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풍경
몇 년 전 처음 조치원 정수장을 찾았을 때 눈에 띈 것은 정수장 본관 전면의 ‘甘泉流如藍’(감천류여람)이라는 현판이었다. 이는 ‘감미로운 샘물이 흐르며 쪽빛 하늘을 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80여 년의 세월 동안 도시의 젖줄로서 푸른 하늘을 품고자 했던 조치원 정수장, 이제 그 자체가 장소성의 핵심이 된다. 이곳은 산업 시대에서 문화 시대로 전환되어왔음을 기억한다. 산업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대지는 그 자체로 기억의 대상이며 새로운 문화정원으로 재생하기 위한 특별한 인프라가 된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기억을 마주한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각 개인의 기억은 장소의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보다 큰 문맥을 갖는 서사를 완성한다.
특수한 기능을 담기 위해 변형된 지형은 비어있는 정수장과 함께 이곳의 가장 큰 가능성이다. 이 장소의 재생을 위해 장소의 기억에 따른 관계성 회복, 문화가 흐르는 물길에 의한 경관의 복원, 커뮤니티 중심 공간으로서의 재생의 세 가지 개념이 중요한데, 시간을 경험하는 여러 장치를 통해 문화적 맥락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그동안 단절되어왔던 기존 정수장 부지와 공원 부지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의 열린 공간으로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 집단기억에 대한 흔적 찾기를 통해 사람 길과 물길을 고려하고 도시 축과 물길 축 등 축들의 선택적 결합을 통해 연계성을 강화하는 공원 배치를 한다. 그리고 과도한 물리적 시설물을 배제한 채, 최소한의 장치들로 장소의 기억을 재생하고 환기하도록 한다. 둘째, 지역의 환경적 요소를 수용하여 기존 공원의 경관을 보존하고 나아가 대지의 역사에 근거하여 생태적 경관을 회복하도록 한다. 지금까지 모아서 정화되어왔던 물을 끌어들여 이곳이 정수장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암시하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도시의 물이 모이고 여과되고 정수되어 배수되는 프로세스에서 유추하여, 사람이 모이고 흐르고 정화되어 문화가 마을로 배출되는 프로세스로 경관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셋째,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개인의 기억이 장소의 기억을 공유하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다양한 세대의 참여와 이용을 통해 자생적 문화 커뮤니티를 형성하도록 한다.
조치원문화정원을 설계한 건축가의 개념은 ‘문화의 단’으로서, 정수장과 소공원의 역사적 가치와 기억이 공존하는 기존 시설물들에 새로운 ‘단’이 더해져 조치원문화정원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새로운 조합으로 만난다는 개념이다. 1935년부터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2013년 기능이 상실된 시설과 담장으로 분리된 근린공원을 통합하여 시민들이 전시, 관람, 체험 등의 문화 활동을 누릴 수 있는 장소로 재생하는 프로젝트이다. 본래의 기능을 잃은 정수장의 역사적, 장소적 가치를 발견하고, 다양한 세대, 지역, 그리고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수장의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여 이들의 사회적 교류를 증진하고, 도시정원이라는 새로운 장소적 가능성을 더하여 ‘조치원문화정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장소성의 재생을 위한 세 가지 중요 개념에 대해 건축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 것으로 해석된다. 근대건축 유산인 정수장 본관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자체가 대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되고 내부는 절제와 비움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기능에서 출발해 이제는 형상 그 자체로 정수장의 장소성을 지키고 있는 두 여과기는 서로 ‘상리공생’의 의미를 지니면서 공원 영역을 내부로 확장한다. 기존 지하 저수조를 활용하여 만든 야외 전시장은 오랜 세월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콘크리트의 물성과 저수조의 물때 흔적이 간직한 시간성을 결합하여 비움과 채움의 관계성을 표현한다. 유일한 신축건물로서 건축가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낼 수 있었던,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센터동은 독립 매스로 공원 전면에 배치되어 옛것과 새로운 것의 ‘병치’를 통해 각자의 독립적인 기능과 시대적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다만 복원과 리노베이션의 관점에서 1935년 건립된 정수장 원형의 모습을 복원하고 1970, 80년대 증축된 부분에 의해 덧씌워졌던 벽돌벽을 드러나게 하여 생명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결합 방식으로 옛것과 새것의 관계성을 제안했다면, 더 미래지향적 가치가 돋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증축 매스에 의해 원형의 진정성이 훼손되었던 정수장 본관을 복원하여 문화재의 가치를 이어가고 정수장의 드러나지 않은 정면성이 도시를 향해 열리도록 새로운 건물이 배경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구성과 배치를 하는 접근법으로 문화공원의 장소성을 재정의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증축 매스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외벽 타일 위에 유리를 씌워 시간의 켜를 한 층 더 쌓은 해법도 나름 의미는 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 옛것의 ‘보존’과 새로운 것의 ‘삽입’에 대해 ‘이슈를 불러일으키는’ 제안이라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센터동 반사유리 입면에 정수장 본관의 모습이 투영되는 제스처는 병치의 일환이지만, 센터동과 정수장 본관에 붙어 있는 증축 매스의 존재성이 반사유리로 인해 더욱 강하게 느껴져, 투명한 유리로 물성을 약화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에 조치원문화정원을 찾았을 때 가장 눈에 띈 것은 열심히 꽃밭을 가꾸고 있는 시민들의 단란한 모습과, 펜스에 의해 단절되었던 기존 공원과 정수장 부지가 통합된 공원으로서 편안한 일상성을 누리는 장소가 되어있는 풍경이었다. 세심하게 고려된 순환동선으로 자연스럽게 엮인 외부 공간, 그리고 기존의 수로를 활용하여 연출한 수공간과 함께 시민의 품에 돌아온 공원은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각자의 정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조치원문화정원은 오랜 시간 축적된 역사의 일부이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 경험을 공급하여 미래의 기억을 생산하는 문화 정수장이 되어가고 있다. 다음 세 번째 찾았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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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엠에이건축사사무소(이은경)
조지현, 김석현, 어혜령
세종시 조치원읍 평리
문화 및 집회 시설(전시장), 근린생활시설, 기계실
13,538m²
1,156.26m²
2,115.29m²
지상 2층
8.54%
15.62%
철골조
럭스틸, 목재루버
미래에스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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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 8.
2018.12. ~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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