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6년 2월호 (통권 699호)

‘Salzburg’, f/11, 1/125, Natural Light 연작, c-print, 24×35.5cm, 1977 ©Heirs of Luigi Ghirr

‘le Rousse’, Kodachrome 연작, c-print, 17×27cm, 1976 ©Heirs of Luigi Ghirr
2025년 12월 12일, 루이지 기리(1943~1992)의 국내 첫 회고전 〈Infinite Landscapes〉가 뮤지엄한미 삼청본관에서 막을 열었다. 루이지 기리는 이탈리아 컬러사진의 선구자로, 미국 중심의 현대사진 담론이 우세하던 시기에 유럽 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인물이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진 작업을 시작한 그는 사진을 프레임 안의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사고를 확장하고,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사유의 도구로 이해했다. 그에게 사진가란 단순히 풍경을 복제하는 이가 아니라, “자신만의 역할이나 작업에 몰입하는 존재”였다. 이번 전시는 1970년대 초기 작업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루이지 기리의 삶과 시선을 따라가는 작품 130여 점으로 구성된다.
전시의 시작인 ‘사물과 이미지 1’에서는 기리가 일상에서 마주한 도시의 조각들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다루어지는 Photographs from my Early Years 연작(1971)에서는 눈발이 흩날리는 스노우글로브나, 금박 별이 빛나는 구겨진 검은 비닐 등의 모티프를 통해 일상적 사물을 시적으로 환기시킨다. 한편 Kodachrome 연작(1970~1978)에선 기리가 프레이밍한 다양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나무와 같은 자연물부터 창문, 문, 거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을 통해 장면은 분할되고, 카메라의 프레임을 통해 다시 한번 구성된다. 이렇듯 기리는 사진의 프레임을 통해 관람객에게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두 번째 섹션 ‘사물과 이미지 2’에서는 관찰 행위의 구조와 이미지 내부 요소들 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카메라의 조리개 값과 셔터 속도, 빛의 종류를 제목으로 한 f/11, 1/125, Natural Light 연작(1970~1979)에서는 사진을 촬영하거나 풍경을 바라보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인물들의 뒷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무언가를 응시하는 타인의 모습을 담은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진을 찍는 작가의 시선과 이미지 속 시선, 그리고 이를 다시 바라보는 관람객의 시선이 겹겹이 중첩되는 구조를 형성한다. 연작의 제목 일부인 ‘Natural Light’에서 드러나듯, 기리는 프레이밍과 더불어 빛을 사진의 핵심 요소로 꼽으며 주로 자연광을 활용해 빛이 공간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시간을 사진 속에 담아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사진을 “본질적으로 공간과 시간의 관계와 맞닿아 있는 매체”라고 설명한다. 또 Still Life 연작(1977~1980)에서는 망원경, 담배, 지도, 책, 회화 작품,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 등 기리를 매혹시킨 일상적 사물들이 등장한다. 정물의 구도와 배치는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키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표면 너머의 맥락을 상상하게 한다.
아래층에서 이어지는 ‘이탈리아 풍경 1’과 ‘이탈리아 풍경 2’ 섹션에서는 Italian Landscape 연작(1989~1992)을 통해 기리가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를 오가며 포착한 장면들이 소개된다. 신전의 일부와 자연을 병치하거나, 조각상의 일부만을 프레임에 담은 사진들은 주관적 인식에 의해 형성되는 장소의 감각을 전달한다. 이 섹션에는 기리의 아내이자 작업의 동반자였던 파올라 보르곤조니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소개하는 별도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마지막 섹션 ‘스튜디오 풍경’에서는 책과 음반, 건축자재 등 일상 속 사물들을 통해, 부재하는 인물을 암시하는 공간의 초상이 선보여진다. 여기에는 기리의 자택 내부를 촬영한 Identikit 연작 (1976~1979)과 함께, 건축가 알도 로시와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스튜디오를 담은 작업들을 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3월 15일까지 진행된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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