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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너머를 보는 사람들: 〈우먼 인 아키텍처〉 ②

자료제공
우먼 인 대니시 아키텍처 1925~1975
진행
윤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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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이미지 Image courtesy of Danish Architecture Center / ©Laura Stamer

 


「SPACE(공간)」2022년 9월호 (통권 658호)


건축의 역사는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다양한 성과 신념, 배경의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가담한 수많은 노력이 배제된 채, 마치 모든 난관을 홀로 헤치고 공을 세운 듯이 천재 건축가의 생애를 비추는 건축사에 의문을 던진다. 다양성, 배려, 협력은 〈우먼 인 아키텍처〉​의 전시 책임자 그리고 전시 구성에 도움을 준 연구 팀 ‘우먼 인 대니시 아키텍처 1925~1975’​(이하 우먼 인 대니시 아키텍처)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단어들이다. 건축의 역사와 그 서술 방식에 대해, 이들이 가진 생각을 들어보자.


Ragna Grubb ​(1903 ~ 1961)


아카이브의 방향 전환: 역사책의 서술을 의심하다

인터뷰 스바바 리스토 우먼 인 대니시 아키텍처 공동대표 × 윤예림 기자


윤: 2020년 12월 시작된 코펜하겐 대학교의 연구 프로젝트 우먼 인 대니시 아키텍처는 팀 이름이 곧 연구 주제로, 덴마크 역사에서 소외됐던 여성 건축가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펼쳐 보이는 일을 하고 있다. 성평등지수가 세계 상위권인 덴마크에서 이러한 연구를 시작한 것이 의외인데, 그 계기가 궁금하다.
스바바 리스토(리스토): 덴마크는 성평등지수가 매우 높은 나라로 알려져 있고, 시민들 역시 자국에 대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국가에서도 그렇듯 20세기 덴마크 건축에 관한 기존 연구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남성에게만 집중돼 있다. 프로젝트 이전, 나와 헨리에트 스테이너(우먼 인 대니시 아키텍처 공동대표)는 20세기 덴마크 건축사를 공부하며 역사책에서 어떤 역사가 전해지고 또 생략되는지를 살펴봤다. 주로 유명한 남성 디자이너에게 맞춰 역사의 서술이 이뤄지고 여성 디자이너에 대한 언급은 희박하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이상을 바탕으로 기록된 근대 건축사는 마치 이 시대의 모든 디자인을 홀로 이룬 것처럼 ‘근대의 건축 영웅’을 그려낸다. 그러나 우리는 덴마크의 근대 도시가 들어선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그곳에 역사책이 전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그리고 훨씬 더 복잡한 협업 과정이 존재했음을 밝혀냈다. 기록되지 않고 잊힌 남성과 여성 건축가, 공학자, 정원사, 정치인, 거주민, 운동가들이 있었고 그 밖에 건축재료와 나무들, 수도 시스템 역시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뒤엉킨 협력 관계를 자료에서 읽어내고자, 우리는 여성 건축가를 연구하기로 선택했다.

윤: 역사책 바깥의 것들에 관심을 두면서 시작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문장에 ‘더욱 포괄적인 건축 역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스토: 그렇다. 우리 프로젝트가 바라는 점은 ‘포괄적인’ 덴마크 건축사를 쓰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시대가 직면한 수많은 위기와 문제들에 건축가들이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질문하기 위해서, 건축 역사를 새롭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프로젝트의 목적은 단지 잊힌 여성을 조명하는 일뿐만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이해하고 협업, 다양성, 보호 등의 미래지향적 가치들로 사고 방향을 전환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포용적 자세는 우리 시대의 위기와 문제에 대응하는 데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며, 보다 정의롭고 합리적인 미래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Grethe Meyer (1918 ~ 2008)

윤: 건축학과가 아닌 조경학과에서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리스토: 단순히 프로젝트 시작 당시 내가 조경학과의 교수로 있었기 때문인데, 오히려 연구가 조경학과에 기반을 두고 있어 얻은 의외의 통찰과 흥미로운 관점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가 건축물 하나하나와 도시계획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사실 근대 덴마크에서는 건축가와 도시계획가, 조경가가 밀접하게 협업해 건물과 정원, 인테리어 등 연관된 모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이 나라의 도시, 건물, 풍경에 미친 영향을 측정할 때도 건축과 조경을 포함한 다양한 전문 배경을 가진 여성들의 활동을 두루 밝히는 것이 올바른 접근일 것이다. 

윤: 그런가 하면 연구의 시대적 범위를 1925년부터 1975년으로 특정하고 있다. 여성의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역사가 그 시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지 않은가.
리스토: 정확히 보았다. 이 주제는 단지 덴마크나 이 시대로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역사학자로서 우리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연구 범위를 지정할 필요가 있었고, 덴마크에서 활동했거나 교육을 받은 여성들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들의 생애를 추적하다 보면 알 수 있듯, 이들은 국경을 넘어다녔고,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에 참여했으며 국제 담론의 일부였다는 점 또한 인지하고 있다. 연구 기점을 1920년대에 두기로 한 이유는 이 시기 덴마크에서 건축과 조경을 공부하는 여성들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한 조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후 50년은 더 많은 여성들이 이 분야에 들어서는 놀라운 시기였으며 근대 덴마크의 대부분이 다져진 때이기도 하다. 반면 1970년대 이후에는 페미니즘에 기반한 새로운 활동과 건축 내 사회운동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으므로, 그 이전인 1975년까지를 범위로 설정했다.

윤: 우먼 인 대니시 아키텍처의 아카이브는 기존의 아카이브에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 아카이브와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리스토: 제도화된 건축 아카이브는 암묵적으로 남성의 업적이 여성의 업적보다 가치가 높다고 상정하고 있다. 여성을 일부러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 얽힌 여러 요인들과 전통적 방식의 결과일 것이다. 덴마크의 건축과 조경 분야 아카이브를 보면 대규모 사무소에 속한 교수들이나 책임 디자이너들의 업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지위는 대부분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설계사무소의 직원들, 도시계획가, 교사 등 여성의 비율이 높은 다른 분야의 업적은 공식적인 아카이브에 많이 수집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여성 잡지나 지방 기관의 아카이브에, 혹은 건축가의 자녀나 예전 직장 동료들에게, 어쩌면 친구의 다락방이나 서랍 안으로 눈을 돌리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일은 바로 이런 자료들을 가시화하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것이다.

ByWomen: A Guidebook to Everyday Architecture in Greater Copenhagen (Ikaros Press, 2022)

윤: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출판, 전시, 워크숍, 팟캐스트 등의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여러 매체와 형식을 통한 각 활동들의 역할은 어떻게 상호 보완되며, 이들이 향하는 하나의 지향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리스토: 우리는 이 연구에 역사학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길 원한다. 이를 위해 프로젝트 초기부터 대중과의 접점을 다양하게 고민했다. 연구를 할수록 학생들과 건축가들을 비롯해 성별 이슈 및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알게됐다. 그들에게 우리 연구의 발자취를 공유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기도 했다. 더 나아가 공유는 피드백과 아이디어를 얻는 경로가 된다. 일례로 한 남성이 자기 동네의 여성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을 때 우리는 그에 관해 가진 정보가 없었고, 이는 몰랐던 여성 건축가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는 계기가 됐다. 또 우리는 공식적인 자료 외에 아카이브의 
여지가 있는 자료를 지닌 사람들과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다. 간혹 할머니의 장롱에서 발견한 귀한 아카이브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식의 ‘아카이브 중심적 활동’과 대중과의 대화는 연구에 보람과 재미를 더한다.

윤: 20세기가 아닌 현재의 덴마크 건축계에서 여성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은 건축학 전공의 여자 졸업생 비율이 공학계열 중 높은 편에 속하지만, 건설업 취업자 통계 중 여성 비율은 10%를 웃도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리스토: 현재 가르치고 있는 코펜하겐 대학교의 조경학과에는 거의 80%의 학생이 여성이다. 조경학과만큼은 아니지만 건축학과에서도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많은 경우가 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마크 건축계를 선두지휘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대부분 남성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이슈가 대두되어 많은 교육제도에서 이를 개선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만일 모두가 살기 좋은 건축과 환경을 원한다면, 그것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정체성들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윤: 최근 개최한 아카이브 워크숍에서 ‘페미니스트 아카이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답을 어떻게 찾아나가고 있는가?
리스토: 이는 지난 수십년 동안 페미니스트 학계와 운동에서 가장 중요했고, 최근의 덴마크 또한 여전히 필요로 하는 질문이다. 첫 번째로 아카이브를 단지 ‘과거’를 수동적으로 담은 자료의 창고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기록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카이브에 들어갈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이를 어떻게 체계화하고 관리할지를 정한 누군가가 있었다. 이는 우리가 아카이브를 대상으로 질문하고 비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아카이브를 확장하고,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다른 목소리와 자료들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여성 건축가의 업적을 위한 자리일 수도 있고, 원주민이나 난민들, 아니면 역사로부터 소외된 집단들, 목소리나 권력이 비교적 작은 자들의 이야기를 위해서일 수도 있다. 또는 공식적이지 않은 자료로 여겨져온 사물, 구술 인터뷰 등이 아카이브에 포함됨을 의미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 아카이브가 꾸준히 지켜나가야 할 일은, 아카이브의 역할은 무엇인지, 보다 포괄적인 역사서술을 위해 아카이브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되묻는 것이다.

Group photo of WOMEN IN DANISH ARCHITECTURE / ©Maja Flink


▲ SPACE, 스페이스, 공간


스바바 리스토
스바바 리스토는 코펜하겐 대학교 부교수로 헨리에트 스테이너와 함께 연구팀인 ‘우먼 인 대니시 아키텍처 1925~1975’를 이끌고 있다. 2022년 덴마크 건축센터와 함께 전시 〈우먼 인 아키텍처〉 중 역사 부분을 큐레이션 했고, 저서 『여성에 의한: 코펜하겐의 일상 건축 가이드북』(2022)을 출판하고 팟캐스트 시리즈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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