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2023년 3월호 (통권 664호)
애벌레와 건축이 만나면: 분해농장_계단
건축에서 동물은 환경을 지속 가능하게 해주는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심지어 건축물 생애주기에서 도외시해온 철거 이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대체로 건설폐기물은 콘크리트 재활용에 기술이 집중되어 있고, 단열재는 재생이 어려워 소각 혹은 매립해왔다. 이용주(이용주건축스튜디오 대표)는 밀웜을 활용해 단열재 처리 방식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의 신작, 분해농장_계단에 대해 물으며 건축가의 고민, 의지, 그리고 밀웜의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분해농장_계단(2022)
인터뷰
이용주 이용주건축스튜디오 대표 × 한가람 기자
한가람(한): 분해농장_계단(2022)은 환경을 위한 건축 실험에 파라메트릭 디자인을 더한 파빌리온이다. 스터디 단계에 있던 재작년, 한 인터뷰에서 “최신의 것은 디지털 건축이 아닌 생물”이라며 관심사가 확장됐음을 알렸다.
이용주(이): 학교에 재직하면서부터 자연과학, 공과대학의 활동을 눈여겨본 덕에 첨단에 대한 선입견을 부수고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들에게 첨단은 기계나 IT, AI에만 국한되지 않더라. 재료, 생명, 생물공학 등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연구에 활용된다. 여기서 진보한 미래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문제가 더 악화되지 않게 현 상태를 붙잡아 두거나 아예 과거로 되돌리는 일도 해당된다. 간과했던 사실을 깨우치고 나니 건축에서도 생물은 디지털만큼이나 앞장선 주제였다.
한: 건축과 결합한 생물이라 하면 식물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밀웜(갈색거저리 유충)을 택했다. 어떤 부분에서 가능성을 봤나?
이: ‘스티로폼을 소화하는 동물’이라는 간략한 문구에서 시작됐다. 혹시 건축으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관련 기사나 논문을 찾아봤다. 밀웜이 스티로폼 택배 상자를 갉아 먹었다는 일반인 후기부터 밀웜 장내 박테리아가 스티로폼을 분해한다는 각 나라의 연구까지. 자료에 따르면 스티로폼을 먹은 밀웜의 배설물은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흙 대신 써도 될 만큼 안전하다. 이러한 습성을 활용해 건축계가 무감했던 철거와 폐기 단계에 화두를 던지고자 했다.
한: 밀웜의 소화 능력에 대해 스티로폼, 우드록, 비닐별로 대조실험을 했다.
이: 우선 밀웜이 스티로폼을 소화하는지 직접 검증하고자 했다. 주 먹이와 스티로폼을 먹은 배설물을 견주었을 때 색깔이 확연히 달랐다. 밀웜이 스티로폼을 분해한다는 명료한 증거다. 길이 50mm 이상 되는 슈퍼웜(아메리카왕거저리 유충)으로도 실험했는데 배설물 크기가 커서 그런지 냄새가 났다. 이외에도 관리, 비용 측면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의 작업에 10~20mm 크기의 밀웜이 슈퍼웜보다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다음 단계는 디자이너로서의 고민이 투영됐다. 어떤 재료를 써야 시각 효과가 두드러질지 궁금했는데 스티로폼, 우드록, 비닐 중에서 섭취 전후 차이가 큰 소재는 스티로폼이었다. 우드록은 화학적으로 스티로폼과 발포 폴리스티렌이라는 같은 물질로 구성되지만, 높은 밀도로 인해 밀웜이 구멍을 파고들더라. 비닐(폴리에틸렌)의 경우 밀웜이 섭취하기는 하나 속도가 느렸다. 논문에 따르면 비닐을 먹은 배설물에는 독성 물질이 있다고 한다. 종합해봤을 때 스티로폼이 디자인 재료로 적절했다.
스티로폼, 우드록, 비닐을 대상으로 한 밀웜의 분해 능력 실험
한: ‘애벌레 건축’(2020)은 밀웜을 이용한 첫 작품이었다. 밀웜 열 마리에게 50×50×1mm 스티로폼 판을 3~4일 정도 공급하고, 밀웜이 분해하고 남긴 스티로폼 판들을 쌓아 작은 오브제를 완성했다. 이 작업에서 무엇을 얻었나?
이: 이 작품은 서울도시건축전시관으로부터 〈다르게 보다〉 온라인 전시에 참여 요청을 받으며 제작됐다. 작품을 온라인으로 내보이는 형식은 일부러 작은 무언가를 만들어 확대해 선보일 기회였다. 그리하여 밀웜이 얇은 스티로폼 판을 먹는 과정, 판 56장을 쌓은 모습을 동영상으로 제작했다. 그러나 전시는 대면으로 열렸다. (웃음) 전시장 내 인공조명이 강하다 보니 밀웜이 스티로폼에 자꾸 파고들었다. 그다지 빛을 안 좋아하는 것 같다. 그때 다음 작업은 애벌레가 어른벌레가 될 때까지 마음 놓고 살아갈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애벌레 건축’(2020)
‘애벌레 건축’(2020)
한: 그 의지를 발전 동력으로 삼은 작업이 분해농장_계단이다. 스티로폼과 밀웜만 있던 관계에 이끼가 추가되면서 인공물로 만든 환경에 나름의 생태계가 조성된 점이 흥미롭다.
이: 이번에는 스티로폼에 밀웜을 내버려두는 대신 밀웜 스케일에 맞게 구멍을 뚫어 서식처를 제공했다. 구멍에는 흙과 이끼, 다른 먹을거리도 함께 넣었다. 주 먹이가 있어야 스티로폼도 잘 먹더라. 개념적으로는 밀웜의 배설물이 이끼에 영양분을 공급할 수도 있다. 이 정도면 자연에 가까운 환경이 아닐까 싶었다. 자연스러운 생태계라는 표현이 인간 중심적이고 이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럼에도 인공물을 최대한 동식물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바꾸고자 했다. 경기도 한 야산에 파빌리온을 설치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한: 이전보다 스케일도 더 커졌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규모로 원형 계단 형식을 갖췄다.
이: 밀웜의 가능성을 간단하게 탐구했던 ‘애벌레 건축’은 스티로폼을 사용하는 점 외에는 사실 건축과 큰 관련이 없다. 분해농장_계단은 소재에서 나아가 건물의 일부였던 폐기물이 다시 건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자 했다. 따라서 누가 봐도 공간으로 인지하는 형태와 크기가 중요했다. 공간을 의자나 벤치, 침대로 구현할 수도 있지만, 계단의 경우는 사람이 가만히 있는 대신 의도한 움직임 속에서 주변에 있는 밀웜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
한: 전체 형태는 디지털 건축 분야에서 갈고닦아 온 특장점이 묻어난다. 이번에는 6축 로봇팔로 선직면(ruled surface)을 조각했다.
이: 설계와 시공을 일치시켜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인한 제약을 해결해야 했다. 현실적으로 스티로폼을 가공하는 데 쓸 수 있는 도구는 열선밖에 없었다. 마침 학교에 6축 로봇팔을 들여온 지 얼마 안됐을 때다. 이 기계는 사람으로 치면 손에 해당하는 부분에 다양한 공구를 끼울 수 있고 여섯 개 구동 모터가 있어 다각도로 움직인다. 열선 결합도 가능해 도구 선택에 고민을 덜어줬다.
그다음 문제는 원형 계단 모양을 어떻게 구현하는가였다. 열선은 곡면을 만들 때 직선으로만 잘라야 하는 한계가 있다. 이에 부합하는 형태가 선직면이다. 선직면은 기하학에서 쓰이는 표현이라 낯설 수 있는데, 디지털 툴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이전에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같은 건축물에 종종 적용됐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선직면 조각 열두 개가 철골로 지지 결합됐다.
분해농장_계단(2022)
분해농장_계단(2022)
한: 분해농장_계단을 두고 “넷제로 건축을 넘어선 지속 가능한 방식”이라고 소개했으나, 구축 단계에서 환경을 위해 보완해야 할 점이 보였다. 예를 들면 실제 폐기물을 이용하거나 잉여 자재를 최소화하는 형태 구현 등이다.
이: 맞다. 건축가로서 생긴 욕심에 균형을 잃은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파빌리온이 건축에 가까운 구조물로 읽히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여겨 높이를 최대한 확보했다. 스티로폼이 단독으로 자립하지 못하게 되자 철골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철골 비용으로 계단은 1m쯤만 올라가도록 설치됐다. 잉여 자재 역시 그 당시에 선직면 가공에 초점을 맞춘 탓에 헤아리지 못했다. 디지털 건축을 해왔던 사람이라 그런지 반드시 기술을 접목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옭아맸다. 분해농장_계단의 스티로폼은 열선으로 반구 형태를 깎은 것이다. 원재료는 단열재에 쓰이는 스티로폼보다 두께가 다섯 배 넘게 차이 난다.
이후 프로젝트에서는 설득력을 보완하려 한다. 먼저 재료는 최소한 폐기물의 모습이라도 닮아야 마땅하다. 철거 현장에 가 보면 각종 잔해물이 섞여 있지 않나. 실제로 폐기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재료의 두께나 크기 면에서라도 비슷하게 맞추려 한다. 가공도 최소화할 계획이다. 분해농장_계단을 진행할수록 스티로폼 특성에는 조적식 구조가 마땅함을 체감했다. 벽돌과 모르타르처럼 자재의 기존 모습을 그대로 살린 채 연결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연결부 디자인을 모색할 예정이다. 구조체는 철골 같은 부가 요소가 삭제되고 완전히 스티로폼으로 구성될 것이다. 상자에 가까운 모습이 짐작된다.
한: 현재 분해농장_계단은 해체된 상태다. 상상했던 마지막과 실제 모습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다.
이: 우리에게 허용된 존치 기간은 약 2주였다. 그 사이에 밀웜들이 스티로폼을 다 먹어 치우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대신 밀웜이 충분히 스티로폼을 섭취한 후 성충이 되어 날아가고, 파빌리온은 어느 정도 허물어지고, 이끼는 더 퍼져 있는—인공물도 아니고 자연물도 아닌 그 중간의 모습을 그리긴 했다. 현실과 타협한 이상이었는데도 달성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웃음) 그럼에도 파빌리온을 영구 설치할 수 있다면 밀웜이 이 환경에서 계속해 살아갈 수는 있겠더라. 스티로폼을 섭취한 흔적은 맨눈으로도 충분히 확인됐고, 밀웜은 비가 와도 구멍 안에서 버텼다. 일부는 갈색거저리로 완전 변태를 했다. 변태 속도는 약 2주 정도로 빠르고 성충이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점에서 유지관리하는 데 사람 손도 필요했다. 우리는 이틀에 한 번씩 새로운 밀웜과 스티로폼 외의 먹이를 넣어줬다. 합하면 총 3천 마리 정도 된다.
한: 이 프로젝트는 생분해가 불가했던 단열재의 처리 방식을 모색한다. 밀웜을 이용한 건축 실험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이: 탄소중립 시대에 건축계가 가진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는 방안을 사회에 알리고 싶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지렛대 역할이고, 촉매제는 밀웜의 소화효소를 개발할 과학자다. 결국 이 건축 실험의 목적은 얼마나 많은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하는가에 있다. 식물이 아닌 낯선 동물이라는 점에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겠다. 다만 설득력을 더 높이기 위해 타 분야의 연구자와 협업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분해농장_계단(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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