표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적정하고 지속 가능한 가치를 더하는 사회적 공간을 탐구하고 실현하는 데 관심을 두고 일하고 있다. 다음 세대의 미래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지금의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조직할 수 있는 건축과 도시의 계획과 가버넌스로 관심사를 넓혀가고 있다. 2010년 제주 돌집 플로팅L로 제주건축문화대상 본상, 2011년 대구 어울림극장으로 공공디자인대상, 그리고 2016년 코워킹플랫폼 카우앤독으로 서울시건축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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