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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의 역할 회복: 설계의도 구현제도

남정민(고려대학교 교수)
진행
이성제 기자

 

 

건축사가 건축물을 설계한 뒤 이를 실현하는 공사 단계에 참여하는 일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건축사의 기본 업무이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건축물 설계와 감리가 법적으로 분리돼 있어, 건축사는 본인이 설계한 건축물이 실현되는 단계에서 배제돼왔다. 그 바탕에는 건축물을 공산품처럼 ‘도면’대로 짓고 관리하면 된다는 생각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건축물은 장기간에 걸쳐 현장 작업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 공사로 실현된다. 국내 대부분의 공사 현장에서는 ‘공사용 도면’이 부재한 상태로 공사 일정이 계획되고 있다. 설계자의 ‘실시도면’은 디자인 의도가 상세하게 담긴 기술도면에 불과해서, 이를 바탕으로 시공자가 작성한 ‘상세시공도서’를 공사 도면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상세시공도서 없이 공사가 추진된다. 이에 더해 건축 공사에는 날씨, 재료, 인력, 장비, 대지 조건 등 다양한 변수가 개입한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변하는 요소들을 조율하다 보면, 추가적인 변경과 조정이 불가피하다. 이뿐만 아니라 시공자와 공사감독관 등에 의해 재료와 디자인이 자의적으로 변경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그래서 설계 단계 업무가 완료될 당시 최종 결과물로 합의한 설계도서와 다르게 시공되는 경우가 생기고, 건축물의 ‘디자인과 품격’이 상당히 저해되는 결과로 이어진다.▼1 이를 초래한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공사 단계에서의 설계자의 부재가 가장 크다.

 

설계자의 기본 업무, 설계의도 구현

2020년 6월, 서울시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설계의도 구현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혔다(「SPACE(공간)」 2020년 8월호 NEWS 참고).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사업을 포함해, 2021년 공사 발주 사업을 대상으로 즉시 시행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국내에서 설계자를 공사 단계에 다시 참여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에 설계자의 설계의도 구현을 명시한 조항이 2013년도에 제정됐는데, 업무 범위 및 대가에 관한 기준 등이 뒷받침되지 못해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그렇다면 서울시에서 이번에 시행하는 제도는 어떠할까?

 

 


 

 

먼저 서울시는 설계의도 구현과 관련한 용어들을 통일하고 혼선을 막았다. 「건축사법」의 ‘사후설계관리업무’, 「건축기본법」의 ‘디자인감리’ 등 기존에 흩어져있던 유사 업무들을 포괄해 ‘설계의도 구현’으로 일원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앞으로 서울시에서 진행되는, 설계자의 공사 단계 업무는 모두 설계의도 구현 업무로 시행된다.▼2 또한 서울시는 설계의도 구현에 관한 표준업무 기준을 제시했다. 공공건축물의 ‘디자인과 품격’을 확인하고 자문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이를 설계자의 기본 업무로 규정했다. 그리고 실행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과업도 명시했다. 그럼으로써 ‘품질 및 안전, 법제도’ 등 객관적 사항의 확인 및 관리에 중점을 둔 ‘감리’와 구분했다.▼3

이는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해외 건축 선진국들과 큰 맥락에서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각 국가별로 규정한 건축사의 기본 업무에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설계 업무’와 ‘공사 단계 업무’를 설계자의 기본 업무로 정의하고 있다.▼4 그리고 공사 단계 업무는 건축물이 설계도서에 부합해 디자인과 품격을 갖춰 구현되도록, 설계자가 시공 과정에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즉 공사 단계에서 설계자의 업무는 설계의도를 구현하는 것이며, 이는 ‘공공의 안전과 품질을 위한 관리’에 중점을 둔 감리 업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이유로 해외에서도 감리는 설계자뿐 아니라 공공 혹은 제3자에 의해서도 수행될 수 있지만, 설계의도 구현은 설계자가 수행해야 하는 기본 업무으로서 정립돼왔다.▼5

 

그림자 노동에서 공식 업무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설계자의 공사감리 수행이 법적으로 제한된 이후에도 많은 공공건축물에서 설계자가 공사 단계에 참여한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 개별 건축사들에 의한 자발적인 ‘무상 서비스’로 수행됐다. 무상으로라도 공사 단계에 참여하지 않으면, 설계자도 모르게 설계도서가 변경되거나 현장에서 발생한 변수로 인해 설계자의 의도와 다르게 공공건축물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서울시의 설계의도 구현제도는 ‘그림자’처럼 수행되던 설계자의 공사 단계 업무를 공식화하여 실행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서울시는 시에서 발주하는 공공건축물에, 설계자의 설계의도 구현과 관련한 업무체계를 수립했고, 설계의도 구현을 별도 용역 계약으로 의무화했다. 또한 ‘설계의도 구현 세부업무 내용’, ‘설계의도 구현 업무 과업내용서’, ‘업무수행계획서’, ‘대가적용 방식과 요율기준’ 등 해당 업무가 실행되기 위한 기본 체계를 마련하고 사용승인 시 ‘설계의도 구현 참여 확인서’ 제출을 의무화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인정받지 못한 채 이루어지던 설계자의 공사 단계 업무를 공식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서울시의 설계의도 구현제도는 기존에 법제화된 내용보다 확대된 과업 범위와 상세한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의 ‘디자인 감리’, ‘사후설계관리’ 및 ‘설계의도 구현’ 업무에서는 해당 업무를 ‘설계도서의 해석 및 자문’, ‘자재와 장비의 치수ㆍ위치ㆍ재질ㆍ질감ㆍ색상 등의 선정 및 변경에 대한 검토ㆍ보완’ 등으로 제한했다. 이는 기존 법안들이 제정될 당시, 공사 이전인 실시설계 단계에서의 업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일본의 ‘설계의도 전달’ 개념을 주로 참고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는 설계의도 구현의 업무 범위를 공사 단계로까지 확장했다. 우선 설계자가 공사 단계에서 ‘시공상세도’를 검토 및 확인하도록 했다. 이 업무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수많은 공공건축 프로젝트에서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제도적으로 ‘감리자’의 ‘필수 업무’로 명시하지 않아서▼6 감리자들은 이 업무를 생략해왔고, 시공자들은 아예 상세시공도서 작성을 기피했기에, 건축물 실현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수행되지 못했었다. 또한 서울시는 설계자가 주요 공정 및 본인이 요청한 공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설비 엔지니어와 설계의도 구현에 해당하는 사항에 대해 협의 및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건축 감리와 엔지니어링 감리의 분리 발주로 인해 발생하던 문제들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면에서 이번 제도는 공공건축에서 설계자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진일보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또한 적용되는 프로젝트도 서울시에서 발주하는 모든 공공건축물로 확대해, 설계비 1억 원 이상의 공공건축물만을 대상으로 하는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보다 광범위하다.

 

 



 

 

그럼에도 해외와 비교해볼 때, 현재 시행된 제도에서는 설계자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돼 있다. 해외의 경우 설계의도 구현의 업무 범위를 공사준비 단계에서부터 준공 시까지 다양한 단계에 걸쳐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공사준비 단계에서는 건축주가 적합한 시공자를 선정할 수 있도록 설계의도 전달뿐 아니라 시공자가 제시한 재료 샘플, 예산 및 시공상세도면 등을 사전검토하고 시공자 선정 입찰 과정에도 참여해 건축주의 시공자 선정을 돕는다. 이를 통해 설계도서와 공사 단계 사이를 매끄럽게 연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공사의 각 기성 단계에서 해당 공정이 설계도서에 부합해 시공됐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승인하는 권한이 설계자에게 부여돼있다. 특히 중간 기성의 경우, 설계자의 검토 및 확인에 따라 공사비의 지급이 결정되며, 최종 완료 시에도 사용승인에 필요한 시공의 적합 여부 판단, 공사비 최종 지급의 검토 및 확인도 설계자의 역할로 주어진다. 물론 국내에서는 기존에 확립된 감리자, 건설사업관리자 및 공사감독관의 역할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역할 확대가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시행 후 모니터링을 통해 연관 업무들을 조율하고 업무 범위를 조정하는 등 보완이 뒤따라야만 한다.

아쉬운 점을 한 가지 더 꼽자면 서울시의 이번 제도는 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대가가 적게 책정돼있다. 서울시는 ‘실비정액가산’과 ‘요율’ 방식 중에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공사비가 적을수록 요율이 높아지도록 해 낮은 요율을 보완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해당 대가의 요율이 설계비 대비 일정한 반면, 서울시의 시행안은 요율 변화 폭이 0.79~19.32%로 상당히 크고 그 요율 또한 낮게 책정돼 있다. 제도가 이제 막 시행된 만큼, 현장 상황을 잘 모니터링해 실제 수행하는 업무에 부합한 대가를 산정하기 위한 검토 및 보완이 필요하다.

설계의도 구현은 설계자가 공사 단계에서 건축물이 디자인과 품격을 갖추기 위해 해왔던 기본 업무이다. 그동안 제도적으로는 인정받는 업무 영역 밖에 있었다. 이번 설계의도 구현 업무의 공식화를 통해서, 건축사의 기본 업무 또한, 설계만이 아닌 설계와 공사 단계 업무로 재정립하고, 그에 대한 대가 또한, ‘설계비’가 아닌, 건축사의 ‘기본 업무 대가’로 재정립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이번 서울시의 설계의도 구현제도 시행은 건축사의 업역을 본연에 맞게 재정립하기 위한 작지만 큰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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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에세이에서 주요 용어의 정의는 「건축기본법」 제3조를 따랐다. (‘건축디자인’이란 품격과 품질이 우수한 건축물과 공간환경의 조성으로 건축의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건축물과 공간환경을 기획・설계하고 개선하는 행위를 말한다. ‘품격’이란 주변환경과의 관계, 규모, 형태, 구조, 재료, 시공 수준 등을 통하여 그 목적과 지역의 정체성을 창출할 수 있는 적절성을 말한다. ‘품질’이란 안전, 보건, 기능, 쾌적, 자원절약과 재활용 등의 객관적 성능을 말한다.)

2. 공공건축 품격향상을 위한 설계의도 구현 시행 계획, 서울시 도시공간개선단, 2020.

3. 「건축법」 ‘시행규칙(법령)’ 및 ‘건축공사 감리세부기준(행정규칙)’, ‘건축물의 공사감리 표준계약서(행정규칙)’ 등에 명시되어 있는 건축사의 감리 업무를 살펴보면 공사와 관련한 ‘품질’과 ‘안전’에 대한 업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있다.

4. 설계의도 구현을 위한 공공건축 실태조사 연구, 국가건축정책위원회, 2019.

5. 건축사의 설계 및 공사 단계 업무에 대한 명칭과 분류는 국가별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감리’, ‘설계의도 구현’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감리’, ‘설계의도 전달’에서 차용한 표현으로 여타 해외 사례에는 1:1로 대응되지 않는다. 해외 사례에서 설계자의 공사단계 업무는 감리와는 구분되는 건축물의 디자인과 품격을 위한 설계자 고유의 업무에 해당한다.

6. 건축공사 감리 세부 기준의 제2장 ‘공사감리 업무’에 따르면 ‘5,000제곱미터 이상’인 건축물에 한해 ‘필요 시에 요청’할 수 있는 업무로 명시돼, 많은 경우 감리자들이 이 업무를 생략해왔다. 


남정민
남정민은 현재 고려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며, OA-Lab 건축연구소를 통해 설계 활동을 하고 있다. 아카데미의 디자인 연구와 실무의 현실 적용 간의 상호 연계를 통해서, 관찰과 실험에 기반한 디자인이 일상 속에서 삶의 경험을 담고, 사회 속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건축설계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KVA, OMA, 사프디 아키텍츠 등 다양한 사무소에서 인턴과 실무 경험을 쌓은 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하버드 대학원에서 졸업논문상 파이널리스트, 2009 AIA미국건축가협회(메사추세츠주 챕터) 주택공모전 대상, 2015 AIA미국건축가협회(국제 챕터) 건축부문 대상, 2018 젊은건축가상(문화체육관광부)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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