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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를 탐구하는: 날것의 건축

정의엽
자료제공
에이엔디
진행
한가람 기자

​​​「SPACE(공간)」 2023년 8월호 (통권 669호)  

 

콘셉트 스케치(건축적 바위산)

 

[ESSAY] 날것의 건축 

 

나를 찾는 건축

나는 건축을 하는 과정 속에서 나 자신을 찾아왔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생각의 이면에 꿈틀대는 질문과 상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한다. 가능한 한 타자의 방식이나 목적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려는가에 대해 답하는 과정이 되도록 노력한다. 반대로 건축을 이용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도 동일한 질문을 한다. 내가 만든 건축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나의 건축은 사람들을 어떤 관계의 평면에 배치하는가? 위계적이고 관습적인 구조 속에 사람들이 순응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독립적으로 자기의 욕망과 시선을 발견하고 강화하도록 지원하는가? 나는 건축이 각기 다른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활성화해 타자의 억압적 응시를 무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건축은 지금 여기에서 나만의 경험이 가능한 특이성의 장이 돼야 한다. 나아가 건축은 거주자에게 관습적인 거주 방식에 균열을 내고 새롭게 구성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와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순간에 직면할 수 있다. 

 

지각을 통한 경험 확장

건축의 본질은 인간을 둘러싸는 특정한 경계를 만들어 그 안에 거주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계의 특성은 그 건축에서의 경험적 특질을 부여하는 데 우선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익숙한 경계 너머로 거주의 경험을 확장할 것인가? 나에게 공간을 지각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확장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경험의 차원을 넓히는 것과 연결된다. 건축에서의 경험은 주로 주관적 감각과 객관적 인식 사이의 중간 영역, 즉 지각의 층위에서 일어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각의 영역은 고정되거나 명확하지 않기에 모호성과 해석의 여지가 많아 주체의 자율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자연이나 사물을 지각하는 과정에서 그 대상의 본질적 힘을 이해하거나 그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혹은 인간이 자연을 지각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일부가 되어 통합되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자신 너머에 존재하는 실체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지각의 순간은 언어로 명확히 표현될 수 없으나 나 자신을 근본적으로 자각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정의엽, ‘상실한 혹은 원초적인’ 연작, 종이에 연필, 21×29cm, 2020 

 

거주 공간과 이미지화 방식

사람은 환경을 상황과 관심에 따라 재구성된 이미지로 지각한다. 이미지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감각에 의해 수집된 질료를 특정한 방식으로 편집/형식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이미지화’라고 부른다면 그 대표적 예로는 원근법이 있다. 원근법은 건축물을 재현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공간을 지각하는 데에도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화 방식으로 쓰인다. 그러나 원근법에 따른 투시도의 사실성은 보이는 것과 달리 현실 경험의 한 측면일 뿐이다. 사람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고정된 소실점도 없고, 심리적 영향도 많아 원근법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아이의 그림이나 전통 동양화는 원근법적 투시도를 따르지 않지만 그 속에는 원근법이 담아내지 못하는 인간의 감각과 모습이 있다. 이렇게 이미지화하는 방식이 공간 경험과 밀착된 만큼, 그것은 새로운 건축 방식 혹은 거주 방식에 맞게 다시 발명돼야 한다. 

 

회화와 건축

건축 과정에서 논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면 모호한 욕망과 감각의 층위를 만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을 하다 보면 고민하는 와중에 수많은 상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중에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일부만 건물로 이어져 말과 다이어그램 그리고 건축 속에 자리 잡는다. 나는 이 과정에서 제거되는 많은 충동과 상상들을 표현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작업의 동기와 맥락을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말할 수 없으나 그릴 수 있는 것, 분명히 존재하지만 객관적으로 붙잡아둘 수 없는 지각을 그리려고 한다. 그것이 어쩌면 내가 만든 건축의 심층부를 구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설계가 시작되기 전에 그려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설계 중에, 그리고 때론 준공 후에 그려지기도 한다. 순서에 상관없이 그림들은 지어지고 나면 껍데기로 남는 건축의 공허감을 채우는 수단이다. 무엇을 지어도 좋지만 어떤 것도 꼭 그렇게 지어야 할 연유가 없는 상실감이 자리한 건축에 허구적인 진실이 필요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건축은 늘 남의 손에 의해 지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계획된다. 그렇기에 특정 순간에만 그려낼 수 있는 특이성을 제거한 채 도면을 그리게 되는데, 그림은 이러한 한계를 채워준다. 나에게 그림은 하나의 텍스트로서 지어진 건축을 설명하기도 하고 혹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정의엽, ‘평면과 입체 사이’ 연작, 캔버스에 아크릴릭, 34.8×27.3cm, 2022 

 

정의엽, ‘평면과 입체 사이’ 연작, 스트로폼에 아크릴릭, 100×80.3cm, 2023 

 

정의엽, ‘평면과 입체 사이’ 연작,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오일 파스텔, 90×72.2cm, 2022 

 

원초적 지각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19가 한창이던 2020년 가을, 제주도 남쪽에 위치한 납작하고 작은 섬 가파도에서 비대면 강의를 하고 산책을 하던 날이었다. 사방의 지평선과 수평선이 평행하게 보이는 그곳에서 수직으로 솟아난 갯바위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자연이 만든 오묘한 형태와 구멍들에 매료되어 표면을 만지고 기대고 앉고 누워가며 온종일 해변을 돌아다녔다. 용암이 물과 만나 굳어지며 생성된 바위는 거친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그 자리에서 영겁의 시간을 버티고 있었으리라. 어떤 의도적 가공이 없는 바위, 우연의 산물인 이 ‘날것’을 잘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구축물로 보였다. 상상할 수 없이 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바위의 색과 패턴, 질감 그리고 구축적 형태는 상대적으로 찰나의 존재에 불과한 나에게 물질과 시공간 그리고 거대한 힘의 운동에 대해 얘기해주는 듯했다. 그 바위의 서사는 자연과 나 사이에 있는 어떤 본질적 연결성 혹은 일체감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돌아보면 이런 날것에 몰입하는 체험은 시골에 살던 유년기에 처음 경험한 것 같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의 아이에게 숲은 놀이터이자 보물창고이자 도서관이었다. 한번은 나무가 빽빽한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나무들 사이로 아늑한 빈 공간을 발견한 적이 있다. 공간을 둘러싼 나무들은 마치 열주 같았고, 나뭇가지들과 바람에 움직이는 잎들은 벽처럼 공간을 절묘하게 둘러싸며 신비롭게 빛을 산란시키고 있었다. 늘 보던 나무들이 다르게 지각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생각을 잊은 채 한동안 그 날것의 공간에 머물며 내 집처럼 점유했다. 나중에 그곳을 다시 찾아가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지금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날것의 레시피

시간이 흘러 나는 이제 도시와 네트워크 상에서 일상을 보낸다. 사람의 감각은 물론 무의식적 행동마저 디지털 정보가 되어 복제되고 공유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나는 갈수록 유일무이하고 간접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어쩌면 디지털화될 수 없는 날것의 경험을 더 의미 있게 느낀다. 첨단의 인공지능이 도리어 인간적인 게 무엇인지 더 의식하게 하듯, 현대 도시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가장 원초적인 날것의 가치와 가능성을 끄집어낼 수도 있다. ‘날것’은 가공하지 않은 것 또는 자연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대상이며, 대상에서 관습적이고 편협한 인식을 이탈시키는 지각의 대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낯설게 다가오지만 나 자신을 자각하게 하고, 타자 혹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지각을 일으킨다. 나는 2020년 이후 날것에 대한 생각을 투영해 소위 ‘날것의 레시피’로 세 개의 건축물을 지었다. 멜팅하우스는 녹아내리는 경계, 메타박스는 2차원적인 3차원 구조체, 로스톤은 원시적 구축물을 다루고 있다. 레시피는 작업마다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된 측면도 있다. 먼저 재료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드러낸다. 둘째, 환경의 힘과 관계하며 지속해서 변화한다. 셋째, 인간의 지각적인 한계를 대면하게 하거나 확장한다. 그림 그리고 건축은 작업 과정에서 주목한 ‘날것’을 부분적으로 드러낸다. 어떤 부분은 그림에 존재하고 어떤 것은 건축을 체험할 때 존재한다.  (글 정의엽 / 진행 한가람 기자)​ 

 

 

정의엽, ‘녹아내리는 경계’ 연작, 캔버스에 유채, 33.4×24.2cm, 2022 

 

월간 「SPACE(공간)」 669호(2023년 8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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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엽
정의엽은 거주 방식과 경험을 확장하는 건축을 탐구한다. 특히 현대의 문화적 변이와 기술적 혁신을 통해 생성되는 차이와 특이성을 건축적으로 재해석하고 번식시키고자한다. 그의 건축은 회화로 이어져 개인전 〈평면과 입체 사이〉(2022), 〈날것의 레시피〉(2023)에서 전시됐다. 에이엔디(AND, Architecture of Novel Differentiation)의 주요 작품은 2011년과 2017년 한국건축가협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건축 베스트 7’과 2017년 아메리칸 건축상, 2018년 대한민국 신진건축사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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