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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의 스페이스 (논)픽션] 2. 저격수의 골목

글
정지돈
진행
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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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이미지) ’재팬 빌리지‘​ 항공 사진 / ​ⓒUS Army_ 이미지 제공 Wikimedia Commons ​

 

 

1.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해보자. 당신은 어떤 프로젝트 때문에 외국에 체류 중이다. 어느 날 당신은 뉴스를 보게 된다. 남한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서울은 폭격과 전투로 쑥대밭이 됐고 국경은 봉쇄됐다. 이제 여권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며 당신은 난민과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
망명지에 있는 국제기구의 인권연구소에서 당신을 호출한다. 전쟁 범죄의 증거 자료를 수집 중인 연구소는 당신에게 서울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건넨다. 익숙한 거리와 건물들이지만 어딘가 낯설다. 아파트 단지는 폐허가 됐고 한강을 잇는 다리는 끊겼으며 광화문 광장은 불타고 부서진 잔해로 가득하다. 연구소에서는 사진 속 장소의 정확한 위치와 건물의 용도 따위를 기록해 달라고 말한다. 
당신은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매일 지나다녔던 골목의 건물이 갑자기 사라지고 없다면, 당신은 그 건물이 몇 층이었는지, 입구는 어땠고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공간을 떠올렸을 때 당신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무엇일까. 

2.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보스니아 출신의 작가 알렉산다르 헤몬은 실제로 위와 같은 일을 겪었다. 사라예보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1992년 연수 프로그램을 위해 시카고로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고 끔찍한 보스니아 내전이 터졌다. 그는 전쟁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국제 인권법연구소에서 폐허가 된 도시의 사진을 확인하는 일을 했다. 사진 속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사체의 신원을 파악하는 기분이었다고, 그는 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는 건물도 있었고 냄새가 코를 맴돌 정도로 선명한 건물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던 여자친구 레나타를 기다리던 모통이 건물이 그랬다. 레나타는 항상 늦었고 그럴 때면 헤몬은 1층 슈퍼마켓에 들어가 사탕이나 담배를 샀다. 사진을 보는 순간 건물 벽에 기대 말던 담뱃잎의 향이 바로 앞에서 들이미는 것처럼 코 안으로 훅 들어왔다.
나는 헤몬의 경험에 착안해 소설을 구상했다. 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도시를 기억해야 하는 일을 명령받은 사람이다. 그는 건물의 용도나 위치를 표시하고 기록하는 정도를 넘어, 도시를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재현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는다. 기관은 이를 위해 텅 빈 사막의 거대한 부지를 내준다. 건축가, 도시계획가, 조경전문가, 시공업체, 기타 부서들이 따라붙는다. 그들은 당신의 기억에 따라 사막에 도시를 지을 준비를 끝냈다. 이제 남은 건 기억 속의 공간을 떠올리는 일뿐이다.  

3.
고통은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된다. 데이비드 실즈의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자신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듯이 보이는 장소, 사물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말이다. 내 소설의 주인공 역시 소설 후반에 이르러 기억하고자 애쓰는 도시의 풍경, 재현하고자 하는 세부, 그러나 떠오르지 않는 공백에 어떠한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간의 디테일과 함께 슬픔의 정확한 내용도 망각해버렸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도시와 공간을 재현하는 것은 곧 잊혀진 기억, 망각과 트라우마, 상실을 다루는 일이라는 사실을 주인공은 깨닫는다.
꽤나 진행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나는 이 소설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저격수의 골목>이라는 그럴듯한 가제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쥐꼬리 만한 원고료, 빡빡한 스케줄, 저조한 책 판매량 등등 이유는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공간을 기억하는 행위의 모호성이다. 뭐랄까, 단순하게 말하면 공간을 기억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그곳의 물리적 조건을 떠올리는 것일까, 공간에서 수행했던 행위나 일어난 사건을 떠올리는 것일까. 단지 그 건물을 다시 짓는 거라면 문제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전히 똑같은 건물을 짓는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 해도 다른 시간과 장소에 재현된다면 그곳을 동일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러한 재현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뭘까. 모든 것은 파괴되고 망각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억하고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공간이 그 대상이 될 때는 뭔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4.
1943년, 체코 출신의 건축가 안토닌 레이먼드는 스탠더드 오일이 스폰서를 하고 미육군이 지원한 ’재팬 빌리지‘ 프로젝트를 의뢰받는다. 프로젝트는 유타 주의 사막에 도쿄와 유사한 구조의 전통 목조가옥과 거리를 짓는 일이다. 1921년, 레이먼드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함께 제국호텔을 짓기 위해 도쿄에 갔고 이후 일본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는 도쿄에 건축사무실을 차리고 20년간 살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 된 뒤에야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재팬 빌리지를 짓는 데 안토닌 레이먼드보다 적격인 사람은 없었다.
갈 곳 없는 일본 사람들이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미육군이 재팬 빌리지를 지은 건 물론 아니었다. 재팬 빌리지는 M-69와 같은 소이탄의 성능을 점검하기 위해 건설됐다. 한마디로 파괴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그들은 폭탄의 성능을 정밀하게 파악하기 위해 다다미와 후스마 등 가옥 내부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동일하게 제작했다고 한다. 
훗날 레이먼드는 프로젝트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는 걸 인정하며,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쿄 대공습은 지나치게 큰 재앙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통틀어 가장 큰 학살이었다. 당시 작전을 진행한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민간인 피해를 염려하는 말에 대해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미치광이 전쟁광 장군은 르메이를 모델로 만든 것이다. 
안토닌 레이먼드는 종전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기 위해서인지, 일본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폐허가 된 도쿄에 일거리가 많아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일본인들이 그가 저지른 짓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지금에 와서 그가 위선적이었는지, 진심으로 반성했는지를 따져 물을 순 없을 것이다.
내게 흥미로운 건 그가 공간을 반복해서 기억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파괴로, 다음에는 재건으로. 헤몬과 레이먼드의 사례는 공간을 기억하는 행위가 단순히 물리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공간의 기억은 언제나 폐허, 단절, 파괴, 이주와 연결된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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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
정지돈은 소설가다. 2013년 등단하여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과 2016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다. 펴낸 책으로는 『내가 싸우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문학의 기쁨』(공저),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야간 경비원의 일기』, 『영화와 시』, 『모든 것은 영원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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