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거 뭉크 융프라우

한 지붕 아래 주거 

장소성과 건축의 관계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색과 연구의 결과물로서, 그 존재를 전형성 속에서 찾게 된다. 스토커리건축이 설계한 란카테의 다세대주택, 아이거 뭉크 융프라우는 이런 명제에 대한 나름의 명확한 해석을 제시해주며 장소성과 건축 개념 사이에 불가분의 관계를 구축해내고자 노력했다.

‘대지(telluric: 흙을 의미하는 라틴어 tellus에서 유래)’라는 요소는 디자인 과정 중에 투영의 대상이 되어 극적 배경 또는 제네로소산의 자태를 닮은 시노그래피 형태로 횡단면상에 (종속관계에 따라 분포된 식물들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좁고 긴 필지의 주택은 모두 약간의 텃밭과 개인 농장을 보유하고 있는 저밀도 도심 주거단지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란카테 중심지와 그곳 교회에서 벗어나 비아 몰리노 누오보 길에 도착하면 아이거 뭉크 융프라우 필지가 나타나는데, 급하게 굽은 길을 지나면 가로는 시골길로 바뀌며 그 양쪽으로는 울타리, 가로수, 농경지가 펼쳐진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경계부인 것이다. 디자인을 전개하고 제시해야 하는 장소는 이렇게 섬세하고 독특했다. 그리고 필지의 산악지형과 형태를 반영한 디자인은 독특하고 강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 

건물은 필지에 가로 방향으로 들어서 있으며, 길고 그늘진 통로이자 진입로 역할을 하는 길을 중심으로 서쪽 경계의 옹벽과 거리를 두고 있다. 이 그늘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흙의 향기, 고도의 차이, 횡단면의 입체성, 기단과 입면으로 이루어진 콘크리트 구조의 이중성 등 건물이 품고 있는 다양한 주제를 읽고 이해하게 된다. 외부 표면 처리 방식에서는 ‘발굴’이라는 주제에 따라 일종의 기단을 생성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고, 이는 석고의 두께 차이가 만들어내는 돌림띠를 통해 분명해진다. 이 ‘기단’은 노출콘크리트 외장처럼 지면에 맞닿아 있는 가장 아래층의 서비스 영역, 기계실, 저장고, 차고 등을 덮어준다. 기단 위로 솟은 부분은 외장을 부드럽고 거친 두 가지 질감의 석고로 마감했다. 후자를 적용한 조적면은 각 공간 기능에 맞게 설계했음에도 아무렇게나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창호들의 크기 및 형태의 불규칙성을 해소해준다. 실내 공간은 다양한 주거 형태의 수용이 가능하도록 조합되고, 구성되었다. 건물의 3분의 1은 중층 빌라로 설계되었고, 나머지는 2개 층을 사용하는 4채의 임대용 주거 세대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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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형태적 다양성을 유지해주고 지켜주는 것은 높이와 경사가 서로 다른 3개의 지붕마루를 지닌 광택을 낸 지붕의 단순성이다. 단절된 선은 북동쪽의 산세와 화답하며 ‘아이거 뭉크 융프라우’라는 건물 이름처럼 스위스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산에 헌사를 바친다.

마감재는 입면 구성상의 극명한 불규칙성을 해소해주기도 한다. 동측 입면은 대각선 필지의 경계를 따라 서 있는 나무들에 가려진 채 멘드리시오를 바라보고 있다. 창들은 각 방의 필요에 맞게 설계했지만, 경계 벽에는 아주 독특한 배치 형태를 만들어낸다. 서쪽 입면(동쪽 입면의 분신)은 창들이 적고 크기도 작지만 아래의 길고 그늘진 길과 위의 포도 농장을 볼 수 있다. 남쪽과 북쪽 입면은 전면 유리로 덮인 채 경계벽과 돌출형 지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마치 광학 망원경처럼 방향을 제시해주며 주변 풍광으로 시선을 인도해준다.

실내 공간은 외부의 확연한 구조적 명료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절제된 소재 사용은 소박한 매력을 선사해주고, 앞서 말했던 이중성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준다. 흰색과 차가운​ 색감의 벽과 가구, 문, 창틀 등은 (목조 지붕 아래) 최상층 방들의 마감재로 사용한 목재의 따뜻하고 친근한 색감과 대비를 이룬다. 아이거 뭉크 융프라우에서 주거는 삶이란 믿음이 투영된 ‘한 지붕 아래 주거들’으로 정의할 수 있다. 때문에 그 안에는 다양한 입면 구성, 다채로운 창호 설계, 역동적인 마감 방식, 실내 공간 구조 등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는 절대적이고 명확한 기조가 존재한다. 지붕은 경사의 이동, 유지, 변경을 통해 늘 다채롭고 아늑한 실내 공간을 형성해준다. 각 입면은 필요 또는 외부 조망 욕구에 대응해 열리거나 닫힌다. 또한 일출 또는 일몰 시에 햇빛을 받아들이거나 그림자를 드리워준다. 다양한 석고 마감법을 적용한 외장면에서는 그림자가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말해준다. 그 아래의 기단은 안정감을 부여해준다. 기단은 구조적이고 견고하다. 또한 대지와 관계를 맺으며 외부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간직한 잿빛 껍질이 된다. 그리고 이 성역과 그 위의 역동적인 건축은 상생 관계 속에서 서로 소통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집은 앞서 ‘대지’로 표현한 전형성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피상적이지 않은 현대성과 의미를 획득한다. 이는​ 디테일에 대한 관심과 집중, 전략적 소재의 사용, 공간(또는 장소성)과의 신성하고 공감적인 연계 그리고 무엇보다 디자인 콘셉트의 단순성과 일관성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행 박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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