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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이른 해수욕장: 캠프 2020

정이삭
사진
노경
진행
김예람 기자
background

기다림에서 준비하는 시간으로

 

2020년 2월 17일 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강원도 원주시 태장동에 위치한 캠프롱을 방문했다. 오래도록 사용되지 않은 철문을 열고 들어간 부대 안은 철 지난 해수욕장처럼 황량했다. 캠프롱의 모습은 마치 어제 미군들이 떠난 것처럼 10년 전의 상태 그대로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스팔트를 비집고 나와 거칠게 자란 뽕나무만이 그 10년의 시간을 가늠하도록 도울 뿐이었다. 캠프롱은 1955년에 지어진 미 육군기지로, 그 이름은 한국전쟁에서의 공로로 명예 훈장을 받은 육군 병장 찰스 롱에서 비롯됐다. 그러다가 2010년 6월 4일 주둔지가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캠프롱은 그 후로 10년간 비워진 채로 있었다. 원래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서(LPP협정서)​1에 의거하여 캠프롱이 2008년에 국방부로 반환될 계획이었으나, 일정이 미뤄지면서 2019년 12월 11일에 반환됐다. 약속한 시간보다 10년이 늦어진 셈이다. 그런데 캠프롱의 개방은 토지정화 사업으로 인해 또다시 그 시기를 예상할 수 없게 됐다. 부대를 둘러보고 나와 이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토지정화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각계 전문가와 창작자 그리고 시민이 부대를 둘러보고 생각을 나눈다면, 그 기약할 수 없는 완전 개방까지의 시간이 가치 있게 쓰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방문 이후 정확히 10일 뒤 원주시장 및 시 관계부서, 국방부 등의 관계자들과 함께 다시 캠프를 찾았다. 단체 답사 후 원주시는 주요 건축물을 남긴 채 문화체육공원을 조성하는 계획을 재고하여 기존 건축물 다수를 존치하기로 결정했고, 문화예술 행사를 통해 향후 캠프롱의 활용 가능성을 구상하기로 했다. 그 사업이 구체화되면서 필자는 총감독을 맡았고, 전시와 공연의 두 축으로 진행될 문화예술 행사의 이름을 〈캠프 2020: 동시대 예술과 변이하는 계획들〉(이하 캠프 2020)로 제안했다. ‘임시 주둔지’를 의미하는 캠프의 뜻처럼, 미군이 잠시 있었던 이곳은 앞으로 대한민국과 원주시민의 것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소중한 시민 자산의 쓰임새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부지를 온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이곳의 바른 쓰임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전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사업 준비와 실행 기간은 두세 달 정도로 짧지만 이 정의되지 않은 땅의 첫 문화예술 주둔자가 최선을 다해 이곳의 역사를 이해하고 이 장소의 동시대적 역할을 예술로써 질문하며, 그 질문들은 계속해서 변이하게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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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민이×정이삭, ‘원주 고추, 무말랭이, 캠프롱 정원’, 혼합재료, 2020

 

최대진, ‘라스트 찬스’, 드로잉, 2020

 


 

 

스물여덟 가지의 생각들​

<캠프 2020>의 전시 섹션은 김재민이, 이완, 정소영 등 5팀(17명)이 참여한 ‘커미션 프로젝트’와 김희천, 백정기, 장영혜중공업, 최대진 등 9팀(11명)이 참여한 ‘현대 1차: 어디에 기르는가’로 구성됐다. 그중 커미션 프로젝트에는 미군부대라는 특수한 장소를 해석한 작업들이 있었다. 김재민이×정이삭은 소프트볼장 내 아담한 뽕나무 숲 사이에 평상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무말랭이와 고추를 말리는 작업을 선보였다. 방문자가 평상에 앉아 말라가는 무말랭이와 고추를 보면서 그 사소하고 짧은 행위와 시간을 기념하기를 바란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근 70년의 거창하고 무거운 장소에 7일간의 가장 일상적이고 평온한 행위가 가능함을 즐기고자 한 것이다. 건축가 듀오 다이아거날 써츠(김사라, 강소진)는 자연으로 만들어지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구축을 고민하며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묻는 작업을 진행했다. 수많은 들풀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을 정렬하면서 이 땅에는 결코 미군만 있지 않았음을, 우리의 들풀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곳에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정소영은 캠프롱 첫 방문 당시 교회의 출입문 안쪽으로 날아 들어온 나뭇잎과 솔방울의 모습에 착안하여 작업했다. 미군이 떠나고 10년간 간헐적으로 방문한 사람들이 굳게 닫혀있던 교회의 문을 열 때마다 나뭇잎들이 아주 조금씩 날아들었는데, 작가는 그 자연의 움직임을 조형 작품으로 구현했다. 현장에는 밀레니얼 세대의 작가들이 미군과 캠프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작업들도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결성된 ‘캡틴 아메리카와 달콤한 망령들 그리고 아홉 명의 외지인’(이완, 마고킴, 맨디리, 신호철, 양근배, 이소윤, 정여름, 조원, 한희조)은 옛 미군기지에 남겨진 사물들의 퇴역을 축하하며 장소 해석적 작품을 제안한다. 이완은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한 작가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우선 그는 여러 가지 미국 코믹스 캐릭터들을 부대 곳곳에 숨겨놓는 방식으로 그룹작업의 틀을 잡았다. 핵심 캐릭터인 캡틴 아메리카가 가분수의 형상으로 야외수영장 중앙에 당당히 버티고 서있는 모습은 매우 함축적인 방식으로 한미 두 나라가 함께한 과거와 현재의 달콤함과 쓴맛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신호철은 어디로 향하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지점토로 만들어진 부서진 작품 운송 상자의 파편을 수영장 물 위에 부유시켰고, 그 옆에서 양근배는 수영장 바닥의 작은 지형 변화 작업을 통해 이 땅의 헤아리기 어려운 욕망의 일렁임을 표현했다. 그리고 3인으로 구성된 데이스프링(유나얼, 야루, 송원영)은 볼링장 내부를 중심으로 과거 부대 내의 일상을 환기하는 작업을 구축했다. 섹션 ‘현대 1차: 어디서 기르는가’는 캠프라는 장소적 특성에 반응하기보다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설적 서사들에 집중한다. 11명의 작가들은 이 캠프에 새로운 현대 1차 아파트를 꾸미는 마음으로 다양한 근현대사의 순간들을 입주시켰는데, 그중 최대진은 의무대 건물 앞 야외 공간에 회화 작업 ‘라스트 찬스’(2020)를 설치했다. 이 작품은 2000년 일본 오사카에서 이뤄진 스포츠 경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남한의 조인주 선수와 북한 국적의 조총련계 홍창수 선수의 프로복싱 대결의 한 장면을 재현했는데, 북한 국적의 선수 허리끈 위로 ‘One Korea’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작품들을 통해 드러난 우리의 근현대성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연속되지 못하고 분단된 시간을 보내왔다. 대한민국 근현대의 공간과 시간은 실을 활용한 이정형의 작업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관계 맺고 경계를 흐리는 자연을 닮지 못했다. 그리고 그 공간과 시간을 통과한 우리의 몸짓을 영상에 담으면 마치 군대의 제식 동작과 같이 구분 동작으로 규정된 정지화면뿐이다. 이 섹션의 작가들은 중립도 과정도 회색도 용납하지 못하는 그 잔인한 역사의 단상들을 체념한 듯 말하고 있다. 

  

 정소영, ‘굴러온 길’, 혼합매체, 2020 

 

 

철 이른 해수욕장

 

국방부와 원주시에 전시를 제안하고 준비를 시작하면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더 이상 시민 개방의 시기를 늦출 순 없었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토지정화 사업 전에 시민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 그리고 창작자들이 이곳에 들어와 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국방부가 원주시로 관리 권한을 완전히 넘기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곳의 쓰임새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단 두 달 안에 전시를 완성해야 하는 숨 가쁜 과정 속에서 이런저런 긍정과 부정의 말을 듣게 됐다. 사실 비판을 어색해하는 미술계과 건축계여서 그런지 부정의 말은 듣기가 어려운데, 전시 기간 중 참여 작가에게서 한 SNS 게시글의 캡처 이미지를 전송받았다. 전시에서 장소에 관한 설명이 없었다는 미군부대 연구자의 게시물과 그에 동조해 대대적 개선 계획이 예정된 역사적 상흔의 공간에서 거의 관습적 양태로 기획되는 미술 전시에는 가고 싶지 않다는 미술 비평가의 글이었다. 두 게시물 모두 <캠프 2020>이 고민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명이 건물의 입구를 차지하는 경험의 방식에는 의문이 든다. 개인적으로 수덕사 대웅전 안에서 들리는 6시 저녁 예불의 북소리를 좋아한다. 날이 저물어 관광객은 돌아가고, 그 잔잔히 빠른 북소리와 함께 스님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어둑해지는 대웅전의 실내를 초로 밝히는 순간 내가 이 공간이 가진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대웅전 마당의 건물 안내판은 이런 감각을 억제시키며, 살아있는 건물을 박제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경우에 따라서는 몰라야 더 잘 보이는 법이다. 특히나 이제 막 기분 좋게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시민들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총감독으로서 캠프롱 방문자에게 바란 것은 걷고 보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읽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며, 읽고 생각하는 것과 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행사를 기획한 입장에서 부대를 방문한 시민들이 아무런 편견과 머뭇거림 없이 캠프롱을 걷고 보고 생각하길 바랐고, 그들이 작가들의 작업을 설명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두렵게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10년 뒤에 무릎을 치고 아는 한이 있어도 작품들이 너무 설명되지 않기를 원했다. 심지어는 작업이 구색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무성히 자란 뽕나무의 오디도 바라보고, 딱따구리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여름에도 시원한 의무대 건물의 실내 복도를 경험할 수 있다면 작가들의 작업은 구색이어도 좋을 것 같았다. 

소셜 네트워크에 어느 비평가가 올린 글처럼 캠프롱은 대대적인 뜯어고침을 앞두고 있지 않다. 처음엔 대대적 개조를 염두에 두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올해 2월 처음 캠프롱의 체육공원 개발계획을 봤을 때, 신이 됐다고 착각한 인간이 부대 내부를 걸어보지도 않고 그린 무성의한 용역 결과물에 무척 참담한 심정이었다. 기존의 부대 내 지형과 도로는 무시됐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는 신축 위주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원주시장의 첫 기지 방문 이후 여러 전문가의 공통된 조언으로 기존의 수림과 조경 방식, 도로의 형태를 존중하고, 최대한 많은 건물들을 재사용하는 방향으로 수정됐다. 더 나아가 6월 19일 개막식 이후에는 캠프롱 전체의 현상 유지와 개별적이고 순차적 수선이 결정됐다. 캠프롱이 현상 유지되어서 잘됐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 정책결정권자와 시민들의 머릿속에 기존에 없던 옵션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상상할 수 없는 자에게는 잘못이 없다. 건축가나 기획자처럼 상상할 수 있는 자들이 침묵한다면 잘못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거의 관습적 양태의 전시’가 된다고 해도 누군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이 좀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방향이라면 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다.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의 내용과 진심이다. 마릴린 먼로가 말년에 “내 인생은 철 지난 해수욕장 같다”고 했단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캠프롱이 철 지난 해수욕장일 수 있으나 원주시민에게 이 미군기지는 아직 개장도 안 한, 단지 비어있는 바닷가일 뿐이다. 이제 막 모래를 정비하고, 노점들이 음식을 내놓고, 상점은 물건을 진열하고, 주민들은 웃자란 나무를 가꾸며 손님을 기다리는 철 이른 6월의 푸른 해변이다. 그동안 캠프롱은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자, 우리의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는 섬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분명 이곳과 교감한 우리의 역사가 존재한다.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심지어 지우고 싶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역사다. 그렇게 겪어온 시간과 걸어온 길이 곧 지금의 우리 자신이다. 스스로를 부정하면 자신의 삶이 만들어질 수 없듯이, 그 과거를 지우거나 갈아엎으면 우리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캡틴 아메리카와 달콤한 망령들 그리고 아홉 명의 외지인의 설치작업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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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2년 3월 29일 주한미군사령부가 국내 미군기지 28곳과 훈련장 3곳 등을 2011년까지 단계적으로 대한민국 국방부에 반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협정서는 2002년 10월 31일에 발효됐다.

 

 


정이삭
정이삭은 에이코랩의 대표이자,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DMZ 평화공원 마스터플랜 연구, 철원 선전마을 예술가 창작소, 연평도 도서관, 헬로우뮤지움, 동두천 장애인 복지관 등의 공공적 연구나 사회적 건축 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제15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의 한국관 큐레이터이자 작가였으며, 2016년 베이징 디자인위크의 한국관 큐레이터로 참여하는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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