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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건축: 제기

어반에이전시 + 에이제이건축사사무소

박희찬
사진
김창묵
자료제공
어반에이전시
진행
윤예림 기자
background





재개발의 욕망 이후

 

2002년 뉴타운 정책 발표 후 개발에 대한 환상으로 서울 전역은 들끓었고, 제기동 5구역도 다르지 않았다. 2006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은 조합 설립의 부침을 겪으며, 10여 년이 지난 2018년에서야 재개발 구역에서 해제됐다. 하지만 제기동 5구역은 재개발에 대한 환상이 심어준 욕망의 크기만큼이나 도시 공간이 급속도로 노후화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대지는 이 제기동 5구역의 한복판, 시간이 정지해버렸던 도시 공간 사이에 위치한다.

 

대지는 길의 폭이 너무 좁아 차량 통과가 불가능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주택들로 둘러싸인 40m 길이의 소로는 밤길을 걷기에 꺼려질 정도로 노후했다. 그렇기에 고려대학교 정문에서 불과 약 2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젊음의 활기와는 동떨어진 채 시간이 멈춘 진공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재개발 구역 해제 후 대규모 재개발이 취소되어, 비로소 개인들이 하나둘씩 동네를 개선해갈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인근 지역에서도 학생들을 위한 상점과 식당들이 하나둘 새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당 대지는 크게는 100㎡, 작게는 5㎡ 크기의 필지들이 군집해 있었다. 필지 정리가 우선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점은 이미 총 15개의 작은 필지들이 여덟 개 필지로 합필이 진행된 상태였다. 그러나 합필된 필지들마저도 각각을 단독으로 계획하기에는 너무나 협소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합의’를 통한 통합과 분할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건축 프로세스로 시간이 멈춰 있던 이곳에 활력 있는 일상과 새로운 이야기를 불어넣고자 조심스럽게 계획을 진행했다.

 

 

 

 

 

1 여덟 필지, 여덟 건축주

2 각 필지는 개별적으로 설계되기에 작음

 

 

3 건축주의 동의를 거쳐 건물 필지를 분할하는 합벽을 활용해 새로운 건축 유형 제안

4 각 건물의 지붕 형태를 다양하게 제안

 

 

 5 각 건물의 상부층 테라스 형태를 다양하게 제안

6 공동주택이 활기찬 일상과 새로운 이야기를 가로에 제공

 

 

 

합의 건축

 

이 프로젝트는 젊은 대학생들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주거 공간을 마련함과 동시에, 주변 도시환경을 압도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활기가 있는 도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두 가지의 숙제를 안고 있었다. 각각의 필지가 가지는 불리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여덟 명의 건축주들 사이의 합의는 ‘자율주택 정비사업’이라는 정책적 틀 안에서 새로운 도시재생의 가능성을 만들었다. 자율주택 정비사업은 단독, 다세대 및 연립주택을 연접한 주택과 함께 개량 또는 건설할 수 있도록 하며, 두 명 이상의 토지 소유자가 주민합의체를 구성해 노후 주택을 정비하는 사업이다. 여덟 개 필지의 개별 건축주들은 주민합의체를 구성해 건축 계획부터 운영 방식까지 협의를 통해 진행했다. 건축가는 이 사이에서 각 건축주의 서로 다른 요구 사항을 취합하고 중재하는 것으로 건축 업무를 시작했다. 지난한 협의 과정 속에서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도시 건축 유형의 토대가 차츰 형성됐다.

 

우선, 일조사선제한으로 적정 용적률의 획득이 불가능했던 각각의 대지에 합리적인 건축  면적을  확보하기 위해 최근 국내에서는 여러 이유로 잘 쓰이지 않았던 건축 유형인 합벽 건축을 제안했다. 건축주들은 서로의 건물이 측벽을 공유하도록 상호 간에 합의를 이뤘다. 합벽 건축을 통해 여덟 개의 프로젝트들을 네 개의 건축군으로 통합한 뒤, 박공지붕의 교차 반복과 각 건물 상층부의 다양한 테라스 형태로 변화를 제안했다. 이로써 각 필지들마다 외관에 차별성을 부여하면서도 이에 파생되는 내부 공간 역시 매 건물마다 다양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한편 기존에 존재하던 이웃 건물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벽돌을 주 외장재로 사용하는 대신, 벽돌의 색상을 순차적으로 교차 반복해 사용함으로써 자칫 상대적으로 거대해 보일 수 있는 건물의 볼륨을 분할하고자 했다.

 

주민들 간의 합의는 합리적 건축 면적의 확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주민합의체는 전면 가로를 보다 활성화하고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을 경우에는 건물 전면에 주차를 하지 말자는 제안에 동의했다. 또한 건물들 사이에 담장을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각 건물의 전후면을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도록 해 각 필지에 남은 자투리 공간을 도시 공간으로 편입하는 오픈 플랜에도 동의했다. 합의는 공사 과정에서도  계속됐다. 비좁은  전면 도로 폭 때문에 여덟 개의 필지에서 동시다발적인 시공이 불가능했고, 가장 안쪽에 위치하는 필지부터 차례대로 시공이 이루어져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시공 기간 역시 두 배 이상 길어졌으나 주민합의체는 상호 합의하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처럼 합의에 기반한 건축 과정을 통해 각 건물의 개성과 내부 공간의 다양성을 고려하면서도 건물이 주변 도시환경에 적절히 녹아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었고, 모든 사안들은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결정됐다. 여덟 개의 필지를 통합하고 다시금 분할하는 프로세스는 단순히 건축 형태뿐만이 아닌 주민 협의를 이끌어내는 장치로서 건축 과정에 전반적으로 적용됐다. 그 결과 프로젝트에 일관성과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게 됐다.

 

 

 

 

 

공존과 참여

 

현재 총 여덟 개의 필지 위에, 서로 다른 여덟 개의 프로젝트 안에서 80여 명의 대학생 혹은 젊은 직장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각각의 건물들은 필지가 처한 상황과 건축주의 요구에 맞게 단독주택, 스튜디오 타입, 혹은 셰어하우스 타입의 각기 다른 1인 주거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각각의 건물에 공용주방, 옥상정원, 공용 스터디 카페 등의 공용 프로그램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삽입했다. 건물별로 다른 내부 구성에 따라 주민들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공용부의 층별 구성, 혹은 건물별 구성에 따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구성원의 수가 다르게 나타났으며, 공용주방의 위치 및 상태에 따라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빈도 차이도 발생했다. 건축 환경에 따라 구성원들이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정도나 친밀도가 달랐고 그들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 이를 지켜나가는 모습도 저마다 달랐다. 

 

각 건물 1층에 연속적으로 배치된 상점들은 이 도시 공간을 더 안전하고 쾌적하게 만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현재 1층에는 팝업 스토어, 베이커리, 디자인 스튜디오, 카페, 꽃집, 반려동물을 위한 디자인 숍 등이 거리를 채우고 있으며, 이들 역시 서로 돈독한 관계를 이루며 가로 활성화에 동참하고 있다.​ 

 

 

월간 「SPACE(공간)」 674호(2024년 01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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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어반에이전시(박희찬, 헤닝 슈튀벤)+ 에이제이건축사사무소(서관호, 김정훈)

설계담당

권민재, 로사 페르난데스, 스캇 그바박, 가스파르 카네파, 나르시사 이오니타, 이두형,

위치

서울시 동대문구 안암로22길 일대

용도

공동주택, 근린생활시설

대지면적

1,004.55m2

건축면적

564.76m²

연면적

2,110.42m2

규모

지상 4~5층, 지하 1층

높이

18m

건폐율

56.22%

용적률

197.23%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외부마감

벽돌, 컬러 강판, 로이복층유리

내부마감

에폭시라이닝, 데코타일, 페인트

구조설계

(주)솔빛엔지니어링

기계설계

선화엔지니어링

전기설계

엠케이청효(주)

시공

(주)서양이엔씨, (주)시우종합건설

설계기간

2018. 12. ~ 2020. 2.

시공기간

2020. 4. ~ 2022. 1.

공사비

약 51억 원

건축주

개인 건축주 8인

조경설계

슬로우파마씨


어반에이전시
어반에이전시는 2013년 박희찬과 헤닝 슈튀벤, 앤드루 그리핀, 맥심 라루시가 공동 설립한 건축 디자인 그룹이다. 현재 코펜하겐, 더블린, 뒤셀도르프, 리옹에 소재한 사무소를 기점으로 다양한 도시,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코펜하겐의 도심 수변 재생 프로젝트 칼브볼 웨이브, 보행자와 자전거를 위한 릴레 랑에브로, 룩셈부르크의 제철소 부지 재생 마스터플랜, 서울의 브라이튼 여의도 복합시설, 광주의 전방ㆍ일신방직 공장부지 마스터플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